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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여행 (16/17)

외전 2. 여행

이른 아침, 세수까지 했는데도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해인이 눈을 비비적거렸다. 뭉그적뭉그적 미리 준비해 둔 옷을 입을 동안 백담호는 벌써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차에 시동 걸어 놓고 있을게, 해인아.”

외치는 목소리에 해인은 “으응….” 하고 늘어지게 대답했지만, 백담호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옷을 다 입었을 즈음에는 드디어 잠이 완전히 달아나 있었다. 현관으로 향하자 두식이가 총총총 걸어와 가지 말라는 듯 해인의 다리에 몸을 부비적거렸다. 두식이를 안아 얼굴에 몇 번 뽀뽀를 한 해인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으, 추워.”

한겨울의 냉기가 복도에서부터 느껴졌다. 순간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인은 이내 백담호와 처음 가는 여행의 설렘으로 지워 버렸다. 빠르게 밑으로 내려가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히터를 미리 틀어 놓은 내부 온도에 추위가 가시는 듯했다.

백담호는 해인에게 편의점에서 사 온 따뜻한 두유를 건넸다.

“아, 땡큐.”

그러자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가락에 따스한 온기가 퍼졌다. 해인이 웃으며 돌아보니 백담호도 나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 * *

아침 7시쯤에 출발했는데 벌써 점심때가 다되었다. 햇빛이 포근한 날을 기대했건만 하늘은 뿌옇기만 했다. 미리 예약해 둔 조개구이집 주차장에 차를 세운 백담호가 옆을 돌아봤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를 나올 때까지만 해도 똘망똘망하던 해인은 어느새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손에는 두어 개쯤 남은 젤리 봉지가 들려 있었다.

“해인아, 다 왔어.”

안전띠를 풀어준 담호가 아기를 깨우듯 섬세한 손길로 해인의 앞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감긴 눈꺼풀이 잘게 움찔거리던 해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에 묻은 졸음을 떨어트리듯 해인은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벌써 다 왔어? 나 언제 잠들었지….”

웅얼거리는 말에 백담호는 작게 웃으며 “아까부터 졸더라.”라고 대답했다. 해인은 아침부터 운전하는 사람 옆에 두고 잘 생각은 없었기에 멋쩍은 듯 제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어색하게 말린 해인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예고 없이 입을 맞춘 백담호는 여상하게 내리자, 하고는 몸을 돌렸다.

해인은 잠시 눈만 끔뻑이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후우….”

숨을 들이마시자 폐부 깊숙하게 파고들어 오는 시린 공기가 상쾌하면서도 아렸다. 확실히 도시의 혼탁한 공기보다 맑은 느낌이었다. 서울을 벗어났던 게 마지막으로 벌써 2년 전 일이었다.

“낮인데도 꽤 춥네. 어서 들어가자.”

옆에 다가온 백담호가 해인의 한 손을 잡아 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하게 식당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 유명한 곳답게 점심시간과 겹치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정도로 많았다. 예약을 하고 온 게 다행이었다.

종업원에게 이름을 말하자 안쪽의 방으로 안내해 줬다. 식탁에는 이미 밑반찬과 식기가 놓여 있었다. 식탁 가운데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자리에 앉은 지 오래되지 않아 종업원이 엄청 큰 은색 냄비를 들고 와 큰 구멍에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거대한 크기에 당황한 해인이 앞에 앉은 백담호를 쳐다보니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15분 뒤에 제가 뚜껑 열어 드릴게요. 타이머 울리면 벨 눌러 주세요.”

타이머를 맞춘 종업원이 방을 나갔다. 해인은 물컵에 물을 따라 백담호에게 건네면서도 냄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냄비 왜 이렇게 커….”

대체 몇 인분을 시킨 거야. 일단 절대 2인분은 아닐 거라고 해인은 확신했다. 냄비 크기만 봐서는 족히 4명은 와서 먹을 만한 양으로 보였다.

“먹다가 배부르면 남겨.”

뭐, 그건 그렇지만…. 해인은 그래도 조금 아깝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담호는 원래부터 이 크기인 걸 알았다는 듯이 잔잔할 뿐이었다. 15분 정도 지나 타이머가 울렸고, 벨을 누르자마자 종업원이 들어왔다. 드디어 열린 냄비 안에선 거대한 증기가 위로 솟구쳤다. 연기가 점점 흩어지니 냄비 속이 서서히 보였다.

안에는 키조개, 전복, 낙지, 대게, 새우, 가리비 등 다양한 해산물들이 있었고 가운데엔 뚝배기에 담긴 치즈가 있었다. 신선한 해산물 향과 잘 익어 먹음직스러운 광경에 해인은 왠지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의 젓가락은 이미 냄비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키조개의 관자 위에 치즈를 잔뜩 올려 입에 넣었다. 고소한 치즈의 풍미와 두꺼운 관자의 식감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해인은 평소에도 식사에 집중하는 편이긴 했지만 유독 이번 식사는 조용했다. 백담호는 해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의 빈 그릇 위에 전복을 놓아 줬다. 해인은 말 대신 눈짓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다시금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던 해인이 만족스러운 낯을 하며 벽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 거대한 냄비를 싹싹 비운 것은 물론. 칼국수 한 그릇과 디저트로 나온 녹차와 한과, 그리고 작은 우유 빙수까지 전부 먹어 치웠다.

“배불러?”

“어, 완전. 진짜.”

해인이 맨투맨 위로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백담호는 옅게 웃다가 깔끔한 테이블 위를 쓰윽 살폈다. 놓인 그릇이 전부 깨끗했다. 해인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먹는구나. 백담호는 속으로 감탄했다.

* * *

식사 후, 미리 티켓을 예매해 둔 미디어 아트 전시회를 보고 나오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날이 계속 흐리더니 기어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찬 공기에 닿은 두 사람의 피부가 발갛게 물들었다.

해인은 무심히 위를 보다 손바닥을 뻗었다. 손 위로 커다란 함박눈 송이가 떨어졌다가 빠르게 녹았다.

“바다는 내일 보고 오늘은 호텔로 들어갈까?”

해인은 고민하다 전시관 너머로 아주 작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신경이 사로잡혔다. 손발은 아릴 정도로 차게 식어 갔지만 버틸 만했다. 해인이 슬쩍 백담호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올려다봤다.

“조금만 걷다가 들어가자. 아쉬워.”

“그래.”

해가 저물어 어두운 남색이 깔린 해변을 둘은 느리게 걸었다. 파도가 출렁이는 소리와 사박거리는 모래 소리만 잔잔하게 퍼졌다. 해인은 수평선 너머를 멍하니 응시했다. 백담호와 맞잡은 손은 따뜻했고 안정감이 들었다. 이제야 무언가 백담호와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네.”

중얼거리듯 들린 낮은 목소리는 평온한 분위기에 어우러지게 퍼졌다. 수평선을 보던 해인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시선이 부딪혔다. 해인은 뭐가 좋냐고 묻는 대신 나도, 라고 대답했다. 무엇 하나 콕 집기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 * *

두 사람이 호텔에 자리 잡은 야외 스파로 향했을 때는 한참 늦은 밤이었다.

해인은 이 시간에도 스파 이용이 가능한지 의아했지만, 백담호가 괜찮다며 이끌었다. 다행히 아직 이용이 가능한지 조명들이 켜져 있었다. 늦은 밤, 타월을 두르고 나온 해인은 동그란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봤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미어터질 줄 알았건만 의외로 한적했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하긴, 너무 시간이 늦기는 했다.

고요한 야외 스파에 서 있자니 기분이 조금 신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날카로운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렸다. 해인은 바로 물속에 입수했다. 머리는 춥고 물속에 있는 몸은 따뜻하니 기분이 오묘하게 좋았다.

온천 특유의 향에 정신까지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보던 해인이 뒤를 돌아봤다. 백담호는 춥지도 않은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백담호! 빨리 와 봐, 진짜 엄청 좋아.”

해인이 빠르게 손짓을 했다. 해인의 눈에 오늘 중 두 번째로 생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는 조개찜을 먹을 때였다. 다른 곳에서도 즐거워하기는 했지만, 해인은 움직이는 것보단 어딘가에 가만히 있는 걸 더 좋아했다. 추위와 열기에 해인의 양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좋아?”

온천에 발을 담근 백담호가 물었다. 해인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으로 수면 위로 박수를 치듯 손장난을 쳤다.

“응, 온천 같은 곳 많이 안 와 봤거든.”

“그래? 장소 잘 골랐네.”

“응, 좋아.”

해인의 얼굴에 꾸밈없이 드러난 해맑은 미소에 백담호가 말없이 바라만 봤다. 해인 역시도 백담호를 마주 봤다. 밖에서 들리던 작은 소음이 이제는 마치 장막에 싸여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 내리는 풍경 속 오직 둘 만 이 세상에 남은, 그런 기분이었다.

백담호는 스르르 해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물 아래 있는 손을 포개어 잡았다.

“자주 와야겠네.”

해인이 대답할 새도 없이 백담호가 바로 또 말을 이었다.

“여행 자주 다니자, 해인아. 앞으로 계속.”

어깨 위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해인이 고개를 옆으로 돌아보니 바로 까만 눈과 마주했다. 수백 번을 봐도 고요하게 빛나는 까만 시선에 애정이 서린 걸 발견할 때면 해인은 괜스레 가슴 속이 콩콩콩 뛰었다.

둘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아슬한 거리감에 해인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쳐다보려 했지만 담호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해인의 얼굴을 감싼 백담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무도 안 와.”

우리가 나갈 때까지, 그 누구도.

곧바로 그 말뜻을 파악한 해인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사람이 지나치게 없더라니.

해인의 입술 위로 백담호의 입이 닿았다. 입술 사이를 톡톡 건드리는 녹녹한 혀끝에 해인은 스르르 눈을 감고 틈을 열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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