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시스템
방해인이 내게 목적을 위해 접근했다고 털어놓으며 이상한 게임을 들먹였을 때, 나는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방해인이 말하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속 안이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방해인의 이야기를 몇 번 곱씹어도 그저 기분만 꺼림칙할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나는 이 꺼림칙함이 뭔지 깨달았다. 내 머릿속에 한참이나 지나 지워져 있던 과거가 떠올랐다.
* * *
“또 지랄하네….”
백담호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살벌하게 노려보는 방해인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뭐? 지랄? 너 지금 지랄이라고 했어?”
날카롭게 외치는 목소리에 반에서 떠들던 아이들 몇 명이 익숙한 눈길을 보냈다. 방해인과 백담호가 같은 반이 된 이후로 벌써 50번도 넘게 본 있는 광경이었다.
백담호는 더 이상 답하기 싫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버렸고 방해인은 백담호의 책상 위를 짚고 벌떡 일어섰다.
“야, 씨발. 내 말 무시하는 거야. 지금?”
내가 만만해! 분에 못 이겨 지르는 소리가 꼭 개새끼가 짖는 것 같다고 백담호는 생각했다.
어, 너 존나 만만해.
방해인이 들으면 당장 달려들 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백담호는 방해인에게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벌써 얼굴이 발갛다. 하복으로 바뀐 탓에 드러난 하얀 살갗마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존나 좆밥새끼 주제에 나대는 거 같아? 찌질하게 뒤에서 욕하니까 좋냐?”
방해인은 점심시간 다 끝나 갈 무렵에 교실로 뛰쳐 들어와 다짜고짜 욕을 했다. 가만히 이유를 들어 보니 백담호가 자기 욕을 하고 다녔단다.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어이가 없었으나 이런 비슷한 일들은 자주 있었다. 하지도 않은 일들을 트집 잡아 따지고 드는 일. 백담호는 더 이상 해명도 하지 않고 방해인만 쳐다보았다. 어차피 방해인은 백담호의 말은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늘 똑같은 이 패턴이 백담호는 그저 지겨울 뿐이었다.
“개시발 좆밥새끼.”
나직하게 중얼거린 백담호의 음성을 방해인은 똑똑하게 들었다.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방해인의 눈이 크게 뜨여지는 순간 수업 시작을 알리는 학교 종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방해인은 곧바로 들어와 버리는 선생님에 더 이상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어깨만 부들부들 떨다가 앞을 획 돌아봤다. 드디어 교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 * *
백담호는 제 신발장을 무표정으로 쳐다봤다. 아침에 멀쩡하게 넣어 둔 신발이 없다. 제게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정해져 있었기에 백담호는 그대로 신발장 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내놔.”
“사과부터 해.”
눈을 위로 치켜뜬 방해인이 나타났다. 오후 쉬는 시간에는 조용하더니 이런 짓을 준비하느라 그런 거였다. 웬일인가 했더니 역시 방해인이었다.
“유치한 짓거리 그만하고 신발 내놓으라고.”
“너야말로 사과하라고.”
“뭘.”
“뒤에서 나 좆밥새끼 주제에 나대고 다닌다고 한 거.”
사뭇 진지한 방해인의 표정에 백담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실 여부는 안중에도 없고 사과를 강요하는 방해인의 태도에 백담호는 몸을 돌렸다.
“개소리하네.”
지가 뭐라고 내가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녀. 뒷말은 속으로 삼킨 채 백담호는 슬리퍼를 신고 그대로 학교를 나가 버렸다.
* * *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말소리가 들려왔다. 백담호는 슬리퍼를 벗고 거실로 들어서니 소파에 여러 명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제일 먼저 백담호를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외할머니였다.
“담호 왔구나.”
“다녀왔습니다.”
가볍게 묵례를 하니 백담호의 어머니는 대충 본체만체했고 8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이모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너 담호니? 왜 이렇게 애가 컸어!”
인물 났네, 인물 났어. 백담호의 어머니보다 7살이 어린 이모는 점잖고 다소 냉소적인 어머니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백담호는 형식적으로 웃으며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바로 방으로 가려고 했다. 백담호는 오랜 시간 본 적 없는 그녀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오랜만에 보는 데 뭐 벌써 올라가. 와서 좀 앉아 봐.”
발걸음이 멈추고 백담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움찔거렸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네.”
“세월 진짜 빠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였더라?”
“한 8년 전이었던 것 같네요.”
백담호의 말에 크게 손뼉을 치며 이모는 ‘맞아, 맞아. 얘 기억력도 좋아. 언니 닮아서 그런가 봐.’라며 환하게 대답했다. 백담호는 오랜만에 활기가 도는 집안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조금 굳어 있던 몸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막상 밝은 분위기가 계속되자 어색하지만 불편함은 사라졌다.
“그때는 여기, 여기에 머리가 왔는데. 이제는 나보다 크네.”
“하하.”
한참 이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옆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하던 어머니가 이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뇌 과학 분야 쪽 사람 찾는다고 했니?”
“아, 응. 언니. 그쪽도 그렇고 신경, 호르몬, 심리 등등 좀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서.”
이모는 백담호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연구소에서 사람 관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이모와 그에 후원하고 있는 어머니의 대화에 담호는 낄 수 없었다.
“지금 기본적인 시스템 프로그래밍은 된 상태이긴 한데 아무래도 사람 감정이 워낙 복잡해서 말이지. 조금 더 전문가가 있으면 좋을 거 같아. 싫어하는 동시에도 좋아하기도 하는 그런 애증 같은 감정은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하더라고. 게다가 원인을 분석하고 관계 회복에 코칭이나 조언도 아직 미숙하기도 하고. 아, 그런데 문제는 그것보단 실험 지원자가 너무 적다는 거야.”
백담호는 허공을 보는 척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모가 정확히 무슨 연구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처음 듣기도 하고 ‘사람 감정’, ‘관계 회복’과 같은 이야기에 백담호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쏠렸다. 그에게도 몇 년째 풀지 못한 나쁜 관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백담호의 머릿속에 딱 한 명이 떠올랐다. 말할 것도 없이 방해인이었다.
‘싫어하는 동시에 좋아하기도 하는 감정’
아니다. 방해인은 자신을 미치도록 싫어하면 싫어했지, 절대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백담호가 조금 궁금한 건, ‘관계 회복 코칭이나 조언’이었다.
집안끼리도 아는 사이고 그래도 나름 젖먹이 때부터 알던 사이인데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빠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다고 백담호도 방해인과 친해지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보단 앞으로도 마주치고 엮일 일 많을 텐데 그때마다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만 해도 억지를 부리는 방해인을 무시하느라 힘들었다.
이따 슬쩍 이모한테 물어볼까. 백담호가 혼자 생각하는 사이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할머니가 그의 팔뚝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담호야, 마당에 범철이 있을 텐데 가서 이제 데리고 들어와 줄 수 있겠니?”
범철이는 할머니가 오랫동안 키웠던 노견이었다. 범철이는 분명 따스한 햇빛 아래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게 분명했지만 백담호는 알았다. 할머니가 대화 상대를 잃고 멀뚱히 혼자 있는 자신에게 탈출구를 내준 거라는 걸. 백담호는 나긋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네, 할머니.”
“그래, 고맙구나.”
“저는 그럼 가 볼게요.”
백담호가 일어서자 어머니와 한창 진지한 낯으로 대화하던 이모는 이따 저녁에 보자며 짧게 대꾸하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백담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 방으로 올라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나무 그늘 아래 하얀색 긴 털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범철아.”
대걸레처럼 털이 수북한 큰 개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범철이는 품종은 없지만, 삽살개 같기도 하고, 레트리버 같기도 한 매력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잔디 위에서 하얀 꼬리가 살살 흔들리고 있었다.
백담호는 범철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대신 그 옆에 앉아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범철이는 엎드려서 기어가 백담호의 허벅지 위에 제 얼굴을 턱, 내려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 * *
백담호는 페이지 위를 펜 끝으로 몇 번 두드리다 책상 구석에 놓여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새벽 3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 학원도 안 가고 바로 집에 왔건만 이상하게 백담호는 평소보다 더 피곤하다고 느껴졌다.
계속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 걸까. 다른 때 같았으면 따로 먹었을 저녁 식사 자리에 이모와 함께 온 가족이 같이 밥을 먹었다. 그 탓에 백담호의 신경은 계속 곤두서 있었다. 어쩌면 이모보다도 더 불편한 부모님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온 기력을 다 소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일까.
졸음 가득 묻어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손으로 몇 번 비비적거린 백담호는 결국 잠시 물이라도 먹을 겸 일어섰다. 이층에도 따로 정수기가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잠에 깨기 위해 백담호는 1층으로 내려갔다. 냉장고에 주전자에 우려진 차를 따라 마시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고요하고 어두운 1층 거실을 백담호는 멍하니 쳐다봤다. 소파 위에서는 범철이가 자고 있었다. 백담호가 다가가 몇 번 쓰다듬으니 깊이 잠든 건지 별 반응이 없었다.
이제 다시 올라가 서둘러 오늘 목표를 다 끝내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백담호가 몸을 일으키려다 멈추어서 한 곳을 응시했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는 손님 방의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흐릿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모가 당분간 손님 방에 머무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이모는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고 있는 걸까.
‘지금 기본적인 시스템 프로그래밍은 된 상태이긴….’
개발 중이라던 프로그램 작업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백담호였지만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백담호는 몇 번 주춤거리다가 결국 문 앞으로 다가서서 가볍게 노크를 두 번 했다.
똑똑, 울리는 나무 소리가 정적한 공간에서 유독 도드라지게 느껴졌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모.”
중얼거리듯 부르며 백담호는 문을 슬쩍 열었다. 그러자 이모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추욱 늘어트린 채 미동도 없이 있었다. 순간 당황한 백담호가 빠르게 걸어가 자세히 보니 깊게 잠든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그제야 안심한 백담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Graph of relationships and specific emotional figures - AI Program Development Department, OOOOO University Research Institute]
[You-jeong Kim]
[Hyeon-jung Kim]
[Chun-ha Park]
[Hyun-a Ji]
….
“관계 및 특정 감정적 수치 그래프…?”
화면에는 스무 명 남짓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백담호는 의자가 책상에서 한참 뒤로 빠져 있는 이모를 한번 흘겨보고 마우스를 잡았다. 남의 노트북을 멋대로 만지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을 참을 길이 없었다. 제일 위에 있는 이름을 클릭했다.
[You-jung Kim‘s personal relationship]
[Hyeon-jung Kim : like 67 / Disappointed 11 / love 10 / hate 1 -> Total Emotional: 89/400]
[Jong-won Kim : like 11 / hate 33 / resentment 54 / disgust 10 -> Total Emotional : 108/400]
….
천천히 내려보니 김유정이란 사람의 주변 인물과 김유정이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수치로 보여 준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되나?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 아닌가? 타인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명확하게 나타내 줄 수 있다니, 백담호는 최근래 가장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다는 게 몸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의 심리까지 알려 주는 프로그램도 나올 것 같았다. 생각보다 상세한 목록에 백담호는 얼굴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김유정 씨가 김종원 씨를 싫어하고 김현정 씨는 좋아하고 있고 최수철 씨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후에 실생활에 적용되면 확실히 인간관계에 있어 도움이 될 것 같긴 했지만 동시에 비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원치 않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생길 것 같아 장단점이 너무 뚜렷한 프로그램 같았다.
백담호는 몇 번 둘러보다가 남의 은밀한 사생활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끄려던 찰나였다. 창 맨 아래 ’+’ 표시와 함께 ‘Add New Person’이 눈에 들어왔다. 백담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마우스 커서가 ‘+’의 표시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백담호는 방해인의 감정 따위 궁금하지 않은 동시에 극심하게 궁금했다. 정말 그 오랜 시간 동안을 봤는데 싫어하는 감정만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왜 하필 이 순간 방해인이 떠오르는 거지. 방해인의 감정을 절대 알고 싶은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기회가 생기니 솔직히 궁금해졌다. 대체 나한테 무슨 감정을 느끼길래 그렇게까지 싫어하고 시비를 거는 건지.
향할 곳은 이미 거의 정해져 있음에도 마우스 커서는 몇 번이고 빈 화면을 배회하다 끝내 아래로 내려갔다.
딸칵, ‘+’ 버튼을 누르자 창이 떠올랐다.
[new character]
First name :
Last name:
Birth date:
Nationality :
Sex :
Social security number :
우습게도 백담호는 저 모든 문항을 바로 적을 수 있었다. 주민등록번호는….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 방해인의 여권을 어쩌다가 번번이 보게 되어 저절로 외워 버리고 말았다.
문항의 답을 하나하나 채워 나갈 때마다 백담호는 어쩐지 자괴감이 들었지만, 끝까지 정보를 입력했다. 전부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자 로딩 창이 떠올랐다. 칸으로 되어 있는 막대그래프가 점점 파랗게 채워지는 걸 보면서 백담호는 스스로 기대하는 것을 깨닫고 기분이 나빠졌다.
곧이어 로딩창이 사라지고 글자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Heain Bang’s personal relationship]
[Gahyeon Kim : hate 33 / interst 2 / annoyance 23 / bothers 44 -> Total Emotional: 102/400]
[Nayoung Kim : like 3 / annoyance 11 / bothers 1 -> Total Emotional : 14/400]
….
겨우 개인 정보 조금 쳤다고 순식간에 나오는 사람들 목록에 백담호는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몇몇 이름은 백담호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라 이 목록들이 정말 방해인의 주변 사람들을 보여 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이모는 무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건지. 사생활 침해 아닌가. 아니, 애초에 이런 간단한 정보만으로 사람의 감정을 수치화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백담호는 목록들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hate’가 있는 게 방해인다워 백담호는 그만 황당하게 웃고 말았다. 겉과 속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녀석이었다. 주르륵 내리다 한 이름에서 멈춰 섰다. 당연히도 자신의 이름이었다.
[Damho Baek : hatred 78 / attraction 20 / jealousy 99 / yearning 59 / obsession 21 -> Total Emotional : 277/500]
다른 사람들 보다 목록이 많고 숫자가 큰 게 확실하게 눈에 보였다. 다만 처음부터 ‘hate’도 아니고 ‘hatered’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백담호는 입안이 조금 씁쓸했다. 하지만 이내 백담호는 한 단어 시선이 꽂혔다.
“Attraction…?”
백담호가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성적으로 끌림, 매력이라는 의미였다. 백담호는 순간 제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다시 봐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Like도 아니고 attraction이라고. 어쩐지 불쾌하면서 묘했다.
게다가 yerning은 동경, obesession은 집착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감정의 단어들에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감각이 들었다. 백담호는 왠지 더 이상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른쪽 위에 있는 ‘Delete date’를 클릭하려던 순간이었다.
“뭐 하고 있니.”
백담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이…모.”
백담호가 뒤를 돌아보다 그만 자기도 모르게 말을 절었다. 어둠 속에서 봐서 그런가 이모의 표정이 서늘하게 보였다. 긴장감에 백담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담호, 그렇게 안 봤는데 남의 컴퓨터 함부로 만지면 돼요, 안 돼요.”
“아…. 죄송합니다.”
드르륵, 이모가 의자를 끌며 컴퓨터 책상으로 가까워졌고 백담호는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물렸다. 짧은 새에 굳은 것처럼 보였던 이모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그래, 다음부턴 그러지 마.”
백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모는 “됐어, 얘. 그렇게 안 쫄아도 돼.”라고 장난스레 말하며 백담호의 허리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이제 나가 봐. 난 마저 할 거 해야겠다.”
“네. 그런데 제가 제 친구 저거 추가해….”
“아, 그건 이모가 알아서 잘 삭제할게.”
백담호는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느껴졌지만, 방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 * *
“담호야?”
한창 자신이 시스템으로 인해 겪은 것들을 털어놓던 해인이 갑자기 넋이 나간 것 같은 백담호의 얼굴에 그를 한번 불렀다. 백담호는 해인의 이야기를 듣던 중 갑자기 불현듯 떠오른 과거에 표정이 사뭇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모가 하고 있던 연구는 대체 뭐였을까.
“표정이 왜 그래…?”
해인은 자신의 말에 백담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얼굴에는 고스란히 불안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해 줘서 고마워, 해인아.”
백담호는 묽은 미소를 그리며 해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 앞에 선 백담호는 혼란스러운 낯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해인의 말을 곱씹었다.
‘공략 인물로 등록하면 상대방이 나한테 느끼는 감정들이 수치로 막 나왔어.’
‘공략 실패해서 기억도 지워지고….’
감정들이 수치로 나왔다. 그동안 완전히 잊고 지냈던 기억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해인이 말하는 것과 이모의 노트북에 있던 자료들이 기이할 정도로 일치하는 것 같았다. 예전의 그날 이모는 방해인의 정보를 지운 게 맞을까.
백담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주머니에 있는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 목록에 있는 ‘작은 이모’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이 해외로 나간 후로 이모를 본 적이 없었고, 원래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기에 답지 않게 긴장이 됐다.
하지만 신호음은 들리지도 않고 바로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전화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 * *
방학 시작과 함께 백담호는 곧바로 실습을 위해 실험 방에 나오기 시작했다. 실험복을 입고 앉아 있는 백담호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그의 시선은 휴대폰 액정에 꽂힌 채 떨어질 줄 몰랐다. 백담호의 눈이 드디어 자리를 옮긴 건 뒤에서 나타난 실험실 조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였다.
“뭘 그렇게 멍 때려. 얼마나 남았어. 그거 3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거 알지? 이제 30분밖에 안 남았다.”
“네, 거의 다 해 갑니다.”
방금까지 휴대폰에 집중한 게 무색할 만큼 백담호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대답했다. 어떻게든 그의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던 조교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그래, 그럼. 정신 차려라.”라고 말하고는 떠나갔다.
백담호는 걸어 뒀던 피펫을 다시 들고 일단 빠르게 시료를 옮겨 담았다. 마지막 단계가 끝나고 백담호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나타난 화면은 인터넷 검색 결과 창이었다. 검색란에는 ‘사람 호감도를 이용한 가상 현실 게임’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백담호가 어렵사리 그나마 편한 아버지에게 슬쩍 작은 이모에 대해 물었지만 아버지도 모른다는 짤막한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도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두절되어 알 수 없다고 했다. 원래부터 제멋대로인 성향이 큰 작은이모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씩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멀쩡히 나타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아무도 그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해인의 말로는 그 이상한 게임은 사라졌다고는 하나 백담호는 제 속에 걸리는 과거의 일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이모에게 그날 방해인의 정보를 지웠다는 확답을 들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하….”
그러나 이모의 바뀐 연락처도 알 수 없고 관련 정보는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백담호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호감, 감정, 인간관계 코칭 등과 같은 말들을 쳤지만 쓸데없는 커뮤니티 게시글들만 나올 뿐이었다.
뭐라고 쳐야 나올까. 그래도 연구했던 거면 어디에 논문이라든가, 프로젝터 명 같은 거라도 나와야 할 텐데.
백담호는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눈총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실험 도구를 정리하는 척을 하던 찰나였다.
‘Graph of relationships and… figures - AI Program Development Department, OOOOO University….’
백담호의 손이 멈췄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이모의 모니터 화면에 크게 적혀 있던 문구가 대략 떠올랐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느릿하던 정리를 순식간에 끝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백담호는 실험 방을 나와 비어 있는 세미나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바로 기억난 영어 단어들을 치니 그간 찾았던 게 무색할 만큼 제일 상단에 백담호가 찾는 결과가 나왔다. 바로 연구소 사이트와 프로젝트명이었다.
[Emotion Analysis and Graft Projector Results for AI Systems]
[Researchers : Hyeona Myoung, Robert Lee, Jose Davis, Gray Miller, Chanhyuk Soo, Rosy Brown]
[Started : 21.MAY.2016 ~]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는 2019년 7월 이후로 올라오지 않았고 사이트 역시 오랜 시간 됐는지 오류와 로딩 시간이 무척 길었다. 마지막 결과 보고서에는 ‘Stop.’이라는 간결한 단어만 적혀 있었다. 왜 갑자기 프로그램 개발을 멈췄는지에 대한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백담호는 연구소 사이트를 여기저기 보다가 연구진의 이름에 초점을 뒀다. 명현아는 작은 이모의 이름이었고 ‘수찬혁’, 한국인임이 분명했다. 결과 보고서에 수찬혁의 이메일로 추정되는 주소를 백담호가 복사했다. 연락처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이메일 주소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백담호는 망설임 없이 이메일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참 전에 중단된 연구이기에 이메일 주소가 유효할지, 답이 올지는 미지수였지만, 일단 보내 보기로 했다.
* * *
이메일을 보낸 지 1일째, 메일함만 50번도 넘게 왔다 갔다 했지만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 * *
이메일을 보낸 지 3일째, 수찬혁이라는 사람은 메일을 여전히 읽지도 않았다.
* * *
“뭐, 어디 연락 올 데 있어? 맨날 휴대폰만 봐.”
백담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해인이 의아하게 올려다봤다. TV에서는 예전에 한창 흥행했던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요 며칠 백담호가 계속 휴대폰을 손에 꽉 쥐고 살고 있었다. 지금도 평소라면 영화를 보거나 해인에게 장난을 치거나 키스를 하거나 할 텐데 휴대폰만 쥐고 앉아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드디어 해인을 향했다. 해인은 조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백담호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해인의 볼을 톡톡 건드리다 툭 튀어나온 해인의 입술에 양 볼을 잡고 가볍게 여러 번 쪽쪽거렸다.
“내가 계속 핸드폰만 봐서 서운했어?”
장난스런 물음에 해인은 조금 부끄러운 듯 “딱히, 그런 건 아니고….”라고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표정에서 다 티가 나고 있었다. 백담호는 그런 해인을 귀엽다는 듯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인아.”
“응?”
“전에 말한 그 이상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백담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파 옆에 놔둔 백담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벨 소리를 끄려 손을 뻗었던 백담호는 멈칫하고 말았다.
[00601XXXXXXX]
국제 전화였다.
“해인아,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해인의 몸을 다급하지만,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내려놓은 백담호는 그대로 넋이 살짝 나간 채 일어서서 침실로 들어갔다. 해인은 갑작스러운 백담호의 이상한 반응에 떨떠름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 화장실 안까지 들어간 백담호는 전화가 끊기기라도 할까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
- …….
상대도, 백담호도 그 누구도 먼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긴장감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길 잠시,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백담호 씨 전화 맞습니까.
조금 가느다란 남자의 목소리였다. 백담호는 경계심에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네. 맞습니다.”
- 보내 주신 메일 확인했습니다. 수찬혁입니다.
역시나, 작은 이모와 함께 연구한 사람이 맞았다. 이렇게 연락이 와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백담호는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백담호는 보낸 메일에 자신의 번호를 적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담호는 과거의 그 날, 방해인의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나서 주르륵 방해인의 주변 인물들이 자동으로 나오는 걸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개인사에 무언가가 침범하는 불쾌한 기분.
“…일단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화가 올 줄은 몰랐지만요.”
백담호의 말투에는 보이지 않는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수찬혁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건지, 못한 척을 하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 연락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많아서 메일 확인이 늦었네요.
“…네.”
- 백담호 씨도 저와 길게 통화하고 싶으시진 않으시겠죠. 빠르고 간결하게 끝냅시다. 일단, 저희 쪽 불찰로 백담호 씨의 지인분께서 겪으신 일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깊이 사과드립니다. 팀장님께서 미처 데이터를 삭제하지 않으시고 넘기신 것 같더군요.
“팀장님이면 명현아 씨 말하는 겁니까.”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 그것까진 알 필요 없으십니다.
백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 우선 방해인 씨의 일은 저희 쪽에서 제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 겪지 않도록 완벽히 데이터를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백담호 씨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죠.”
- 일단, 방해인 씨께서 AI…. 아니, 시스템에게 겪은 그동안의 일들을 아는 것 있으면 뭐든 간단히라도 메일로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마침 백담호는 해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그걸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완벽한 데이터 삭제를 위해서라고 하니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거면 됩니까?”
- 아니요.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저와 통화한 일부터 백담호 씨가 무엇을 알고 있든 입 밖으로 더 이상 꺼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방해인 씨도 더 이상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계속 딱딱하기만 하던 음성에 날카로움이 벼렸다.
“…다시는 그 이상한 시스템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걸 제가 어떻게 확신하죠.”
- 당신은 그 시스템이 나타나질 않길 원하고, 우리는 그것과 관련된 일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시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수찬혁의 목소리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기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백담호는 여전히 제가 들은 일들과 과거의 이모가 했던 연구,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런데….”
말끝을 조금 흐린 백담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시스템에 대해 개발….”
- 백담호 씨. 그 개발은 2019년 7월에 끝난 겁니다. 당신은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요. 그리고 혹여라도 방해인 씨에게 이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럼 메일 기다리겠습니다.
전화가 일방적으로 바로 끊겨 버렸다. 백담호는 넋이 나간 채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시간이 생각보다 한참 지난 것을 깨닫고 일단 밖으로 나섰다.
“안에서 뭐 했어?”
해인이 소파 등받이에 턱을 내려놓고 방에서 나오는 담호를 빤히 쳐다봤다. 백담호는 입술을 움찔거렸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냐.”
“•••그래?”
해인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백담호는 수찬혁과의 대화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해인에게 벌어진 일들이 자신 때문인 것 같은 죄책감에 영화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담호 씨. 그 개발은 2019년 7월에 끝난 겁니다. 당신은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요.’
대체 무슨 그들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백담호는 의문으로 가득했지만 더 이상 알아내려는 마음은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그저 해인에게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거였기에, 이따 새벽에 해인이 잠이 들거든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써서 메일만 보내면 되는 거였다. 원래라면 해인에게 다 말하고 사죄를 하는 게 맞았지만•••.
- 그리고 혹여라도 방해인 씨에게 이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권고하는 말투였지만 말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백담호는 옆에 앉아 영화에 집중하는 해인을 미안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더 이상 해인에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것밖에 없었다.
뭐가 되었든 방해인만 무사히 내 옆에 있으면 되었다.
호감도 10만 올릴게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