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유품
‘집이 좀 어두운데?’
저택에 발을 들인 운현이 받은 첫인상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일충현의 집은 아주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은 곳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하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집안도 전체적으로 고색창연하기는 했으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한마디로 낡은 모습이 역력했다.
‘형님 댁의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한 모양이구나.’
운현은 가슴이 아파 왔다.
듣기로는 오래된 무관의 집안이라 했는데, 와 보니 영락없이 쇠락한 가문의 모습 그대로다.
운현이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며 씁쓸한 느낌에 잠기는데 방문이 살짝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달칵.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허연 노인과 중년의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운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아하고 소박한 느낌의 부인은 조용히 들어오더니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으세요, 공자.”
운현은 감사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소박하고 수수한, 그러나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부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께서 선부의 유품을 가져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선부(先夫)라 함은 곧 죽은 남편이라는 뜻이다.
부인의 얼굴에 그늘이 진 것은 결코 방이 어두웠기 때문은 아니리라.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천천히 짐을 풀었다.
달칵, 다그락.
봇짐에서 나온 일충현의 유품이 하나하나 탁자 위에 자리를 잡았다.
대개는 자질구레한 것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작은 책자나 옷가지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탁자위에 놓이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달칵.
마지막 물건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러나 부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운현도 무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을 쳐다보며 일충현에 대한 추억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투둑, 툭.
운현은 문득 부인을 쳐다보고는 흠칫 놀랐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저…….”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지만 할 말이 없다.
운현은 가슴이 저려 왔다.
눈물을 떨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이곳에 찾아온 자신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후 부인은 눈물을 닦고 나서 운현에게 말했다.
“손님께 흉한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아직도 젖어 있는 목소리는 그녀의 슬픔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늦은 것 같아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부인은 잠시 유품들을 바라보다가 운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실례지만 공자께서는 선부와 어찌 되시는지요?”
운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입을 열었다.
“부족하지만 그분을 형님이라 불렀습니다.”
부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운현을 자세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공자께서 운현이라 하시는 학사님이신가요?”
이번에는 운현이 놀랐다.
“제 이름을 어떻게…….”
“실은 몇 년 전, 도진이라 하시는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부인의 말에 운현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분도 같은 일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셨더군요. 그때 학사님의 이름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자신에게 검술을 보여 주었던 도진 교두를 생각하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락.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인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형수님.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운현이 예를 올리자 부인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만 앉으세요.”
운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인은 운현을 자세히 쳐다보며 말했다.
“북경이 여기서 가깝지 않은데 바쁘신 중에 먼 길을 오셨군요.”
운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은 저도 관직을 내려놓고 황궁을 나왔습니다.”
“저런.”
부인은 동정 어린 목소리로 운현에게 말했다.
“공자께서도 무척 힘드셨겠군요.”
“아닙니다. 저야…….”
그때 갑자기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콰당.
“어머니!”
들어온 사람은 젊은 아가씨였다.
그녀는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집안에 들이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운현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위협하듯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이곳은 여자들만 있는 곳이니 당장 나가도록 하세요!”
“아영아!”
단호한 부인의 말에 아영이라 불린 아가씨가 멈칫했다.
부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께서는 네 아버지의 의형제시다. 네게는 의숙부가 되시니 무례하게 굴지 말고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아가씨는 입술을 깨물고 운현과 부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인이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운현을 향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일아영이라 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운현도 일어서서 답례를 한다.
“운현이라 합니다. 갑자기 찾아와 결례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들어온 일아영이라는 아가씨는 부인을 닮아서인지 제법 예뻤다.
그리고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젊음은 그녀가 바야흐로 한창때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비록 첫인상은 너무 거침이 없어 보였지만, 그 모습이 또한 일충현을 닮은 것 같아 운현에겐 남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운현의 생각일 뿐, 일아영의 시선은 영 곱지가 않았다.
“편히 대하셔도 됩니다, 운 공자님. 아영아, 너도 여기 앉거라.”
부인은 두 사람에게 앉기를 권했다.
일아영은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은 채 어머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락.
부인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을 매만졌다.
일아영 역시 이것이 부친의 유품인 줄 짐작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회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
잠시간 유품들을 만져 보던 부인은 무언가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이것이 전부인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가 건네받은……. 아!”
그제야 무엇이 생각난 듯 운현은 목에 걸려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자그마한 반지 하나가 비단 끈에 딸려 나오고, 운현은 조심스럽게 손에 얹어 부인께 내어 보였다.
“아.”
부인이 낮게 탄식을 흘렸다.
일아영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이 반지를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반지를 내려다보던 운현이 문득 말을 이었다.
“이 반지는 형님께서 의형제의 증표로 제게 주신 것입니다.”
반지를 향해 뻗어가던 부인의 손이 멈칫했다. 일아영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운현은 고개를 들다가 두 사람의 표정에 의아한 눈빛을 했다.
“형수님?”
부인은 가만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가만히 운현을 쳐다보았다.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한참 만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죄송하지만 그 반지를 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의외의 말에 운현은 부인을 쳐다보았다.
부인은 다시 말했다.
“특별히 공자님을 믿지 못해 드리는 말씀은 아니오나…….”
“죄송합니다.”
운현의 목소리가 부인의 말을 끊었다.
조용한,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운현은 부인에게 말했다.
“이것은 제가 형님께 받은 유일한 증표입니다. 저에게는 매우 의미가 큰 것이니 죄송하지만 이것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부인은 탄식하듯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말했다.
“제가 비록 못 미더워 보이시겠지만 항상 소중히 간직할 터이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운현의 대답에 부인과 일아영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운현은 그저 유품을 마주한 슬픔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
부인의 권유로 운현은 그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소박하지만 단정하게 차린 식사를 하는 동안 부인과 일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운현은 그런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자신이 유품을 가져온 탓이려니 생각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택의 분위기였다.
‘이 큰 집에 일하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니.’
시중을 드는 사람은 처음 보았던 그 노총관뿐이었다.
이러니 일아영이 운현을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말로 형편이 어렵구나.’
운현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저며 오는 것을 느꼈다.
‘선하고 충직한 이들이 받을 보응이 이런 것뿐이란 말인가?’
저녁 식사 후, 운현은 부인의 권유에 따라 비어 있는 행랑채에 묵게 되었다.
딱히 갈 곳도 없었지만 운현도 나름 생각한 바가 있어서, 일아영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달칵.
운현이 행랑채로 떠난 뒤, 남아 있던 부인과 일아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결국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영아.”
일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은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아영아, 일단 이야기라도…….”
“필요 없어요!”
일아영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가득했다.
그녀는 화난 눈으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누구예요? 왜 저 사람이 반지를 가지고 나타난 거죠?”
“아영아,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부인이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일아영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미 이 공자가 제게 청혼을 했어요. 어머니도 승낙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저런 사람이…….”
일아영은 기가 막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부인은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영아, 나도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는 말거라. 저 사람이 너와 혼인하려고 이곳에 왔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 아니니?”
“어머니!”
일아영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럼 저 사람이 원한다면 저를 그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씀이세요?”
부인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서렸다.
아까 운현에게 반지를 줄 수 없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분명히 ‘소중히 간직하겠다’라고 말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 대답을 들을 때 부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건 마치 ‘딸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딸은 이미 악양의 이 공자에게 청혼을 받았고 자신 역시 허락한 터였다.
남편과의 신의를 생각하자면 당연히 운현에게 딸을 맡겨야겠지만, 언뜻 보기에도 그는 낙방 서생이나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이미 관직을 내려놓고 황궁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에 반해 악양의 이 공자는, 가문은 보잘것없어도 번듯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됨도 좋고 무엇보다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니,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운현을 모른 척하고 싶은 것도 또한 어미로서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영아…….”
착잡한 심정의 부인에게 일아영은 화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버지도 그래요! 가족은 몇 년이고 나 몰라라 내팽개쳐 놓고는, 이제 와서 저런 사람에게 시집을 가라고요? 저는 싫어요! 돌아가셨으면 이제 우리를 그만 놓아주실 때도 됐잖아요!”
“아영아!”
처음으로 부인이 큰 목소리를 냈다. 화를 내던 일아영은 움찔했다.
“아버지께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선 안 된다. 네 아버지는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셨어.”
부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 눈빛은 엄했다.
일아영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몸을 휙 돌리더니 방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콰당.
“아영아!”
부인이 일어서며 딸을 불렀지만 일아영은 나간 후였다.
“후우.”
털썩.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운현이라는 청년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남편이 의형제를 맺을 정도라면 분명 신뢰해도 좋은 사람이리라.
그러나 딸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딸의 말 역시 구구절절 옳다. 하지만 그러면 남편과의 약속은 또 어찌한단 말인가?
“여보…….”
부인은 남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언제나 자랑스러운 남편이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없다.
슬픔을 견디고 일어나 간신히 그가 없는 세상에 적응해 가고 있었는데, 이렇듯 갑자기 남편의 약속이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사락.
그녀는 탁자에 놓인 남편의 유품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부인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다시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