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99화 (99/530)

099화. 보은

“어서 오세요.”

이서연은 날아갈 듯 예의 바르게 부인에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운현을 발견하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 공자님.”

이서연은 방긋 웃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찌릿.

일아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운현에게 꽂혔다.

어떻게 호암상단의 사람을 아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운현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이서연에게 예를 표했다.

“아, 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인사가 어색한 건 그녀와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닌 데다, 어쩐지 휘둘릴 상대가 늘어난 것 같은 막연한 예감 탓이었다.

“허허, 이럴 게 아니라 앉아서 이야기를 할까요?”

이호암이 웃으며 권했다.

안으로 자리를 옮긴 부인과 일아영은 호암상단의 최고 어르신이라는 이호암과 그의 영애 이서연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노인, 이의신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그 설명은 이미 서찰에 적혀 있던 내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십여 년 전, 북쪽으로 먼 장삿길을 나섰던 이의신은 어느 객잔에서 화물을 노린 도적 떼들을 만나게 되었다.

표국의 표사들이 있었지만 한밤을 틈타 습격한 도적 떼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혼란 중에 어르신의 생명을 구한 분이 바로 제 선부시라고요?”

부인의 말에 이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로 보아 아마도 일충현이 북경으로 가던 때였던 듯했다.

“은공으로 말미암아 저는 생명과 화물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일충현은 이의신의 생명은 물론 그의 화물까지 지켜 주었다.

그 상행의 결과로 이의신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거두었고 오늘날의 성공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의신은 이 모든 것이 일충현의 덕분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의신이 아는 것은 일충현이라는 이름 석 자뿐이었다.

결국 이의신은 그날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평생의 후회로 곱씹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허나, 어르신.”

이의신을 설명을 듣던 부인은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부인.”

이의신이 즉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러나 부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 은혜를 베푸신 분이 제 선부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혹여 어르신의 정성이 헛되이 되고, 일평생 청렴하셨던 선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부인의 말을 들으며 운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권세와 재물을 가진 자의 극진한 호의에 이렇듯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과연 일충현 형님의 배필이라는 생각을 하며 운현은 새삼 부인을 바라보았다.

바스락.

이의신은 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중하게 부인에게 건넸다.

“이것은?”

부인의 물음에 이의신은 회한이 담긴 음성으로 대답한다.

“은공께서 제게 남기신 유일한 것입니다.”

사락.

정성스럽게 싼 비단을 풀자 고이 접어둔 낡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부인은 천천히 종이를 펴 들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부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일아영이 황급히 부인 곁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부인과 똑같이 멈춰서고 말았다.

이미 눈물이 가득한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제 선부께서 생전에 직접 지으신 글로서…….”

부인은 천천히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인에게 가까이 갔다. 비록 예의는 아니지만 자신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슥.

종이에 쓰인 것은 큰 뜻과 나라에 대한 충심을 표현한 일종의 시였다.

그 시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이름은 분명 일충현이라는 세 글자였다.

“……제게도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부인은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이의신은 즉시 바닥에 엎드리며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은공!”

머리가 허연 노인, 이의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후, 연회는 사뭇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의신은 부인께 자기 재산의 반을 드리겠다고 했으나 부인은 절대 받을 수 없다 하였고, 넓은 전답과 많은 종들이 딸린 커다란 저택 또한 마다했다.

결국 이의신이 ‘이것마저 거절하시면 피를 토하고 죽겠다’며 협박하는 바람에 간신히 낡은 집의 보수만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옆에 있던 이호암 역시 이의신을 거들었다.

그는 이의신에 대해 ‘존경하며 신뢰하는 가문의 친척’이라며 부인과 일아영에게 호의를 아끼지 않았다.

운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의신은 운현이 일충현의 의제라 함을 듣고 극진한 예를 올리며 ‘자신을 남으로 여기지 말고 형제와 같이 편히 대해 달라’고 했다.

머리가 허연 노인이 두 손까지 붙잡고 간곡히 하는 말에 운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이서연이 냉큼 달려와선 ‘이분이 제게 숙부뻘이 되시니, 공자님 또한 제게 숙부가 되신다’며 살갑게 굴었다.

결국 운현의 완강한 사양으로 그녀로부터 숙부님이라 불리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녀에게 ‘오라버니’라 불리는 것은 감수해야만 했다.

이호암이나 이의신이 ‘보기가 좋다’며 너털웃음을 흘린 것 또한 물론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일아영에게 있었다.

이호암이 일아영에게 호암상단에서 일을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일아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단숨에 그 제의를 승낙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눈은 의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

따가닥, 따가닥.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의 분위기는 갈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일아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기대로 부풀어 있었고 부인의 얼굴 또한 밝았다.

자신의 죽은 남편을 은공이라 부르며 그토록 높이는데 어느 아내가 싫어하랴?

하지만 운현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형수님과 누이의 형편이 나아진 것은 좋으나…….’

운현은 창밖으로 지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비록 형수님과 아영 소저의 기분을 상할까 하여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꾸만 자신이 이의신과 비교가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훌륭히 은혜를 갚았건만 나는 대체…….’

자신이 의형 일충현으로부터 받은 것은 결코 이의신에게 못지않다.

그러나 운현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후원을 다듬은 것뿐이다.

어찌 스스로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운현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대로 무력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선비랍시고 이것저것 가릴 이유도 없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머뭇거리고 있어선 안된다.

운현은 결심을 다졌다.

***

낡은 저택을 보수하는 일은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호암상단의 위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귀한 자재가 쌓이기 시작했고, 숙련된 일꾼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임시 시설들까지 세워지니, 적막하던 일충현의 옛집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듯 활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일아영은 벌써 집을 떠나 장사의 호암상단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간간이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해 왔는데 맡은 일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중직을 맡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물론 운과 노력이 따라야 하겠지만, 제일 기뻐 보였다.

그렇게 활기로 넘치는 집안의 모습이 운현에게는 일견 기쁘면서도 동시에 씁쓸했다.

부인은 이런 때에 운현이 있어 의지가 된다며 고마워했지만, 운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일이 잘되는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낡은 옛집의 보수가 끝났다.

“오오.”

운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낡고 오래된 저택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옛 정취는 여전히 담겨 있었지만, 그 당당한 모습은 누가 봐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부인은 새로운 저택의 모습에 매우 만족했다.

그녀는 감사의 뜻을 담아 이의신을 초청했고 일아영 역시 잠깐 틈을 내어 저택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것은 이의신뿐만 아니라 호암상단의 최고 어르신이라는 이호암과 그의 딸 이서연까지 왔다는 것이다.

“정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부인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자 흰 머리의 이호암이 웃는 얼굴로 답례를 했다.

“허허허. 아닙니다. 이렇게 기꺼이 맞아 주시니 저희야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호암과 이의신이 부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 운현은 오랜만에 보는 일아영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냈소? 아영 누이.”

‘소저’라고 부르라 한 말을 깜빡했지만 일아영은 화내지 않았다.

“네. 그동안 이곳을 지켜 줘서 고마워요.”

일아영은 의외일 정도로 편안하게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은 어딘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오라버니!”

낭랑한 목소리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이서연이었다.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서연 소저.”

그러나 이서연은 오히려 뚱한 표정을 지었다.

“소저가 뭐예요? 제가 오라버니라 불렀으니 당연히 누이라 해야지요.”

아름다운 아가씨는 토라진 모습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운현은 여자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 상대는 거대 상단의 영애다.

운현에겐 이서연이 아직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소. 서연 누이.”

이서연은 화사하게 웃었다.

“새로 단장된 집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대답은 운현 대신 부인이 했다.

“그럼요. 아영아, 너도 함께 돌아보렴.”

“네, 어머니.”

일아영도 내심 새로 바뀐 저택을 보고 싶었던지라 순순히 대답했다.

“운 공자,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새로 바뀐 집 구조를 아는 사람은 부인과 운현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운현은 이서연과 일아영, 두 명의 아가씨와 함께 저택을 거닐었다.

이서연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을 뿐이었지만 일아영은 놀라보게 바뀐 자신의 집이 신기한 듯 곳곳에서 찬탄을 터트렸다.

그런 일아영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운현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바로 예전에 후원이었던 장소였다.

“와.”

일아영이 감탄을 터트렸다.

“여기가 이렇게 좋아졌네요.”

예전의 후원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낡고 오래된 담도 바뀌었고 바닥의 돌들도 고풍스러우면서도 멋스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서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누가 담당했죠?”

웃는 낯이었지만 그녀의 서늘한 기운을 운현이 모를 리 없다.

“왜 그러십니까? 서연…… 누이.”

이서연이 누이라 불러 달라 한 것 때문에 앞뒤가 어색한 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서연은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후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후원은 분명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지만 꽃나무의 배치나 전체적인 조경이 예전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서연의 눈에는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감히 호암상단의 이름으로 하는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그 태만함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여기는 그냥 놔뒀네요?”

일아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 바뀌었는데 조경이 예전 그대로라 어색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아, 그게…….”

운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본래 일꾼들은 여길 전부 새롭게 고치려 했소. 하지만 형수님께서 이곳은 형님의 추억이 있는 곳이니 그냥 놓아두라 하시더군. 그래서 내가 다듬은 꽃나무들이 그대로 남는 바람에…….”

그래서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마치 일을 하다가 만 것처럼 말이다.

그 말에 이서연의 눈빛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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