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외로운 늑대
“뭐라고요?”
당설련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성의 후계자 정도 되는 고수가 경공을 못한다니?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심각했다.
“하!”
당설련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운현이 아니라 영호준에게.
“당신의 서기님은 정말 여러 가지 하시는군요. 난 이런 유치한 장난에 끼고 싶지 않으니 당신이 알아서 해요. 어차피 당신이 책임자니까.”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 낸 당설련은 그대로 발을 굴렀다.
탁. 파라락.
당설련은 유려한 몸짓으로 숲속으로 사라졌다.
말로만 듣던 고수들의 경공을 본 운현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설련이 사라지자 영호준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운현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건 일개 서기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화산의 대표자인 영호준은 물론이고 당문의 당설련도 운현에겐 일방적으로 명을 내리거나 하지 않았다.
모용미가 그 일에 대해 의아해 하는데 운현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혹시 누군가 도와주신다면…….”
미안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운현을 향해 영호준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그럼 누군가 운 서기님을 안고 가야 한다는 뜻인데.”
문득 영호준은 모용미를 돌아보았다.
“저보다는 아무래도 아름다운 아가씨의 품이 낫겠지요?”
생각에 잠겨 있던 모용미는 깜짝 놀랐다.
영호준은 멋진 귀공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모용미는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운현을 돌아보던 모용미는 운현과 눈이 마주쳤다.
‘아.’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운현 역시 얼굴이 확 달아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가 모시지요.”
두 사람을 곤경에서 구해 준 사람은 모용진이었다.
그가 나서자 영호준도 더 이상 짓궂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럼 맡기도록 하지요.”
말을 끝내자마자 영호준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타닥, 후웅.
영호준이 몸을 날리자 바람이 일었다.
놀랍게도 영호준은 허공을 훌쩍 뛰어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조금 전 보았던 당설련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저벅.
운현이 무어라 채 대답하기 전에 모용진은 운현을 감싸 안고 발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운현의 몸은 마치 새라도 된 듯 공중으로 솟구쳤다.
후욱.
모용진이 운현과 함께 숲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모용미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마도 자신의 실력을 숨기는 것일 터이다.
서기가 갑자기 경공을 펼치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운현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모용미는 살짝 고개를 젓고는 발을 굴렀다.
타악.
유연한 몸짓으로 모용미는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상기된 그녀의 뺨을 스치고, 어둠이 깔린 울창한 숲이 그녀 앞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제법 험한 산이네.’
생각보다 숲은 깊고 산세는 험하다.
그러나 험한 것은 산세만이 아니다.
이곳에 모여든 이들은 더욱 험할 것이다.
‘충돌은 피할 수 없겠지.’
고독객 독고랑을 쫓는 사람들은 많다.
그중에는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파라락.
모용미의 시야에 앞서가는 모용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모용진의 한 팔에 안긴 운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바둥거리고 있었다.
마치 갑자기 안아 든 작은 동물의 반응처럼 말이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 건 모용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팟.
모용미는 내력을 운용하여 경공에 집중했다.
곧이어 매화검 영호준의 뒷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설련 소저는 어디 있지?’
먼저 출발했으니 아무래도 거리가 떨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흩어져선 안 된다는 것을 당설련도 알 테니 말이다.
“당설련 소저는 어디 있지요?”
파라락.
경공을 펼치며 모용미가 오라버니 모용진에게 물었다.
“글쎄다? 나도 아직 못 보았다.”
“떠난 듯하오.”
대답은 앞서가던 영호준에게서 나왔다.
탁.
영호준이 가벼운 몸짓으로 땅에 내려섰다.
운현을 안은 모용진도, 모용미도 영호준 옆에 멈춰 섰다.
“떠났다고요?”
모용미가 물었지만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무래도 당문의 눈꽃께선 다른 용건이 있으셨던 것 같군.”
“다른 용건이라니요?”
같은 조사단의 영호준조차 모르는 볼일이라니?
모용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호준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내가 그녀의 마음을 어찌 알겠소?”
모용진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가 봐야지요.”
그렇게 말한 영호준은 숲속을 바라보며 대강의 위치를 가늠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갑시다. 주위를 살펴야 하니까.”
그 말에 운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 갈까요?”
영호준은 그렇게 말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모용진과 운현, 그리고 모용미가 영호준을 따라 발을 옮겼다.
어두운 산속, 푸른 달빛이 세 사람의 등 뒤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
당문설화 당설련은 철정산의 한 계곡에 서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밤의 계곡에는 지나는 바람만이 이따금씩 나뭇가지를 흔들 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 조용한 계곡 속에서 당설련은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련아야.”
중후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전혀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당설련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환한 미소가 당설련의 얼굴 가득 떠올랐다.
“할아버지!”
푸른 달빛 아래 누군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곡의 풀과 나무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푸스스.
울창한 수풀도 커다란 나무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주변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말라 죽어 갔다.
하지만 그가 발을 옮겨 지나가면 말랐던 풀과 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르름을 회복했다.
마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선인처럼,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모든 것이 죽어 가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허허, 그사이 내 손녀 연아가 더욱 예뻐졌구나.”
노인은 마치 철정산의 신령인 양 신비롭고 자애스러운 모습이었다.
“약선 할아버지!”
팍.
당설련은 서슴없이 노인, 약선의 품에 안겼다.
“허어, 이런. 다 큰 처녀가 이게 무슨 짓인고?”
짐짓 엄한 목소리로 약선이 말했다.
그러나 주름진 손으로 당설련의 머리를 쓰다듬는 약선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래, 그는 데리고 왔느냐?”
약선의 말에 당설련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이 산에 있어요.”
약선은 당설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숨길 수 없는 강렬한 기세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너는 내게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다.”
약선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유난히 자주 말하던 매화검 때도 정작 내게 무언가를 요청하진 않았지.”
“하, 할아버지!”
당설련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약선의 말을 막지는 못했다.
“너는 그가 검성의 후계자라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약선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검학은 제자나 후계자를 둘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러나.”
당설련의 말을 끊은 약선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검학이나 불영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 염중부가 그를 찾아갔음에도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섰다는 것도. 그러니 나 또한 어찌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말에 당설련의 표정이 환해졌다.
약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네 말대로 해 주마.”
“고마워요, 할아버지.”
당설련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될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약선을 움직일 수 있음을 확인한 의미는 매우 컸다.
그러므로 당설련의 감사와 기쁨은 진심이었다.
사랑스러운 손녀를 바라보는 약선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쉬익.
“커헉!”
칼날이 푸른 궤적을 그리자 한 줄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둠 속으로 비릿한 피비린내가 번져 갔지만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은 누구냐?”
홀로 선 사내가 거칠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바로 고독객 독고랑이었다.
대충 묶은 긴 머리카락과 더럽혀진 얼굴, 그리고 피에 물든 옷자락이 오랫동안 쫓겨 다닌 그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아직도 날카롭고 그의 칼날은 여전히 시퍼렇게 빛난다.
게다가 발밑에 흐르는 붉은 피와 섬뜩한 그의 기세는 상처 입은 짐승, 혹은 광기에 물든 괴인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 기세 탓일까?
지금 그를 둘러싼 이들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감히 고독객에게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훗.”
고독객 독고랑이 피식 웃었다.
“겁을 먹었나?”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자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사실상 모두가 적이자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고독객 독고랑이 표적이 된 것은 그가 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절세의 비급.
칼을 쥔 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비록 헛소문이라 해도 그렇거늘 무림맹에서 작정하고 조사를 할 정도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사람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역시 개새끼들은 그저 짖는 것밖에 못 하는군.”
그런 그들을 고독객이 비웃었다.
“네 이노옴!”
쿵.
육중한 울림과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네가 우리를 능멸하느냐?”
굵은 창 자루로 땅을 내려찍은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지금껏 저지른 죄가 너무나 악독하니, 우리 산동삼웅이 너를 심판해 주마!”
마치 대협인 양 의연한 기세였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붕, 부웅.
자그마한 은빛 유성추를 돌리는 사내와 커다란 도를 든 우람한 체격의 무인이 고독객의 좌우에 나타났다.
그들은 포위하듯 고독객을 둘러싸고 있었다.
“산동삼웅?”
“그렇다! 우리는…….”
“말할 필요는 없다.”
산동삼웅의 말을 끊은 고독객은 조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질 명호일 테니까.”
“이놈! 네가 감히…….”
산동삼웅을 자처한 사내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이어지지 못했다.
고독객이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윽.’
산동삼웅의 첫째는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살기였다.
상처 입은 짐승의 그것이자, 칼을 든 무인의 본성이기도 한 그것.
섬뜩한 살기가 고독객의 눈동자에서 시퍼렇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와라.”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빛내며 고독객이 말했다.
“죽여 주마.”
섬뜩한 목소리를 뱉어내는 고독객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분명 미소였다.
산동삼웅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슥.
산동삼웅은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붕, 부웅.
은빛 유성추의 소리가 커지고, 커다란 도가 시퍼런 칼날을 번득였다.
거대한 창날 또한 고독객 독고랑을 향해 그 끝을 빛냈다.
“네놈의 비급은.”
산동삼웅의 첫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가 가져가마.”
어둠에 숨어 있는 이들의 눈동자에 탐욕이 스쳤다.
산동삼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독객 독고랑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