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깊은 물은 소리가 없다
남궁비연이 사과한 사형의 일은 바로 남궁상혁이다.
그가 운현에게 ‘남궁세가의 땅을 밟는 날이 네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던 일을 어찌 잊으랴?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았다.
그 후 남궁상혁은 운현에게 쓸데없는 수모를 주려다 남궁현에게 이미 뺨까지 맞았으니까.
아마도 남궁비연은 그 일을 모르는 듯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
남궁비연은 감사를 표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연회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매만졌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군요.”
운현도 연회장을 향해 눈을 돌렸다.
오색 등불이 불을 밝힌 화려한 전각, 온갖 요리와 향기로운 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연회장은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예전엔 저도 저 한가운데 있었지요.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닌데…….”
남궁비연은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는 서기님 말고는 아무도 말조차 걸지 않는 신세가 되어 버렸군요.”
그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운현에게는 사뭇 처연해 보였다.
분명 남의 일인데도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건, 아마도 자신 역시 똑같은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저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운현이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 줄 알았는데 다음 순간 형편없이 추락해 버린 자신을 발견한 때가요. 아니, 사실은 올라간 적조차도 없다는 것을요.”
남궁비연의 시선을 운현은 느꼈다.
그러나 운현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죠.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저는 진정한 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남궁비연의 눈동자를 보며,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소저께도 좋은 일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러니 슬프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슬프지는 않아요. 그저 잠깐 감상에 잠겼을 뿐이니까요.”
남궁비연은 운현의 생각보다 더 당찬 아가씨였다.
그녀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절 위로해 주신 건 고마워요. 학사님의 이야기를 해 주신 것도요.”
운현은 조금 겸연쩍으면서도 흐뭇했다.
역시나 남궁비연은 운현의 생각대로 대단한 아가씨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제갈세가에 찾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시지요?”
“초대받지 못했어요.”
남궁비연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제가 여기 온 것도 의외예요. 친족들의 연회에는, 본래 외부인은 거의 들이지 않거든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이 자리는 기회다.
남궁비연은 결의를 다지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모습이 운현에겐 어쩐지 흐뭇하게 보였다.
본래 남궁비연이 매력적인 아가씨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가주께서 드십니다.”
묵직한 목소리에 연회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연회장을 가로질러 몇 사람이 들어오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했다.
저벅, 저벅.
‘저 사람이 가주로구나.’
운현은 제갈세가의 가주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사람들의 인사에 미소로 답하며 들어오고 있는 한 사람.
마치 노학자 같은 모습이지만 숨길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은 그가 바로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고맙소.”
상석에 선 제갈명이 말했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분과, 무림맹 서기께서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셨소. 감사를 드리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운현과 남궁비연에게 향했다.
운현과 남궁비연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가주의 인사에 답했다.
독고랑을 말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지만, 아마도 실수이거나 전달이 되지 않았으리라고 운현은 나름 짐작했다.
제갈세가 사람들도 의아한 듯 독고랑을 쳐다보는데 곧 가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 시작하지요.”
가주 제갈명이 자리에 앉고,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또 있었어?’
운현은 혀를 내둘렀다.
이미 차려져 있던 음식은 비교도 되지 않는 산해진미들이 줄을 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황궁에서도 생각 못 하던, 사실 황궁의 연회를 잘 모르기도 하지만, 엄청난 호사에 운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남궁비연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담담한 표정으로 연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하.”
“호호.”
연회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는 필연적으로 강호 무림의 정세에 대한 것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누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일개 수적들에게 패해 봉문하다니, 한때 사대세가라 불리던 가문이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랍니까?”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남궁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옳습니다.”
다른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뇌검의 무공이 하늘을 찌른다 하더니 다 뜬소문이었습니다.”
“아마 남궁가의 하늘은 꽤나 낮았던 모양이지요.”
웃음 섞인 어조로 누군가 말을 받았다.
“개나 소나 다 찌를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하하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그건 경쟁자의 몰락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 남궁비연의 표정은 굳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도 남궁가의 분이 계시군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운현은 가슴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염려하던 말이 그 뒤를 이었다.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조롱과 비웃음의 눈길들이 남궁비연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달칵.
남궁비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남궁세가의 남궁비연입니다.”
‘세가’라는 말에 몇 사람이 노골적으로 웃는다.
남궁비연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의 말씀처럼 남궁세가가 오늘의 치욕을 당한 것은 힘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러나 남궁세가는 아직 봉문한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남궁비연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도 결코 그녀의 결의를 꺾지는 못했다.
아니, 남궁세가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또한 암천무제의 무위는 결코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에요. 사대세가가 힘을 모아 대처하지 않으면 앞으로 반드시 큰 위협이…….”
“흥!”
그러나 남궁비연의 결의에 찬 목소리는 누군가의 코웃음으로 끊어져 버렸다.
“그래 봤자 결국 수적 떼의 수괴 아닌가? 자신들의 무능함을 그런 식으로 가리려 해 봤자 소용없다.”
남궁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과만으로 남궁세가를 무능하다 치부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고 듣자하니 정문에서 문지기와 다투었다던데, 아랫것들과 싸움이나 하고 그러면 되겠나? 아무리 몰락했어도 자존심은 지킬 줄 알아야지, 쯧쯧.”
“하하하하.”
“후후후.”
비웃음과 조롱이 번져 갔다.
그 수모를 홀로 감내하고 있는 남궁비연은 그저 이를 악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수모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 뻔뻔하게 들어선 것만 봐도…….”
“그만하시지요.”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 역시 대인의 예가 아니니.”
고개를 똑바로 든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건 무림맹 서기나 사절단 부사라는 신분을 믿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이 일에 끼어들 자격이 있기 때문에 한 말도 아니었다.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는 것에는 어떠한 신분도, 자격도 필요없다.
그러나 몇 사람에게는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운현의 자리가 상석이 아님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이미 가주가 소개를 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무림맹 서기 운현입니다.”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피식 하는 헛웃음 소리들이 뒤를 이었다.
“서기? 서기 따위가 감히 어디서!”
그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무림맹이라 해도 서기다.
어디서 감히 제갈세가의 행사에 참견을 한단 말인가?
비웃음은 금방 분노로 변해 갔다.
그러나 운현은 개의치 않았다.
“본디 깊은 물은 소리가 없는 법입니다. 상대의 신분이 낮다 하여 무시하고, 형편이 좋지 않다 하여 조롱한다면 스스로 얄팍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통렬한 책망이었다.
그 말에 결국 누군가 화를 터트렸다.
덜컹.
“이놈이 어디서 감히!”
제갈세가의 청년이 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위협이 아니라는 듯 그의 손은 이미 허리에 있는 검에 가 닿아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옆을 지키고 있는 독고랑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누가 상대라도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의 검에 대한 자신감 때문도 아니었다.
예전 용봉지회에서 그러했듯, 옳고 그름을 배운 문사의 깐깐한 고집이 이 순간 운현의 안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앉아라.”
막 검을 뽑으려던 청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다름아닌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었기 때문이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군자검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의 말이 옳다. 모두 그만하도록 해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가주의 한마디는 곧 모든 일의 최종 판결이나 마찬가지였다.
“으음.”
검을 빼려던 청년은 신음을 흘렸지만 곧 손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독고랑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그 청년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독고랑에게 자제를 부탁한 운현의 말이 없었다면 지금쯤 독고랑의 살기에 진땀을 흘렸으리란 것도 말이다.
달칵.
가주가 술잔을 들었다.
운현이나 혹은 청년에게 한마디 더 할 법한데도, 가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술을 음미했다.
눈치를 살피던 제갈세가 사람들은 다시 연회를 이어갔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그 대부분은 운현과 남궁세가에 대한 것이리라.
사락.
서 있던 남궁비연이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속삭이듯 그녀가 말했다.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운현 역시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남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려울 때 누군가의 도움이란 건, 정말로 소중한 것이네요.”
운현을 돌아보며 남궁비연은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녀의 웃는 얼굴은 매력적이었다.
적어도 굳어 있던 표정보다는 훨씬 보기 좋다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누군가 문득 입을 열었다.
“허허, 이거 연회에 여흥이 너무 없군요.”
가주 가까이 앉은 중년의 사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면 제 자식놈이 검무라도 보여 드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가주님.”
가주 제갈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그럼 한번 보도록 합시다.”
가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중년인은 한 젊은이에게 눈짓을 했다.
조금 전 운현에게 분노하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운현은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