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저 우연이었겠지요
갑작스러운 충격과 소리, 그리고 매캐한 연기 속에 도적 떼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크아악.”
“사, 사람 살려!”
“으아아악. 내 눈!”
관도는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방패와 창을 쥐고 있던 도적들은 들고 있던 것들을 버리고 사방으로 달아났다.
비명을 지르는 놈, 바닥에 바싹 엎드리는 놈, 앞이 안 보이는데도 막무가내로 뛰는 놈까지 난리도 아니었다.
무조건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오직 본능적인 충동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자, 자리를! 자리를 지켜라!”
채주는 눈을 못 뜨는 와중에도 악을 쓰듯 소리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단단한 방패의 벽도, 빽빽한 장창의 진도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무너진 대열 사이를 백색의 커다란 마차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짓쳐 들었다.
콰과과곽.
창자루와 방패를 짓밟으며 마차는 거침없이 지나쳐 갔다.
그 소리가 채주에게는 마치 죽음의 선고처럼 들렸다.
“막으라니까! 어서 막으라고!”
그러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쿨럭거리는 수하들의 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놓치면 우리가 죽는단 말이다!”
채주가 악을 쓰듯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채주의 절규를 뒤로하고 백색 보차는 이미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와.”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십이궁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지금 그거 뭐예요? 화포예요?”
“화포 아닙니다.”
몸을 낮추고 두 손으로 마차 지붕을 붙잡은 제갈기호는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
도적 떼를 무사히 뚫고 나온 건 물론이고, 뒤를 쫓던 자들도 감히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폭발을 보았으니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는 저들도 함부로 뒤쫓지 못할 것이다.
그사이 일행은 국경을 넘어 북해로 향할 것이고 말이다.
“그저 요란한 소리와 연기만 잔뜩 뿜어내는 겁니다. 그래도 적절히 사용하면 제법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지요.”
제갈기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답했다.
화포에 관한 기술은 나라에서 엄격히 통제하며 함부로 유출하거나 사용했다간 멸문지화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그저 큰 폭죽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제갈세가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라 십이궁주는 눈을 빛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놀라워예요. 엄청나예요.”
“하하, 뭐 이 정도가지고요. 아, 저기 제 짐은 뒤지지 마세요. 더 이상 없다니까요.”
호기심이 달아오른 십이궁주를 제갈기호가 말리는 모습을 보며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뚫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운현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 많은 도적들은 어디서 모여든 걸까요?”
백색 보차에 대한 소문으로 모여들었다기엔 이상하다.
생각해 보면 소문보다 도적 떼들이 나타난 것이 먼저였다.
그러나 운현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십이궁주와 제갈기호가 짐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 커다란 북해의 마차는 거칠 것 없는 관도를 전력으로 질주해 나갔다.
***
마차는 저녁 늦게 국경 부근의 성읍에 도착했다.
비록 산해관이나 옥문관처럼 이름난 곳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성문이 버티고 있는 어엿한 관문 도시였다.
그곳에서 가장 커다란 객잔에 일행은 짐을 풀었다.
“후와, 이제 좀 살겠군요.”
제갈기호가 젓가락을 놓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객잔은 크고 음식은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객잔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과 먼 나라를 오가는 상인들, 심지어 수상해 보이는 자들까지 가득했지만 아무도 서로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와, 많이 먹었다예요.”
십이궁주의 감탄에 제갈기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실례의 말씀. 이건 많이 먹은 것도 아닙니다.”
본인에겐 그럴지 몰라도 앞에 쌓인 접시를 보면 확실히 많이 먹긴 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은 위도 큰 법이니까요. 하하하하.”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십이궁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위? 위대?”
아마도 모르는 단어인 듯하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제갈기호가 짐짓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까는 경황 중에 실례했습니다.”
소궁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저는 무림맹 사절단의 정사, 제갈기호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부사이신 운현 서기입니다. 뭐,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요.”
운현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이쪽은 호위인 독고랑 대협입니다. 고독객이라는 명호를 가진, 아주 대단한 분이시지요.”
자랑스레 말한 건 북해 사람들 앞이기 때문이리라.
소궁주도, 십이궁주도, 그리고 빙설과 빙혼도 독고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독고랑은 인사조차 없었다.
특유의 강렬한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보았을 뿐, 독고랑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제갈기호가 얼른 수습에 나섰다.
“크흠, 그럼 여러분의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빙궁의 소궁주입니다.”
소궁주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쪽은 호위인 빙혼, 저를 돕는 빙설, 그리고 제 동생 십이궁주입니다.”
“반가워요.”
십이궁주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갈기호도 빙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하,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소궁주님의 방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방명은 곧 꽃다운 이름이라는 뜻이다.
제갈기호 나름의 칭찬이지만 소궁주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한 사람은 십이궁주였다.
“북해에서는 이름을 주지 않아요.”
“네?”
제갈기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운현이 얼른 덧붙였다.
더 자세히 설명해 주려는데 제갈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지역도 있다고 하더니 북해가 그런가 보군요.”
그 말에 이번엔 운현이 흥미를 보였다.
“그런 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제가 이것저것 좀 관심이 많아서요. 어디서 주워들었을 뿐입니다. 하하.”
제갈기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지만 운현은 그가 생각보다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뚱뚱해 보여서 착각하기 쉽지만 제갈기호의 몸놀림은 결코 둔하지 않다.
늘 실없이 웃고 있는 것 같아도 그의 식견이나 관찰력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다.
운현은 그가 제갈세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자,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도적들 말입니다만.”
제갈기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노리는 게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목숨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미녀나 보화도 아니고. 아, 오해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니까요. 하하하.”
짐짓 너스레를 떨며 제갈기호가 말했지만 소궁주의 눈동자는 이채를 숨기지 않았다.
“어째서 목숨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제갈기호는 빙긋 웃었다.
“저라면 그런 도적 떼 따위를 보내 놓고 여러분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탁자를 손가락을 톡톡 치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그는 도적 떼들의 배후가 따로 있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었다.
“백색 보차라는 소문이 난 건 도적 떼들이 마차를 노리는 것이 밝혀진 이후니까, 미녀나 보물을 노리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저희와 합류하는 걸 방해하려는 목적도 아닌 것 같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갈기호가 말했다.
“역시 발목을 잡는 게 목적일까요?”
“발목요? 왜요? 이곳 사람들은 발목 좋아해요?”
십이궁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제갈기호는 얼른 설명해 주었다.
“여러분을 방해해서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이지요.”
“아하.”
새로운 걸 알았다는 듯 ‘발목’을 중얼거리는 십이궁주를 외면하고 제갈기호는 소궁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북해에 무슨 일이 생긴겁니까? 그리고 누가 여러분을 방해하고 있는 거지요?”
소궁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확한 것은 저도 아직 몰라요.”
사락.
찻잔을 매만지며 소궁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북해에 가야 한다는 건 분명하지요. 그리고 어쩌면, 국경을 통과하는 것도 어려울지 모르겠어요.”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똑바로 보았다.
“저들이 이곳의 관원들을 이미 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럴 리가요. 나라의 녹을 먹는 관인들이 어찌…….”
“학사님은.”
붉은 그녀의 입술에 조소가 걸렸다.
“여전히 순진하시네요.”
운현은 순간 의아했다.
자신이 언제 순진한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준 적이 있었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걸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음, 소궁주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제갈기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변경의 군대나 관원 들은 대부분 처우가 좋지 못하지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관리 감독도 소홀하고요. 뭐, 공공연하게 뇌물이 통할 정도라고 하니까요.”
“그런…….”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 혹시 소궁주님께서도 따로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까?”
제갈기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빙설을 쳐다보았다.
빙설은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냈다.
달칵.
손바닥보다 작은 것이었지만 목함이 열리자 제갈기호의 안색도 변했다.
붉은 비단 위에 오색 보주 한 알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보주는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다시 들어가야 했다.
탁.
어느새 일어선 제갈기호가 손을 뻗어 목함을 닫았다.
제갈기호는 빙긋 웃었다.
“설마 여기서 칼부림이 나는 꼴을 보고 싶으신 건 아니지요?”
“칼부림 같은 건.”
소궁주는 빙설에게 눈짓했다.
“이미 많이 봤어요.”
슥.
목함이 다시 빙설의 품으로 숨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이곳의 수문장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털썩.
자리에 앉으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한 가지만 더 있으면 완벽하겠군요.”
“하나 더요? 욕심 너무 많아예요.”
십이궁주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디서 이상한 말투를 배워 왔다고 운현이 생각하는데, 제갈기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게 아니라 한 가지만 더 있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먹어도 탈이 없을 정도의 뒷배지요.”
십이궁주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고 제갈기호가 얼른 말했다.
“그러니까 뒷배라는 건 뒤를 돌봐줄……. 어, 여기서 뒤라는 건 나중에 책임을 물을 만한 일을 말하는 건데…….”
말하던 제갈기호는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이름요. 제갈세가라는 이름만 더해지면 완벽합니다. 아무리 관인이라도 제갈세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제갈기호의 말은 옳았다.
변경의 관인들에게 제갈세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다.
아니, 어쩌면 저 높은 곳에 있는 황실보다 오히려 더 피부에 와닿을지도 모른다.
법은 멀고 칼은 가깝다는 말은 관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진실인 데다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때로 눈을 감을 줄도 알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후룩.
운현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하지만 씁쓸한 뒷맛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참, 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제갈기호가 문득 말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습니까?”
그 말에 운현도 생각났다.
분명 소궁주는 객잔에 들어올 때부터 운현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운현이 쳐다보자 십이궁주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건요…….”
사락.
소궁주의 하얀 손이 십이궁주를 제지했다.
딱딱한 표정으로 소궁주가 말했다.
“글쎄요? 그저 우연이었겠지요.”
운현도, 제갈기호도, 그리고 십이궁주도 소궁주를 쳐다보았다.
십이궁주는 소궁주의 눈총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고, 소궁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들었다.
후룩.
제갈기호와 운현의 표정엔 의혹이 가득했다.
하지만 소궁주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차를 음미했다.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 모습조차 그림처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