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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76화 (176/530)

176화. 뜻하지 않은 재회

다음 날 새벽, 일행은 객잔을 출발했다.

커다란 성문 앞에는 이미 사람과 마차 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줄 끝에 세우고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되어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 이제 시작하나 봅니다.”

따각, 따각.

그때였다.

줄을 무시한 채 보란 듯 앞으로 지나가는 마차들을 보며 제갈기호는 인상을 썼다.

“아주 대놓고 끼어드는군요.”

운현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문 수비병도 당연하다는 듯 그 마차들을 먼저 통과시켰다.

제갈기호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썩어서야 어찌…….”

“어이구, 그런 소리 마시오.”

제갈기호가 고개를 돌렸다.

말한 사람은 마차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상인이었다.

그 역시 아까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다.

“이 정도면 양반이지. 예전엔 돈을 쥐어 주지 않으면 아예 통과를 안 시켜 줬다니까?”

제갈기호가 인상을 쓰는데 운현이 물었다.

“그렇습니까?”

“그렇고말고.”

중년의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상급 무관이 새로 와서 그나마 좋아진 거요. 그 전에 있던 놈은 아주 지독했거든. 뭐, 이 사람도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상인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진 운현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앞에서 빙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옵니다.”

저벅, 저벅.

긴 창을 든 군병이 다가오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리쳤다.

“멈춰라! 어디로 가는 마차냐!”

덜컥.

마차 문이 열리고 제갈기호가 내려섰다.

“수고하십니다.”

제갈기호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무림맹 소속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무림맹?”

군병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기세가 꺾인 듯, 그는 마차 안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군병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가고, 제갈기호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돌아보았다.

잠시 후 군병이 하급 지휘관과 함께 돌아왔다.

“이, 이 마차입니다.”

군병의 말에 하급 지휘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제갈기호를 바라보았다.

“무림맹 소속이라고?”

“그렇습니다.”

“신분을 증명할 것이 있나?”

하급 지휘관의 태도는 무례했다.

아무리 관원이라도 초면에, 그것도 무림맹의 사람에게 이런 태도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 있습니다.”

제갈기호는 무림맹의 이름으로 된 서찰을 건넸다.

하급 지휘관은 서찰을 펴고는 성의 없이 훑어보았다.

“흠.”

탁.

서찰을 접고 하급 지휘관이 말했다.

“조사할 게 있다. 따라와.”

그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뭐냐?”

“서찰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말하는 제갈기호의 목소리 역시 딱딱했다.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으리라.

하급 지휘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지금부터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와라.”

“이곳 책임자를 불러 주십시오.”

“뭐?”

하급 지휘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제갈기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무림맹 소속 이전에 제갈세가의 사람이오. 이유 없는 조사에는 응하지 않겠소이다.”

“제갈세가라고?”

하급 지휘관이 놀란 표정을 했다.

제갈기호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소. 바로 그 제갈세가요.”

“아, 그러셨군요.”

하급 지휘관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제갈기호는 일이 틀어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 자식아. 제갈세가라면 내가 고개라도 굽실거릴 줄 알았냐?”

제갈기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댄 하급 지휘관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여기서 그런 이름은 개똥만도 못하거든? 알았어? 알았냐고!”

하급 지휘관의 박력은 사뭇 대단했다.

그는 땅에 침을 퉤 하고 뱉고는 주위의 군병들에게 말했다.

“이 싸가지 없는 자식들 전부 끌고 와!”

“네!”

“잠시 기다려 주시오.”

달칵.

문을 열고 나선 사람은 운현이었다.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북해 일행이 강행 돌파를 시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빙혼은 언제라도 마차를 돌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자식이야?”

하급 지휘관이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운현은 두 손을 모아 쥐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본의 아니게 관인의 직무를 방해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하급 지휘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문사 차림의 운현이 예의를 갖춰 말하자 그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혹여나 관(官)에 연줄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사과는 필요없소. 따라오시오.”

하급 지휘관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말투는 확실히 아까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운현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아까 그 서찰에는 절강성 포정사의 직인이 찍혀 있습니다.”

하급 지휘관이 움찔했다.

황군이 아닌 무력 단체가 존립하려면 어떤식으로든 지방관청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무림맹 역시 절강성의 지방관과 긴밀한 유대를, 주로 재정의 헌납과 관부의 승인이라는 형태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절강성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지방관, 포정사의 직인이었다.

“포정사의 보증이 있음에도 조사가 필요하다 하시니,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운현의 논리 정연한 말에 하급 지휘관도 말문이 막혔다.

상인들은 그냥 보내면서 무림맹, 그것도 포정사의 직인이 찍힌 서찰을 든 자들을 검문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그건…….”

하급 지휘관이 머뭇거릴 때였다.

마부석에 앉은 빙혼이 슬쩍 운현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이대로 강행 돌파할 뜻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안 되오.’

운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하급 지휘관이 보고 말았다.

“이놈들! 뭐하려는 것이냐!”

아니나 다를까?

노련한 하급 지휘관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창.

뒤에 서 있던 군병들도 급히 창을 겨누고, 주위에 있던 다른 군병들도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긴장이 감돌았다.

“당장 검을 풀고 따라와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냐.”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휘관은 즉시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갑옷을 입고 나타난 사람은 강인한 눈매를 가진 젊은 무관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아마도 이곳을 책임지는 상급 무관인 듯했다.

하급 지휘관은 절도 있는 자세로 군례를 취한 후 대답했다.

“이자들이 조사에 불응하여 끌고 가려는 중입니다.”

“조사에 불응했다고?”

젊은 상급 무관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때 제갈기호가 운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잘됐군요. 저 무관이 이곳의 책임자인 듯합니다.”

작은 목함을 운현에게 슬며시 건네며 제갈기호는 말을 이었다.

“운 서기께서 분위기를 보아 이것을…….”

“아닙니다.”

운현은 목함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어려워질 듯합니다. 저 사람은.”

씁쓸한 표정으로 운현이 상급 무관을 쳐다보았다.

강렬한 눈매에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진 그 젊은 무관은, 운현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뇌물이 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네?”

제갈기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운현은 여전히 젊은 상급 무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에 아련한 그리움이 배어 있는 것은 오직 독고랑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벅, 저벅.

그사이, 하급 지휘관에게 상황을 들은 상급 무관은 운현에게 다가왔다.

“이야기는 들었소. 그러나…….”

“오랜만이오.”

젊은 상급 무관이 움찔했다.

그는 운현을 다시금 쳐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운 학사님이십니까?”

“그렇소. 나요, 관 교두.”

젊은 상급 무관은 바로 관철훈 교두였다.

무과의 장원으로 금의위에 들어왔었고, 방안과 문제가 있었다가 후에 교두가 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동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젊은 상급 무관은 곧 정중하게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운 학사님.”

그의 강렬한 눈동자엔 여전히 놀라움이 가득했다.

어찌 그가 운현을 모를 수 있으랴?

학사면서도 매일같이 금의위 훈련장에 나와 살던 사람이 바로 운현이다.

다른 교두들과 친한 것은 물론이고 훈련생 중에는 운현의 충고로 도움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훈련생들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던 일충현 교두의 의형제이자 그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

금의위 출신이라면 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운현이었다.

“그간 잘 지냈소?”

묻고 나서 운현은 아차싶었다.

황실 금의위 출신 교두가 이런 변경에 있는 의미는 분명했다.

좌천당한 것이다.

“그럭저럭입니다.”

관철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함께 가시지요.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

“혹시.”

운현의 목소리가 관철훈의 말을 잘랐다.

“우리를 이곳에 잡아 두라는 명을 받았소?”

관철훈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하급 지휘관에게 말했다.

“주위를 물려라.”

하급 지휘관은 즉시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창을 겨누던 군병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하급 지휘관도 자리를 떴다.

관철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범죄자도 아닌 사람을 구금하는 명령은, 공식적으로는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운현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말하는 관철훈의 표정은 착잡했다.

운현 역시 씁쓸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운 학사님.”

관철훈이 말했다.

“저와 같이 가시지요. 학사님 일행께 무례히 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며칠간 우리는 도적 떼들의 집요한 추적과 방해를 받았소.”

관철훈의 눈빛이 변했다.

역시 그는 이해가 빨랐다.

“그럼 소문에 듣던 백색 보차가…….”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물론 소문대로 보화가 실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막으려 했소. 그리고 이제는 감히 국경 경비군에도 손길을 뻗쳤구려.”

심각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런 그들이 우리를 며칠 구금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소? 우리의 발이 묶인 것을 알면 다음에는 목숨을 노릴지도 모르는 일이오.”

관철훈은 눈을 감았다.

운현의 걱정을 기우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조직적으로 도적 떼를 움직이고, 국경 경비군에 압력을 행사할 정도라면 운현의 말대로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게다가 관철훈은 또 다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십시오.”

관철훈이 말했다.

제갈기호의 얼굴이 대번에 반색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행여 말이 바뀔세라, 제갈기호는 얼른 감사를 표하곤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운현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괜찮겠소?”

“운 학사님은 모르시겠지만, 무림 고수로 추정되는 자들이 오늘 새벽에 이 성에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운현의 안색이 굳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말라는 명령이, 역시 비공식적으로 내려왔습니다. 제게 들리기로는 그들이 바로 이 백색 보차에 대해 묻고 다녔다고 합니다.”

관철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서 가십시오. 절대 길을 지체하셔서는 안 됩니다. 저로서는 이미 그들을 막을 명분도, 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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