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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88화 (188/530)

188화. 백호실전검 제이식

탓.

운현은 즉시 침상으로 다가갔다.

‘빙설!’

침상 주위에는 빙설을 비롯한 열 두 명의 북해십이비가 서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빙제를 향해 손을 뻗은 그녀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북해십이비를 절대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운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휙.

운현은 고개를 돌려 소궁주를 보았다.

비파를 쥔 그녀의 얼굴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비파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 선율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이대로라면 곧 파탄이 날 것은 분명했다.

빙후가 침상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 역시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마치 닥쳐올 파국을 각오하는 듯이.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꾹.

운현이 검을 세게 쥔 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반응은 격렬하게 돌아왔다.

“안 돼요.”

탁.

그녀는 바로 빙후였다.

빙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 앞에 선 것이다.

마치 운현을 가로막으려는 듯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운현이 의아해하는데 빙후는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허락할 수 없어요.”

운현은 한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

빙후는 운현이 빙제를 죽이려 한다고 여긴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소궁주나 북해십이비를 살리는 건 사실상 그 방법뿐이니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빙후 님, 저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빙제를 해할 리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북해십이비와 소궁주마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운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충격.’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려 휘장이 펄럭이는 침상을 바라보았다.

‘충격이 없다면…….’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릉.

빙후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사박.

빙후는 운현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두 손을 모아 쥔 그녀는 비장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나는 맹세했어요. 그 어느 때라도 북해의 빙후로서 이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빛나는 눈동자로 빙후가 말했다.

“이 사람을 죽이려면 날 먼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검을 눈앞에 세우며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지키려고 온 것이니까요.”

우웅.

더 이상 말은 없었다.

운현은 자신의 앞에 이미 떠올라 있는 마음의 검을 쥐었다.

사락.

북해의 검 미명과 운현의 검이 겹쳐졌다.

그리고 진실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우욱.

‘이런.’

운현의 눈앞, 빙제의 침상에서 한기가 미친 듯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을 억눌러야 할 북해십이비는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고 있었다.

비록 소궁주의 비파는 북해십이비가 단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고 있었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차이라면 이미 의미는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왜 이런 상황을 소궁주가 예상하지 못했을까?

운현은 의아했지만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훙.

북해십이비의 가슴에 걸린 작은 빙정들이 빛을 발했다.

그것도 열두 개의 빙정이 동시에.

‘공명!’

열두 개의 빙정은 동일한 성질의 한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북해십이비는 소궁주의 비파를 따라 동시에 빙정의 힘을 해방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빙정들의 공명을 가져왔고 그 결과 빙정의 힘이 폭발적으로 증폭된 것이다.

‘혹시…….’

지금이라도 빙정을 파괴하면 이 공명이 멈추지 않을까?

그러나 운현은 곧 그 생각을 포기했다.

후우우우웅.

열두 빙정의 공명으로 증폭된 한기는 이미 자신의 실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빙제의 침상 위에서 휘몰아치는 기운은 빙정들의 한기는 물론 북해십이비의 내력까지 강제로 가져가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소용돌이가 주변의 작은 흐름을 전부 집어삼키는 것처럼.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이 한기를 아무런 충격 없이 흐트러트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사박.

운현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내력을 북해의 검, 미명에 담았다.

웅.

작고 가냘픈 기운이 검에 어렸다.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한기에 비하면 마치 반딧불처럼 희미한 기운이었지만 운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할 일은.’

후우우웅.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한 한기의 폭풍을 보며 운현은 다시금 되새겼다.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빙정의 공명으로 증폭된 한기는 마치 맹수처럼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보았던 그 거대한 흐름은 이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광대한 흐름은 지금도 운현과 세계를 그 품에 안고 흐르고 있었다.

사락.

그 생각에 답하기라도 하듯 가벼운 바람이 뺨에 느껴졌다.

그 순간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찾았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운현의 검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웅.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듯, 그리고 세월이 지나가듯.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운현의 검은 하나의 검로를 그려 나갔다.

그것은 바로 백호실전검 제이식, 유검(柔劍)이었다.

***

훙.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바로 소궁주였다.

그녀는 폭주하던 빙정의 기운이 일순간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아무런 전조도, 충격도, 간섭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마치 이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휘몰아치던 한기가 갑자기 가라앉은 것이다.

따라랑.

이유나 원인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소궁주의 비파는 빠르게 새로운 음률을 탄주하기 시작했다.

북해십이비 역시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들은 빙정의 기운을 즉시 예정된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웅.

빙정의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북해십이비의 제어에 순종했다.

아니, 이전보다 더욱 순수하고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빙제의 치료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후우.”

운현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한기가 잦아든 것과, 소궁주의 비파가 안정적인 음률을 회복한 것을 확인한 운현은 그제야 안도했다.

‘됐다.’

운현의 시도는 성공했다.

폭주하는 한기를 아무런 충격 없이 진정시킨 것이다.

‘다행이야.’

반쯤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라면 폭주하는 흐름의 중심, 예컨대 폭풍의 눈과 같은 곳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백호실전검 제이식 유검이 그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가지의 추측이 다행히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정말, 다행이야.’

위험한 시도였지만 결과는 대단히 좋았다.

운현은 북해십이비와 소궁주, 그리고 빙제를 지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슥.

운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북해의 검, 미명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항감이랄까, 반발 같은 것이 너무 없었는데?’

운현의 검에 실린 기운은 빙정의 한기와 다른 이질적인 것이다.

아무리 운현의 검이 흐름을 타고 움직였다지만 최소한의 저항감은 느껴져야 했다.

그러나 빙정의 한기는 운현의 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기다렸다는 듯, 혹은 애초부터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운현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잘됐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때였다.

“어, 어떻게…….”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강하고 여유롭던 빙후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던 빙후는 운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살짝 목 메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것이었군요.”

말하는 빙후의 눈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녀는 소궁주와 북해십이비, 그리고 빙제의 침상을 쳐다보았다.

“내가 오해를 했었네요. 그것도 터무니 없는 오해를…….”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누구라도 착각할 만하다고 운현은 말하려 했다.

사락.

빙후가 운현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빙후가 운현에게 올린 두 번째의 예였다.

“공자께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빙후가 말했다.

“고마워요.”

“아니, 저기 이러실 필요까지는…….”

당황한 운현은 빙후를 말리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직 치료는 끝나지 않았으니 옆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금물이다.

그 사이, 빙후는 예를 마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에겐 또 빚을 졌네요.”

빙후가 이전에 운현에게 빚을 진 적이 있던가?

운현은 의아했지만 빙후는 이미 몸을 돌려 빙제의 침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건 그저 착각일 뿐일까?

문득 운현은 아직 검을 뽑아 든 채라는 것이 생각났다.

미명을 갈무리하려던 운현은 문득 검을 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흠.’

다시 봐도 미명은 여전히 아름답고 멋진 검이었다.

조금 전 아무런 저항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미명이 북해의 검이기 때문일까?

‘혹시 이 검도 낙일처럼 뭔가 전설이 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소궁주가 아무 검이나 주진 않았을 것 같으니까.

운현은 천천히 검을 갈무리했다.

스릉.

미명이 모습을 감추고 대전 안에는 이제 소궁주의 비파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매우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음률이었다.

따라랑, 따랑.

은빛 가조각을 빛내며 비파를 연주하는 소궁주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 고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운현도 알고 있었다.

“크흠.”

물끄러미 소궁주를 쳐다보던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이 실례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운현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대전 안을 슬쩍 돌아보았다.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 대전의 모습은 스산하기까지 했다.

대체 빙궁 지하에 왜 이런 곳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잘돼서 다행이라고 운현이 막 생각할 때였다.

쿠궁.

묵직한 울림이 대전을 울렸다.

운현의 안색이 변했다.

복도로부터 울려 온 나지막한 그 소리는 분명 폭음이었다.

“여기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놀란 얼굴의 빙후에게 그렇게 말하고 운현은 즉시 대전 바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타닥.

‘독고 제!’

밖을 지키던 사람은 바로 운현의 의제, 독고랑이다.

설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복도를 달려 나가는 운현의 표정은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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