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문서의 주인
쿵.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까지 미동도 없던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나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스르르 옆으로 무너져내렸다.
털썩.
여인의 가녀린 체구가 땅에 쓰러졌다.
이미 호흡의 기색은 없었다.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내 아이라고?’
사내는 죽이려던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겁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눈앞에서 어미가 죽었어도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하는 비루한 그 모습에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 후에 사내가 물었다.
“몇 살이냐?”
아이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 열두 살…….”
“허.”
사내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이곳을 떠났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은 자신의 어렸을 적과 너무나 흡사해 보였다.
총명해 보이는 눈과 잘생긴 얼굴, 그리고 겁에 질린 저 눈동자까지.
아이는 어머니의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가겠느냐?”
사내의 물음에 아이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어미를 죽게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하지만 사내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가자.”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모두가 자신의 뜻대로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살아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내는 아이의 운명을 정했다.
슥.
사내는 아이의 옷깃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땅을 박찼다.
후욱.
불타는 마을과 매캐한 연기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곳을 떠났고, 아이는 훗날 문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으음.”
사내의 목소리에 수하가 즉시 그 앞에 엎드렸다.
길고 큰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눈을 감은 채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수하는 주인의 뜻을 알아들었다.
슥.
수하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대전에 나지막이 울렸다.
“오랜만에 주무신 것이니 조금 더 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단정한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말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내가 걱정되느냐?”
문사 차림의 중년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다만 상인께서 주무시지 않는 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후후.”
상인(上人)이라 불린 사내는 가볍게 웃었다.
“너는 내가 조금도 자지 않는 것이 놀라운가 보구나.”
스윽.
어둠 속에서 그가 일어섰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아직도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구나.”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고개를 숙이고, 상인은 천천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문서의 주인에 대해 찾아낸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상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본 것은 분명히 하늘과 땅의 주인이 바뀌는 대역천의 괘였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 자신을 새로운 주인으로 선택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천무서에 기록된, 유난히 독특한 한 구절이었다.
[힘은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 가운데 노닐고, 지혜는 땅으로 내려가 사람들 가운데 숨었다.]
하늘 아래 땅이 있고 모든 만물에 음과 양이 존재하듯 천하의 모든 것은 그 대응하는 짝이 있다.
그러므로 힘을 기록한 무서(武書)가 있다면 지혜를 기록한, 예컨대 문서(文書)라는 것도 있을 터였다.
비천무서의 주인인 자신이 무공의 끝을 통해 하늘의 비밀을 깨달았듯, 문서(文書)의 주인이 지혜의 끝을 더듬어 하늘의 힘을 얻는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그제야 그는 대역천의 괘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에 있을 문서의 주인.
바로 그를 찾아야 했다.
그가 지혜의 끝을 더듬어 하늘의 힘을 얻기 전에 말이다.
“그때의 꿈을 꾸다니.”
상인은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한 밤하늘엔 별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구나.”
낮은 목소리로 상인은 말했다.
암천무제와 비련, 그리고 문왕을 거둔 자이며, 비천무서의 주인.
그는 바로 스스로를 일대상인(一大上人)이라 칭하는 자였다.
***
북해 빙궁의 일궁주전(殿).
모여 있는 이들은 크게 격앙되어 있었다.
쾅.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쿠툴라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온갖 싸움터를 거쳐 온 역전의 용사, 쿠툴라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푸른 늑대라니! 어찌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외지인에게 내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북해의 모든 용사를 모욕하는 것이다!”
“진정해라. 쿠툴라.”
묵직한 목소리는 바로 용사 에센이었다.
그 역시 손꼽히는 용사인 에센은 굳은 표정으로 쿠툴라에게 말했다.
“첫 푸른 늑대께서도 본래 외지인이셨다. 북해의 용사만이 그 이름을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아니, 오히려…….”
“지금 이름의 유래에 대한 논쟁을 하자는 게 아닐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용사 카불이 쓴웃음을 지으며 에센의 말을 끊었다.
“문제는 삼궁주가 데려온 자가 푸른 늑대의 이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지. 이 일이 북해 전역에 알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나?”
카불의 말에 에센은 신음을 흘렸다.
모를 리가 없다.
당장 수많은 부족장들이 삼궁주의 편에 서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이제 다음 빙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그녀가 되었으니까.
“흥! 나약한 부족들 따위 얼마든지 몰려가도 상관없다.”
쿠툴라가 거친 숨을 내뿜으며 말했다.
“나 쿠툴라가 전부 쓰러뜨려 줄 테니.”
그의 말을 단순한 허세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쿠툴라의 무위는 북해에서도 손꼽힌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닐세.”
언제나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용사 카불이 말했다.
“그는 검성의 후계자이자 낙일의 새로운 주인일세. 거기다 이제는 푸른 늑대의 칭호마저 손에 넣었지. 그가 삼궁주의 편에 선다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당장 우리 부족의 장로들만 해도 크게 동요할 것이 분명한데.”
공포가 경외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검성의 후계자이자 낙일의 주인.
그는 빙후의 예에 답하여 맹약을 지킬 뜻을 밝혔고 빙제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신의를 확증했다.
이제 북해의 수호자, 푸른 늑대의 칭호를 얻은 그에게 어느 누가 경의를 표하지 않으랴?
과거에 집착하는 장로들과 나이 든 용사들에게는 더더욱 그 의미가 각별하리라.
“음.”
듣고 있던 에센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대체 빙제께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알 수가 없군. 무슨 생각으로…….”
“흥! 아마도 노망이 든 모양이지.”
쿠툴라가 빈정거렸다.
에센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말을 조심해라. 쿠툴라!”
“조심해야 할 건 너다. 에센!”
쿠툴라는 화를 내며 외쳤다.
“아직도 모르겠나? 빙제는 완전히 삼궁주에게로 돌아섰어. 그 빌어먹을 빙후가.”
빠득.
쿠툴라는 이를 갈았다.
“빙제의 눈과 귀를 가리더니 마침내는 새파란 외지인에게 푸른 늑대의 이름까지 팔아넘겼다고!”
“쿠툴라!”
쾅.
에센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툴루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만.”
나지막한 목소리에 에센과 쿠툴라의 행동이 멈췄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일궁주였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입니까?”
젊은 일궁주의 눈빛은 서늘했다.
쿠툴루도, 에센도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후우.”
일궁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센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빙제께 무례를 행해선 안 되지요. 그리고 쿠툴라 님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눈동자를 빛내며 일궁주가 말했다.
“푸른 늑대는 빙제의 예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북해의 그 누구도 빙제의 위에 서지는 못한다.
단 한 명의 예외가 바로 푸른 늑대다.
오직 그만이 빙제에게 가르침을 내릴 수 있으며, 그러므로 빙제의 예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이 푸른 늑대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다.
“그러니 과연 빙제님께 푸른 늑대의 이름을 줄 권한이 있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말하던 일궁주는 시선을 들었다.
“패왕도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흰 눈썹과 흰 수염을 가진 백발의 거한, 패왕도 바얀투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제님을 암습한 흉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었소?”
젊은 일궁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패왕도 바얀투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지금 그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겠지요.”
빙제 암습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다.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일궁주에게 의혹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고, 심지어 일궁주의 세력 내에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빙제님을 암습한 흉수는 호위대장이었습니다.”
일궁주의 말에 나지막한 신음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빙제를 지켜야 할 호위대 대장이 흉수라니,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배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모두들 나를 의심하고 있겠지요.”
일궁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같이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빙제를 암습할 동기는, 굳이 따지자면 소궁주들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빙제가 죽는다면 제일 큰 이득을 볼 사람은 바로 일궁주다.
그가 다음 빙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배후는 바로 그것을 노렸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신중한 에센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궁주님이 빙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삼궁주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결과는 아마 내란에 가까운 것이 되겠지요. 암습이 실패해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내란이 정쟁 수준으로 약화될 뿐이지요.”
확실히 있을 법한 얘기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흥! 전부 빙후의 계략일 가능성도 있지.”
“쿠툴라, 또!”
에센이 책망하듯 말했지만 쿠툴라는 멈추지 않았다.
“암습이 빙후의 자작극이라면 치료도 쉬운 일이지. 게다가 하필 이런 때에 검성의 후계자가 나타나?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날카로운 지적에 에센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하면 그것도 이상하긴 하다.
검성의 후계자가 북해에 모습을 나타낸 시기가 너무나 공교로운 것이다.
마치 빙제가 암습을 당할 것을 미리 예견한 것처럼 말이다.
“더욱 기이한 점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궁주가 말했다.
“빙궁은 암습의 배후를 밝히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대로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흉수가 호위대장이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빙제의 암습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빙궁은 그 배후의 색출에 소극적이었다.
“빙후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말씀이신가?”
묵직한 목소리로 패왕도 바얀투가 물었다.
일궁주는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 일로 인해 삼궁주와 빙후가 가장 큰 이득을 얻었음은 분명합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일궁주는 말했다.
“이제 빙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삼궁주가 될 테니까요.”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카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중요한 것은 암습의 배후가 아닙니다.”
언제나 현실적인 카불이 쿠툴라와 에센, 패왕도 바얀투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삼궁주의 기세를 꺾지 못하면 장차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카불의 말에 동의했다.
“허나 어떻게?”
에센이 카불에게 물었다.
“어떻게 삼궁주의 기세를 꺾는단 말인가? 삼궁주는 빙제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이제 푸른 늑대마저 등에 업었으니…….”
“그 푸른 늑대를.”
묵직한 바얀투의 목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내가 시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