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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01화 (201/530)

201화. 북해의 검

십이기수의 선두로 나선 자는 언제나처럼 첫째 기수였다.

둘째와 셋째 기수가 좌우에서 진을 이루며 첫째 기수를 뒤따랐다.

그리고 세 명의 기수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 진이, 마치 날개를 펴듯 좌우에서, 그리고 후방에서 뒤따르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십이기수의 출발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곧게 세웠던 창이 정면을 향해 내려지고, 강인한 북해의 전마들이 대지를 박차기 시작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두두두.

열두 기마는 곧 한 무리가 되어 운현을 향해 질주해 나갔다.

서늘한 기운이 서린 열두 개의 날카로운 창끝 역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운현을 노리고 있었다.

콰과과과곽.

질주하는 말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육중한 전마가 내뿜는 파괴력은, 선두에서 번득이는 창이 아니더라도 사람 하나를 짓이기는 데는 충분했다.

군대가 상대라 해도 결코 멈추지 않는 엄청난 파괴력.

그 압도적인 폭력이 운현 한 사람을 향해 짓쳐 들던 바로 그때였다.

사박.

창날이 지척까지 이른 바로 그 순간.

운현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지금 상황과는 너무나 맞지 않는, 지극히 부드럽고 유려한 검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선두의 첫째 기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자신의 창끝으로 운현의 검이 마치 나비처럼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때로 무인들은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목숨이 오가는 생사결 혹은 깨달음의 순간일 수도 있다.

지금 첫째 기수는 바로 그런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말을 타고 질주하는 자신의 창끝보다, 여유로이 허공을 가르는 운현의 검이 먼저 스스로의 검로를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아니 온 세상이 운현의 검을 기다려 주는 것처럼 말이다.

사락.

운현의 검 끝이 자신의 창끝에 가볍게 가 닿는 순간을 첫째 기수는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훅.

부드러운 바람이 첫째 기수를 스치는가 싶더니, 천지가 그의 눈앞에서 단번에 뒤집혔다.

‘헉!’

경악한 중에도 첫째 기수는 즉시 말을 제어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전력으로 질주하던 전마는 이미 공중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로 함께 달리던 기수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무엇을 할 수도, 경고를 외칠 시간조차도 없었다.

퍼억.

첫째 기수와 그의 전마는 동료 기수 위에 가차없이 떨어져 내렸다.

“크아악!”

히히힝!

육중한 전마들의 충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게다가 허공으로 날아간 것은 첫째 기수만이 아니었다.

그를 뒤따르던 기수들 역시 하늘로 비산하고 있었다.

마치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잎들처럼 말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콰과곽, 퍼억.

히히힝.

“크헉!”

사방은 삽시간에 난리가 났다.

커다란 말과 전사들이 땅에 나뒹굴고, 돌진하던 전마들은 서로 충돌하고 뒤엉키며 기수들과 함께 곤두박질쳤다.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기수들은 그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사방은 순식간에 전사들의 비명과 구슬픈 말울음 소리로 뒤덮였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 뭐야.”

지켜보던 제갈기호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간단하다.”

독고랑이 말했다.

늘 침착한 그조차도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돌진해 온 기마의 힘을 그대로 받아넘기신 것이다. 그리 드문 수법도 아니지 않는가?”

“받아넘겨? 이화접목의 수법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제갈기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호 무림에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수법들이 있다. 소위말하는 이화접목이나 사량발천근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저런 광경은 강호 무림의 사정에 밝은 제갈기호로서도 상상조차 못 했다.

적어도 한 문파의 극의, 예를 들어 무당의 태극혜검 정도가 아니고서는 말이다.

하지만 차마 무당의 극의를 입에 담을 수는 없는지라, 제갈기호는 그저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릴 수밖에는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해의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용사 카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십이기수의 돌격이 단번에 와해되어 버렸다.

직접 보고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허어.”

나지막한 탄식이 옆에서 흘러나왔다.

“십이기수의 돌격을, 단 한 자루의 검으로…….”

패왕도 바얀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역시 전사이자 무인이다.

눈앞에 벌어진 이 광경에 패왕도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패배한 이들이 자신의 십이기수라 할지라도 말이다.

‘과연.’

입술을 깨물며 패왕도는 되뇌었다.

‘검의 하늘, 검성의 이름을 이을 자로군.’

어째서 빙제가 그에게 푸른 늑대의 이름을 허락했는지 패왕도는 뼛속 깊이 납득할 수 있었다.

검성의 그림자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북해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패왕도는 땅에 나뒹구는 자신의 십이기수들을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욱신.

가슴의 오래된 상흔이 새삼 아파 왔다.

이 아픔이 과거의 패배 때문인지, 아니면 형제 같은 수하들의 고통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만은 분명했다.

“……내가.”

패왕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패왕도 바얀투를 바라보았다.

이 엄청난 광경을 이루어 냈음에도 운현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음은, 자신의 뜻대로 된 것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리라.

“그대를 오판했음을 인정한다. 그대는…….”

“기다려 주십시오.”

용사 카불이 패왕도의 말을 끊었다.

“아직 저자를 시험할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패왕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에겐 아직 용사들이 있습니다.”

카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른여섯의 기마대가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경악하고 있었지만 북해의 정예답게 전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했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나 패왕도에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보지 못했더란 말이냐?”

그 광경을 보고서도 어찌 그를 더 시험할까?

패왕도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지만 카불에겐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뭐라고?”

패왕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카불은 기마대를 향해 외쳤다.

“남쪽에서 온 자가!”

카불의 눈빛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괴이한 사술로 십이기수를 쓰러뜨렸다! 명하노니 너희는 저자의 사술을 깨고 그의 진정한 힘을 시험하라!”

“우오오오!”

기마대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패왕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카불의 행동이 가진 의미를 즉시 알아차렸다.

“……일궁주님이시냐?”

카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했다.

“우리에게도 저자를 시험할 권리는 있습니다. 이대로 창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패배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패왕도는 이미 일이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을 깨달았다.

그사이 카불은 기마대를 향해 외쳤다.

“돌격하라!”

기마대에게 돌격은 그 무엇보다 지엄한 명이다.

본능에 새겨질 정도로 혹독한 훈련과 실전을 겪은 기마대는 즉각 그 명을 따랐다.

“돌격!”

“돌격하라!”

서른여섯의 기마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뾰족한 형태의 진을 형성하고 점차 속도를 더해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따가닥, 따가닥.

완전무장 한 기마대는 창을 내리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단 한 사람, 운현.

수십의 기마대가 돌격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상대였지만 기마대의 눈빛에 방심은 조금도 없었다.

조금 전 그가 단 한 자루의 검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강인한 북해의 말들이 대지를 박차고 기마대의 돌격은 더더욱 빨라졌다.

이제 그들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패왕도 바얀투는 고개를 돌려 카불을 보았다.

“너는 나를 배신했다.”

카불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그리고 너는 용사들을 거짓으로 충동질하여 사지로 몰아넣었다.”

패왕도는 차가운 시선을 말을 이었다.

“너와 함께 전장을 헤쳐 온 피의 형제들을 말이다.”

사지(死地)라는 패왕도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조금 전 그 광경을 만들어 낸 운현이 살심을 품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패왕도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너는 이제 용사가 아니다. 카불.”

패왕도는 단언했다.

“그리고 더 이상 피의 형제도 아니다.”

“……이 죄는.”

카불은 말했다.

“후에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비장했다.

그러나 패왕도는 듣지 못했다.

순간 엄청난 기세가 사방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윽.’

패왕도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질주하는 기마대 저편으로, 운현의 검이 푸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저건…….’

우웅.

하늘을 향해 솟은 미명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 전 십이기수를 무력화시킬 때와는 전혀 다른 자세였다.

비록 패왕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운현이 환상 가운데 본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우웅, 우우우웅.

미명은 점차 그 빛을 더해 갔다.

이제는 검의 형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누구라도 경악할 광경이었지만 기마대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우우웅.

“역시…….”

미명을 든 운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힘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안에서 동조하며 공명하고 있는 낙일의 심상, 그리고 그 너머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

바로 만년빙정의 힘이 운현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환상 속에 운현이 본 모습은 이것보다 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운현으로선 이 정도가 한계였으니까.

두두두두두.

짓쳐 드는 서른여섯의 기마대를 보며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 빙혼.”

후우우욱.

빛을 뿜는 푸른 검의 형상이 기마대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리고 거대한 기세의 폭풍이 질주하는 기마를 덮쳤다.

후우우웅.

기마대의 선두에 선 자들은 각오하고 있었다.

빛나는 운현의 검이 대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은 누구라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달랐다.

후욱.

거대한 푸른 기운이 일으킨 기세는 그대로 기마대를 지나가 버렸다.

그들이 느낀 것은 다만 서늘한 바람뿐, 기마대는 베어지지도 않았고 파괴적인 힘에 튕겨 나지도 않았다.

‘어?’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 거대한 푸른 검은 또다시 기마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후욱.

역시나 푸른 기운은 그저 기마대를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명한 결과를 가져왔다.

기마대의 그 누구라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결과를.

덜컥.

섬뜩한 전율과 함께 기수들은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었다.

질주하던 전마들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마치 발밑이 갑자기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헉.’

쿠당탕.

기수들은 말과 함께 속절없이 땅으로 나뒹굴었다.

전장을 누비던 용맹도, 노련한 기술도 소용이 없었다.

강인한 전마들이 제 풀에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수십의 기수들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말과 함께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온몸에 기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콰당탕.

히히힝, 푸르르.

“으으윽…….”

기수들의 신음 소리와 처량한 말 울음소리가 황량한 대지에 낮게 깔렸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이를 악문 패왕도 바얀투와 경악을 숨기지 못하는 카불, 그리고 십이궁주와 제갈기호는 물론, 독고랑과 전대 장로들까지.

눈앞의 광경에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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