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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17화 (317/530)

317화. 분쟁의 시작

조관은 운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여인이 산서성 북해일문의 문주라는 건 이미 들었다.

그러나 운현에겐 분명 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고 조관은 확신했다.

늘 여유롭던 운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항주 영웅맹에서 독고랑의 시신을 찾아올 때만큼이나.

“……그녀는.”

운현이 천천히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사박.

당설련과 북해일문의 일행이 운현 앞에 멈춰 섰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궁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쏴아아.

가슴속에서 바람이 불었다.

별이 쏟아질 것만 같던 북해의 밤하늘 아래, 조용히 비파를 연주하던 그녀의 모습이 꿈결처럼 떠올랐다.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와 자신을 바라보던 그 아름다운 눈동자도.

“소궁…….”

사락.

소궁주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내려앉았다.

마치 나비가 내려앉듯 부드럽고 우아하게, 소궁주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북해의 무신께.”

고개를 숙인 채 소궁주가 말했다.

새하얀 비단옷이 바닥에 흐트러지고,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북해일문의 문주가 예를 표합니다.”

운현은 가슴이 콱 막혔다.

소궁주는 운현을 낯선 명호로 불렀다.

그녀 자신의 호칭 역시 운현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 낯선 감각이 운현의 입을 막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북해일문의 문주는 분명 운현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조정의 전권 대리인에게 표하는 예인지, 아니면 창룡검주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락.

그사이, 소궁주가 일어났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결국.”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리된 것입니까?”

“처음부터.”

희미하게 웃으며 북해일문주가 말했다.

“이리될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이미 말했었다.

자신이 뜻을 꺾지 않고 운현이 검을 놓지 않는 한, 두 사람의 길은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때 그 말이 오늘, 이곳에서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사락.

소궁주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 음…….”

귀여운 매력의 십이궁주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곧 고개를 돌리고 소궁주를 따랐다.

호위인 빙혼과, 여전히 시비처럼 보이는 빙설도 조용히 소궁주를 따라 몸을 돌렸다.

뚱뚱한 중년인 역시 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따라갔다.

“훗.”

나지막한 웃음은 바로 당설련의 것이었다.

“다행이네요.”

고개를 들고 운현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당설련은 말했다.

“그녀가 당신보다 지혜로워서요.”

사박.

당설련 역시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그녀의 입가엔 득의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인.”

조관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 말도 없던 운현은 문득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조관을 바라보며 운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죠.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난 듯하니까요.”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오히려 조관이 살짝 놀랄 정도였다.

저벅.

운현은 조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을 옮겼다.

담소하와 항장익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예림은 당설련을 한번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당설련은 이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저벅, 저벅.

운현 일행은 연회장 밖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당설련이 스치듯 쳐다보았고 황보선혜는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바라보았다.

모용미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귀빈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는 진예림이 전해 준 작은 쪽지 한 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

***

사천성 성도, 화려한 기루의 별채.

향기로운 미주와 웃음이 꽃피어야 할 그곳에는 분노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 형태를 갖추어 나타났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쉭.

서늘한 검광이 번뜩이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으아아악.”

젊은 사내, 공손연은 절규하며 자신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팔은 이미 잘려 나간 후였다.

텅그렁.

검을 들고 있는 그의 팔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네, 네년! 네년이!”

공손연은 절규했다.

하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그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흥!”

아미 십이선사 중 한 사람, 지심은 검을 든 채 말했다.

“팔이 잘려도 그 더러운 입은 여전하구나. 내게 검을 빼어 들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갔느냐?”

그녀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평생 불도를 닦아 온 그녀였지만 지금처럼 화가 치솟은 적은 없었다.

아미파의 승려들을 기루에서 맞이한 것도 모자라 술과 고기로 상을 차렸다.

책임자라는 새파란 애송이 공손연은 기녀를 좌우에 끼고 아미파를 맞이했고, 젊은 지심에게 내내 음담패설을 던졌다.

도무지 제정신인가 의심될 정도로 말이다.

태평맹이 아미파를 모욕하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지심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안하무인이었다.

지심이 화를 내자 공손연은 상을 엎으며 서슴없이 칼을 빼 들었다.

강호 무림에서 먼저 칼을 들었다는 의미는 분명했다.

상대에게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심이 그의 팔을 자른 건 오히려 자비라 해야 할 것이다.

“네, 네년을 내 반드시…….”

악에 받힌 목소리로 공손연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팍.

공손연의 뒤에 서 있던 중년인이 손을 썼다.

혈을 가격당한 공손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털썩.

공손연이 쓰러지자 중년인은 호위무사들에게 말했다.

“모셔라.”

호위무사들은 즉시 공손연의 상처를 지혈하고 잘린 팔을 수습했다.

그리고 공손연을 안고 기루 밖으로 사라졌다.

중년인은 그 모습을 지켜본 후, 지심에게 고개를 돌렸다.

“과연 십이선사다운 솜씨입니다.”

피비린내가 여전히 가득했지만 중년인은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심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는…….”

“조심하게, 사매.”

뒤에 있던 혜령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범상한 자가 아닐세.”

그녀의 손은 이미 검 손잡이에 가 닿아 있었다.

“두 분께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중년인은 가볍게 조소를 흘렸다.

“허나 태평맹을 대표하여 나온 사람을, 그것도 협상을 위해 마주 앉은 자리에서 팔을 자르셨으니……. 쯧.”

고개를 저은 중년인은 혀를 찼다.

“아무리 아미파라지만 지나친 폭거가 아닙니까?”

“흥.”

지심은 코웃음을 흘렸다.

“협상을 위해 마주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아미를 능멸하고서도 말이냐? 게다가 이것!”

쉭.

지심의 검이 술병을 그었다.

자기로 된 술병이 놀랄 정도로 간단히 잘리며 향기로운 술이 흘러나왔다.

“너희가 여기에 장난을 친 걸 내가 모를 것 같았더냐?”

“술에 무엇이 있건 무슨 상관입니까? 술도 마시지 않는 분들께서 말입니다.”

휙.

중년인이 손을 저었다.

퍽.

술 병이 그대로 박살 나며 술이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중요한 건 아미파 십이선사께서 태평맹 중직자의 팔을 자르셨다는 것이지요.”

지심을 똑바로 쳐다보며 중년인이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셔야 할 겁니다.”

“나 또한 말하지.”

지심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아미를 모욕한 죄는 그깟 팔 하나로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평맹이 이에 대해 사죄하지 않으면, 아미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옆에 선 혜령의 눈빛 역시 지심 사태와 같았다.

아미가 모욕을 당하는데 십이선사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랴?

“후후후. 좋습니다.”

중년인은 웃었다.

그의 입가에 흐르는 것은 비릿한 조소였다.

“그럼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도록 하지요.”

중년인과 지심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물러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두 사람 모두 물러설 수 없었다.

***

아미파가 공손연의 팔을 잘랐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북해일문과 문주의 미모로 떠들썩하던 성도는 단번에 아미파 문제로 달아올랐다.

누군가는 태평맹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미파가 경솔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미파의 편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팔을 잘린 쪽이 태평맹이었던 데다가, 성도는 이미 태평맹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아미파는 태평맹에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했다.

물론 태평맹은 단호히 거부했다.

아미파와 태평맹의 분쟁은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그 밖의 모든 문제들은 뒤로 밀려났다.

갑자기 나타난 북해일문의 정체나, 협의도 없이 그들을 소개한 당설련의 결정, 그리고 창룡검주에 대한 것들 역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태평맹 총단, 당설련의 집무실.

“군사님.”

수하의 목소리에 당설련은 고개를 들었다.

“긴급 가주회의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과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듣지 않아도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아미파에 대한 제재가 찬성 여섯, 반대 하나로 결의되었습니다.”

“반대?”

당설련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네. 모용세가의 가주가 반대를 표명하였습니다.”

“이유는?”

“이 일은 어디까지나 아미파와 공손세가의 문제라는 이유입니다. 허나 제재가 통과된 이상 참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흐음.”

당설련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석연치 않은데?’

모용세가는 아미파에 아무런 연관도, 은원도 없다.

거리로는 수천 리나 차이가 난다.

공손세가의 원망과 맹 내의 평판 하락을 감수해 가며 반대할 이유가 없다.

“최근 모용세가의 움직임에 특이한 것이 있었나?”

“없습니다.”

“그와 접촉한 흔적은?”

‘그’는 바로 창룡검주 운현이다.

언제나 정확한 당설련이 막연히 ‘그’라고만 부르는 사람은 오직 운현뿐이었다.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당문이 찾지 못할 정도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가 보낸 연락은? 어디로, 어떤 내용을 보냈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했어?”

마지막 연회가 열리던 날 아침, 운현은 안찰사를 통해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아마도 도찰원에 보내는 보고라 추정되었지만 확실할 수는 없었다.

지방 대관들 역시 운현의 존재에 잔뜩 몸을 사리고 있었던지라 평소같은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리라 보입니다.”

사천성을 벗어나면 당문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든다.

더군다나 중앙 조정의 도찰원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뭘 하려는 거지?’

당설련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운현.’

그녀는 결코 운현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절대의 고수이자 당대의 영웅이라고 한 건 그녀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다만 경외의 감정을 담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그가 아미파와 접촉한 흔적은?”

“없습니다.”

대답은 주저 없이 나왔다.

아미파의 움직임은 지난 석 달 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설련은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당설련은 마음을 굳혔다.

“계획대로 시행해.”

수하를 향해 당설련은 말했다.

“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관의 내부 정보도 계속 찾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수하는 고개를 숙이곤 즉시 집무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당설련은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시작이야.”

이제부터 정말로 시작이었다.

그녀와 당문, 그리고 태평맹의 새로운 시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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