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창룡맹 임시 총단
강호 무림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바로 무당파 속가제자들이 영웅맹 무한 지부를 쫓아냈다는 사실이었다.
그 소문은 말 그대로 폭풍처럼 강호 무림을 강타했다.
장강이 영웅맹의 세상이 된 이후 영웅맹의 지부가 무너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장강의 대도시 무한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크게 반기면서도 과연 영웅맹이 어떻게 나올지 주목했다.
아무리 무당파가 연관되어 있다 하더라도 철혈사왕 염중부가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전해진, 창룡맹이 임시 총단을 무한에 마련했다는 소문은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강호 무림의 시선은 온통 무한을 향해 쏠리고 있었다.
사천성 성도.
태평맹 총단, 대외 총괄군사 집무실.
“창룡맹 임시 총단이라고?”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이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수하가 정중하게 답했다.
“따로 총단 건물을 지은 것도, 정식으로 현판을 올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총단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지. 어느 조직이건 지도부는 있어야 할 테니까.”
당설련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곳에 맹주 운현도, 총군사 영호준도 있을 것이다.
침묵하던 당설련이 문득 수하에게 물었다.
“영웅맹은?”
“영웅맹은 무한에 전대 거마 열 명을 보내려던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그럴 수밖에. 상대가 무당파의 고수라면 뒷일을 생각지 않고 일단 저지를 수 있겠지만, 창룡맹의 맹주라면 그건 자살행위니까.”
운현의 무공이 어떠한지 당설련은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그건 철혈사왕 염중부 역시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전대 거마들이라 해도 운현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허나 영웅맹이 무한을 포기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곧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항주에 가득합니다. 영웅맹 모든 지부에 내렸던 총동원령 역시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지부 총동원령을 취소하지 않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수하는 말을 이었다.
“다만 일부 내용은 조정되었습니다. 집결 날짜가 정해졌고, 무한 인근에 산개한 상태로 대기하도록 명이 내려졌습니다.”
바스락.
당설련은 서탁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에는 영웅맹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예전 무림맹이 무너질 때처럼 대규모 무장 집단이 움직이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영웅맹 각 지부는 최대한 소규모로 나뉘어서 이동하여, 무한 인근에 흩어져 대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당설련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그냥 물러설 철혈사왕이 아니지.”
당설련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쳤다.
그녀가 생각에 잠길 때 하는 버릇이었다.
“총괄군사님.”
문득 수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기회에 중경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경은 장강 상류의 핵심 교역지다.
만일 중경을 장악한다면 당문과 태평맹도 장강 교역에 당당히 한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좋지 않아.”
당설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무한 지부가 무너지니까 영웅맹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잖아. 그 칼날을 우리에게로 돌리자는 거야?”
매서운 눈빛으로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설령 중경을 도모한다 해도 그건 영웅맹이 무너진 다음이야. 그런 헛소리를 할 거면 당장 그만둬.”
그녀의 반응은 사뭇 날카로웠다.
“죄송합니다.”
수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설련은 수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희미한 미소가 당설련의 입술에 떠올랐다.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네. 다들 그 가능성을 떠올릴 테니까.”
“네?”
수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달칵.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탁에 지도를 펼쳤다.
촤락.
강남의 지도가 당설련과 수하의 눈 아래 펼쳐졌다.
당문이 있는 사천성, 장강 상류의 중심 교역 도시 중경, 그리고 그 너머의 지역들을 살펴보던 당설련이 미소를 지었다.
“혁련세가와 공손세가에 전해.”
당설련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긴급히 상의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 가주, 혹은 전권을 쥔 가주 대행과 은밀히 만나기 원한다고 말이야.”
“혁련세가와 공손세가만입니까?”
다른 세가들을 제외하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다.
수하가 재차 물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 혁련세가와 공손세가만.”
당설련은 자신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 될 거야.”
가늘게 웃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
무한 외곽, 창룡맹 임시 총단.
옛스러운 멋이 풍기는 커다란 저택 앞에서 진예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가 총단이라고요?”
저택은 제법 크고 고아한 풍취가 있었다.
하지만 맹의 총단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현판조차 달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큰 저택으로 보일 정도였다.
영호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임시 총단이라오. 소저가 임시 부총군사인 것처럼 말이오.”
진예림은 한숨을 쉬었다.
“그 임시 부총군사라는 직함은 대체 뭐예요? 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감투를 씌운 거죠?”
“총군사인 내가 한 거요. 임시를 떼고 싶었지만 맹주님께서 소저 본인의 승낙 없이는 안 된다고 하셔서……. 일단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인데 우리 맹주님은 너무 고지식하시다니까?”
“그건 총군사님이 잘못된 거죠. 맹주님이 옳은 거고요.”
영호준은 듣는 둥 마는 둥 말을 이었다.
“여하튼 당분간 소저는 손님들을 맡아 주시오. 대강 살펴보고 협력 문파로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만 결정하면 되니까.”
“협력 문파요?”
처음 듣는 말에 진예림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맹주님은 창룡맹이 더 커지는 걸 바라지 않으시더군. 대부분의 문파들과는 협력 관계를 맺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소. 창룡맹이 또 다른 무림맹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오.”
진예림은 눈을 반짝였다.
과거 무림맹은 강호 무림에 ‘무림맹 체제’라는 단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 힘으로 정사대전을 끝내고 혼란을 수습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 나타난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중소 무관의 딸로 자라난 진예림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맹주님이시네요. 그럼 저는 그런 신청을 검토하고 정리해서 총군사님께 올리면 되나요?”
“올리긴 뭘 올린단 말이오?”
“네?”
진예림의 반문에 영호준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소저더러 결정하라고 말했지 않소? 소저가 도장을 찍으면 그때부터 협력 문파인 거고, 안 찍으면 아닌 거요. 영 결정하기 애매하면 내게 가져와도 되지만.”
그 말에 진예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제게 그런 권한을 준다고요? 창룡맹의 협력 문파를 결정하는 권한을요?”
“가맹도 아니고 협력인데 뭘 그리 놀라오? 그리고 맹주님께서 말씀하셨소. 일을 맡겨 놓고 권한을 안 주면 그냥 고생시키는 것밖에 안 된다고. 직무에 걸맞은 권한을 준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러나 진예림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아니, 하지만 나는 명문세가 출신도 아닌데 그런 중책을…….”
“실력은 이미 입증된 것 아니오? 아미와 남궁세가에서 창룡맹 지부도 조직했고.”
진예림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그렇긴 하지만 그건 마땅히 할 사람이 없어서였다.
이제 창룡맹에는 소림, 화산, 무당, 아미를 비롯해서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북해일문까지 있다.
그런 쟁쟁한 인재들을 제치고 자신이 중책을 맡다니?
‘임시 부총군사’라는 직함이 새삼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뭐, 소저보다 잘난 인재가 들어왔다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얼른 업무를 넘겨 버리시오.”
영호준의 말에 진예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생각보다 빨리 사직하게 되겠네요.”
“사직이라니?”
눈살을 찌푸리며 영호준이 말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사직이오? 다른 부서로 가야지. 아 참, 항주의 친구들은 만나 봤소? 요즘은 무당파 속가제자들과 어울린다고 하더군.”
아미에 있던 항주 무관의 젊은 정예들은 일찌감치 와서 임시 총단을 지키고 있었다.
무당파 속가제자들이 창룡맹에 대단히 호의적인 덕분에, 그들은 서로 어울리며 친분을 쌓아 가고 있었다.
“……잘됐네요.”
자신에게 그럴 시간이 없으리란 걸 잘 아는 진예림은 덤덤하게 답했다.
“자, 어서 가서 쌓인 서찰들을 살펴보고 기본적인 조사도 해 보시오. 아주 한가득이니까.”
“서찰이라니요?”
진예림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서찰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영호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 무한에 창룡맹 임시 총단이 있다는 소문이 나는 바람에 지금 다들 난리가 아니라오. 벌써부터 가맹을 희망하는 문파들은 물론이고, 아무 조건 없이 꼭 한 번만 뵙고 싶다는 사람들까지 아주 서찰이 넘쳐나고 있소.”
본래 누군가를 방문할 때는 미리 배첩을 보내는 것이 예의다.
덕분에 지금 임시 총단에는 표국 사람들이 전해 주는 서찰이 엄청나게 쌓이고 있었다.
진예림은 한숨을 쉬었다.
“오자마자 반기는 게 일거리라니……. 월봉은 많이 줄 건가요?”
“많이 주다 뿐이오? 녹봉도 꼬박꼬박 챙겨 줄 테니 걱정 마시오. 알다시피 우리 창룡맹이 재정 하나는 아주 튼튼하지 않소?”
조정의 실세는 물론이고 거대 문파들이 후원하는데 재정이 부족할 리가 없다.
“이 기회에 혼인 자금 모은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시오. 청춘은 한때지만 돈은 아주 오래간다오. 진예림 부총군사.”
영호준은 활짝 웃었다.
잘생긴 그가 웃는 모습은 보기에도 흐뭇했지만 진예림에겐 그 웃음조차 얄밉기만 했다.
***
며칠 후, 한 사람이 창룡맹 임시 총단을 찾아왔다.
방문을 알리는 서찰도 없었고 소개장도 가지지 않았지만 진예림은 그를 맹주, 운현에게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제갈세가의 귀공자, 제갈기호였기 때문이다.
“아주 반갑습니다, 운 서기님. 아니 이젠 맹주님이시지요. 하하하하.”
제갈기호는 커다란 몸집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한때 운현과 함께 북해에 다녀왔으며 지금은 태평맹 대내 총괄군사인 그가 직접 창룡맹 임시 총단을 방문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운현은 웃으며 제갈기호를 맞이했다.
제갈기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앉으시지요.”
자리를 권하는 운현의 말에 제갈기호는 넉살 좋게 털썩 앉았다.
손님을 위해 운현은 새로 차를 내왔다.
따뜻한 물은 이미 있었기에 준비는 금방이었다.
또르륵.
운현은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오, 향이 좋군요.”
제갈기호는 찻잔을 들었다.
향을 음미하던 그는 집무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말했다.
“맹주님의 집무실은 마치 서재 같네요.”
운현의 집무실은 서책과 묵향이 가득해서 조용하고 단아한 정취가 흘렀다.
“물론 저는 별로지만요. 책을 안 좋아하거든요. 하하하.”
호탕한 제갈기호의 웃음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제갈기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차를 슬쩍 음미한 제갈기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지긋이 운현을 바라보며 제갈기호가 물었다.
“제가 왜 왔는지 아시겠습니까?”
“네.”
운현은 찻잔을 든 채 대답했다.
“제갈세가가 창룡맹에 가맹하겠다는 뜻을 전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그건 언뜻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문과 함께 태평맹의 기둥인 제갈세가가 창룡맹에 가맹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제갈기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운현은 가만히 웃으며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북해일문은 창룡맹에 가맹했습니다. 이미 강북의 대세가 정해진 데다가, 태평맹이 앞으로 강남으로 향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상황인 제갈세가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요?”
운현은 제갈기호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