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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86화 (386/530)

386화. 영웅맹의 끝

암천무제와 비련은 염중부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러나 길 위에는 염중부가 남기고 간 것들로 가득했다.

이대로 그냥 떠날 수도 없는지라, 운현은 우선 마부들을 깨우기로 했다.

“어라? 대체 어떻게 된…….”

먼저 깨어난 십여 명의 마부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마차를 몰다 잠이 든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고 일어나니 바뀌어 버린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여전히 죽은 듯 잠에 빠져 있는 동료 마부들과 철혈대의 모습은 이것이 착각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갑자기 미안합니다만, 항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네? 하, 항주로요?”

마부들은 머뭇거렸다.

염중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낯선 문사 차림의 청년이 이렇게 말하니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항주를 떠나올 때 아예 영웅맹 총단을 불태우지 않았던가?

마부들이 주저한 것도 당연했다.

“저, 저기 무, 무사님들이 깨어나시면…….”

“괜찮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마부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깨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항주로 돌아가 관아에 넘길 것이니 마차에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마부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게다가 독선과 검성이 풍기는 위압감만으로도 마부들은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아, 알겠습니다.”

결국 마부들은 독선과 검성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독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르신.”

독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머지 마부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스륵. 슥.

“으음, 여기가 어디…….”

그 모습에 마부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들었던 마부들은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격전 중에 휩쓸려 조금 다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마저 찰과상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도 철혈대는 단 한 사람도 깨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마부들은 부서진 마차를 치우고 짐을 다시 나눠 실었다.

길 위에 나뒹구는 금은보화가 그들의 탐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검성과 독선의 기세만으로도 마부들은 딴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변이 정리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검성은 여전히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운현이 신승 불영의 죽음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음.”

검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침묵하는 검성의 모습은 그 역시 신승의 죽음에 초연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나온 수많은 격동의 시간들이 있는데 어찌 무심할 수가 있을까?

독선 역시 그런 검성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스락, 덜컹, 쿵.

조금은 소란스러워진 길 위에서, 운현은 검성과 함께 조용히 신승 불영을 추모했다.

***

방향을 튼 짐마차의 행렬이 항주에 도착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영웅맹 총단의 불은 자연적으로 꺼졌다.

본래 무림맹이 무너진 터 위에 서둘러 지어 올린 건물들이라 구조가 부실한 탓에 오히려 쉽게 불이 꺼진 것이다.

위세 등등한 영웅맹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있을 리도 없어서 화재가 번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운현이 돌아왔을 때 영웅맹 총단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밝아 오는 동편 하늘 아래 희미한 연기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이구.”

“허어, 정말로 다 타 버렸네.”

모여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폐허가 된 영웅맹 총단을 바라보았다.

한 밤의 화재에 놀란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경악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혹시 예전의 난리가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그사이로 운현과 쉰 대에 가까운 마차, 그리고 백여 마리에 이르는 말들의 행렬이 들어왔다.

“맹주님! 여기요!”

마부와 함께 타고 있던 운현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담소하를 보았다.

그 옆에는 놀란 표정의 진예림도 있었다.

‘혹시 일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총군사 영호준이 동행시켰는데, 안전을 위해 항주에 남아 있도록 했던 것이다.

“와아, 이게 다 뭔가요?”

담소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부서진 마차들을 제외하고도 짐마차는 쉰 대에 이르렀다.

“염중부는요?”

진예림이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옆에 있던 이들이 기겁을 하며 움찔했지만 진예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이제 없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침묵하는 사람들 사이로 운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영웅맹도 더 이상 없습니다.”

“헉!”

사람들은 경악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아무리 불에 탔다지만 영웅맹 총단 앞에서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부총군사님. 이자들과 이 짐들을 관아에 넘겨주십시오.”

운현이 말한 자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철혈대주와 철혈대였다.

그리고 이 짐마차에 실린 것들은, 따지자면 범죄 행위로 인해 발생한 이득이다.

당연히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 옳았다.

“알았어요.”

진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세한 상황을 도찰원에도 보고하겠어요. 이곳 포정사나 안찰사가 단독으로 이런 문제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진예림의 판단은 정확했다.

영웅맹은 항주만의 문제가 아닌 데다, 운현은 조정에서 임명한 특별감찰어사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맡기도록 하지요.”

운현은 마차에서 내렸다.

진예림이 즉시 마부들과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담소하는 독선과 검성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저벅.

운현은 천천히 영웅맹으로 걸어갔다.

매캐한 냄새가 사방에 자욱하고 이곳저곳에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탁.

무너져 내린 영웅맹 현판의 잔해 앞에서 운현은 걸음을 멈췄다.

갖가지 상념이 운현의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북해의 소궁주와 함께 찾아온 이곳에서 운현은 많은 사람을 만났다.

검성은 물론이고 모용미도, 영호준도, 남해검문의 파진한도, 남궁세가의 남궁비연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용봉지회를 지켜보며 때로는 감탄하기도 했고 소위 후기지수들의 행태에 분노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신승 불영을 만났다.

그 독특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운현의 목숨을 구해 준 신승은 벌써 가고 없다.

남은 것은 눈앞에 가득한 잔해들처럼, 이미 사라진 과거의 추억들뿐이다.

운현의 가슴에 바람이 불었다.

“……잘했다.”

문득 들린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독선이 뒤에 서 있었다.

“불영도 기뻐했을 것이다. 늦게 얻은 사제가 기특하지 않냐며 내게 실컷 자랑했겠지.”

“그래.”

검성 역시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니까.”

담담한 두 사람의 목소리는 운현의 가슴을 울렸다.

“……네, 그런 분이시니까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사락.

밝아 오는 아침 햇살 아래, 한때 위세높던 영웅맹 총단의 잔해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이제 한 가지 일이 끝났다는 것을 운현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

섬서성, 한중.

한중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고도(古都)이자 사천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곳 한중의 다루 최상층에서 북해일문의 대궁주는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북해십이비인 빙설과 빙혼, 그리고 소궁주도 함께였다.

슥.

문득 빙혼이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이곳 다루의 지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년의 지배인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어느 분께서 자리를 함께 하기 원하십니다.”

“그런 요청은.”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궁주가 말했다.

“모두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요?”

대궁주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은 허다했다.

가문과 지위를 믿고, 혹은 위세를 부리며 합석을 요청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곳 다루의 최상층을 전부 빌린 것도 그런 사람들에게 방해받기 싫어서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지배인은 정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허나 이분은…….”

“나예요.”

자박.

지배인의 말을 끊으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화려한 옷을 입고 매서운 눈매를 가진 그녀는 바로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 당설련이었다.

대궁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당설련이 말했다.

“그래도 거절할 건가요?”

대궁주 옆에서 차를 마시던 소궁주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대궁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른 분도 아니고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님을 어찌 박대할 수 있겠어요?”

미소를 지으며 대궁주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당설련은 놓치지 않았다.

사락.

대궁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시면 이리로 오시지요. 이곳의 경치가 꽤나 아름답거든요.”

“고마워요.”

당설련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박, 사박.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간 당설련이 자리에 앉았다.

대궁주가 권한 자리는 그녀의 맞은편이었다.

지배인이 고개를 숙인 후 나가고, 시녀가 들어와 당설련 앞에 찻잔을 놓았다.

또르륵.

찻잔이 채워지며 부드러운 향이 피어올랐다.

밤새 달려온 당설련에게는 더없는 유혹이었지만, 당설련은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내내 대궁주를 향해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시지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궁주가 말했다.

“공사다망하신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께서 이곳 한중까지 오시다니요.”

“잠시 들렀을 뿐예요.”

당설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에게 한중은 바로 앞마당 같은 곳이니까요.”

사천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의미에서 당설련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잠시 들를 정도로 가까운 곳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문주께서는 어쩐 일이실까요? 태원에서 이곳은 제법 먼 길이었을 텐데요?”

당설련의 시선은 사뭇 매서웠다.

그러나 대궁주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북해에서 이 정도 거리는 가벼운 나들이에 불과하지요.”

대궁주는 찻잔을 든 채 말을 이었다.

“한중의 풍광이 유명하다기에 잠시 보러 온 것뿐이랍니다.”

북해의 사람들은 기마에 매우 능하다.

하지만 잠시 보러 왔다기엔 지나치게 먼 거리였다.

“후훗. 잠시 보러 왔다니……. 백여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서 말인가요?”

대궁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도 이곳 다루의 일층은 북해일문 무사들이 가득했다.

아마도 당설련의 호위 무사들과 한창 기싸움을 하고 있으리라.

“무사들에게도 기분 전환은 필요하지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궁주가 말했다.

“아니면, 설마 이곳에서는 나들이조차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건가요?”

“그럴 리는 없지요.”

당설련이 대답했다.

“허나 칼을 찬 무사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면 누구라도 주시하기 마련이에요. 더구나 그들이 북해의 이민족이라면…….”

그녀의 표정에 미소는 더 이상 없었다.

“대로에서 칼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말하는 당설련의 눈동자는 살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궁주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가요?”

대궁주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 사람들은 온순하네요. 만일 북해에서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말을 했다면.”

당설련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궁주는 말했다.

“지금 당장 목이 잘렸을 테니까요.”

두 여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마주쳤다. 마치 불꽃이라도 튈 듯한 분위기였다.

“흥.”

당설련이 나지막이 코웃음을 흘렸다.

달칵.

자리에서 일어난 당설련이 대궁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만 가 봐야겠군요. 말씀하셨듯이 일이 바빠서요.”

“그러시지요.”

대궁주는 찻잔을 들었다.

일어선 당설련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배웅은 하지 않겠어요.”

슥.

대궁주는 아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지만 곧 몸을 돌렸다.

자박, 자박. 탁.

사뭇 거친 기세로 당설련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대궁주는 조소를 머금었다.

배후를 찔리는 것은 모든 모사들이, 특히 당설련 같은 사람은 더더욱 꺼리는 일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당문의 전력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저 이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북해일문은 견제의 역할을 훌륭히 완수한 것이다.

“……저기, 언니.”

소궁주의 목소리에 대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귀여운 소궁주가 주저하며 말했다.

“진짜 그냥 보고만 갈 거야? 나 여기서 사고 싶은 것도 있는데…….”

아마도 소궁주는 조금 전의 대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 듯했다.

“괜찮아.”

대궁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껏 사렴.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도 사. 시간은 많으니까.”

“정말? 고마워, 언니!”

소궁주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대궁주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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