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공명(共鳴)
운현은 일은을 바라보았다.
일은의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소중한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말도, 일대상인을 어떻게든 해 주겠다는 말도 결코 농담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저 운현이 검에 집중하게 하려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은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 말의 무게는 남다르다.
무엇보다 일은이 방금 한 말이 운현의 가슴을 크게 울리고 있었다.
―자네가 바로 검의 주인일세. 창룡검주(蒼龍劍主).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알겠습니다.”
일은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 들린 소검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슥.
운현은 검을 늘어뜨린 채 가볍게 눈을 감았다.
침묵이 흘렀다.
일은도, 그리고 객옹도 운현을 주시했다.
사락.
문득 운현이 서 있는 곳 주변의 풀잎이 흔들렸다.
마치 약한 바람이라도 지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풀잎의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 흔들림은 점차 주위의 나뭇가지로 번져 갔다.
쏴아아.
바람도 없는데 사방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혹은 기뻐하듯.
그리고 운현이 눈을 떴다.
번쩍.
객옹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운현의 눈빛은 차갑게 메말라 있었다.
마치 미명의 서늘한 칼날처럼.
스륵.
운현의 시선이 일은을 향했다.
일은은 굳은 표정으로 한 손을 옆으로 뻗었다.
피이이잉.
사방에서 섬뜩한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소음을 내며 허공에 떠 있는 그것은 철전이었다.
초록빛 기운을 머금고 맹렬하게 회전하는 철전들이 운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휙.
일은은 손가락 둘을 모아 검결지를 취했다.
그리고 즉시 운현을 향해 내뻗었다.
피피피픽.
십여 개의 철전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섬뜩한 독기공을 머금은 그 철전들은 단 하나만으로도 운현을 능히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운현의 서늘한 눈빛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슥.
운현이 자신의 검, 미명을 들어 올렸다.
미명의 아름다운 칼날이 서늘하게 빛을 뿜었다.
그리고 운현은 미명을 휘둘렀다.
마치 검을 시험해 보듯 가볍게.
쉭.
객옹은 눈을 부릅떴다.
날카로운 충격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운현의 검이 가르고 지나는 곳마다 철전들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일은은 운현을 향해 크게 팔을 휘둘렀다.
파바바박.
무수한 철전이 그의 소맷자락에서 쏟아져 나왔다.
운현은 몸을 돌리며 미명을 그어 갔다.
후웅.
철전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운현의 검은 끊임없이 허공을 노닐었다.
부드럽고 우아하기까지 한 그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검무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운현의 검이 허공을 지날 때마다, 독기공의 기세를 품은 철전들은 여지없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파바바바박.
날카롭게 잘린 철전들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철 조각의 폭풍이 순식간에 주위를 휩쓸었다.
퍽, 파박.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커다란 둥치에 철전 조각이 박혀 들었다.
철 조각은 객옹을 향해서도 날아갔다.
탁.
객옹의 손끝에 철전 조각이 잡혔다.
그 조각을 들어 올린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리하게 잘린 철전 조각에 독기공의 기운은 더 이상 없었다.
운현이 베어 버린 것은 그저 철전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픽, 피익.
철전 조각이 날아올 때마다 객옹은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날벌레라도 쫓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튀어 나가는 것은 날카로운 철전 조각이었다.
‘으음.’
운현을 지켜보는 객옹의 눈빛은 사뭇 심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은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일은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제대로 망한 것 같군.”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이든, 어떻게든 책임지겠다던 일은이 ‘망한 것 같다’라니?
휙.
일은은 자신의 소검을 날렸다.
쌔액.
초록색 기운을 머금은 소검은 운현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갔다.
그러나 운현은 자신의 검무를 멈추지 않았다.
서걱.
소검은 운현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지나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휘리릭.
소검은 크게 원을 그리며 위로 솟았다.
그리고 운현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칼끝을 아래로 향하고 멈춰 섰다.
운현은 고개를 들어 소검을 보았다.
그를 향해 쏟아지던 철전은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사방에 흩어진 철전 조각들 뿐.
“하아!”
일은이 크게 외치며 검결지를 내리그었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소검이 운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후욱.
소검에 담긴 내력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운현은 피하지 않았다.
휘릭.
그는 한 바퀴 몸을 돌리며 미명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쩌엉.
마치 거대한 무엇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명과 소검은 운현의 머리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우우웅.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끝을 마주한 채 첨예하게 힘을 겨루고 있었다.
본래라면 애초에 힘을 겨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은의 소검이 초록빛 독기공을 머금은 반면, 운현의 미명은 그저 서늘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소검은 미명을 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두 자루의 검이 맞서는 상황에서도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희미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독선!”
일은은 검결지를 운현에게 향한 채 말했다.
“뭐하나! 도와라!”
객옹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어서!”
“흥!”
일은의 재촉에 객옹은 코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일은의 소검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락.
객옹의 소맷자락이 펄럭이고 그의 두 손이 운현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엄지와 중지가 소리를 냈다.
따닥.
파바바바박.
날카로운 기운이 운현을 향해 쏘아져 갔다.
소리는 분명 두 번이었으나 운현을 향해 짓쳐 드는 기운은 열둘이었다.
붉은 꽃잎이 휘날리듯 상대의 피를 뿌리는 객옹의 절기, 바로 난홍십이엽이다.
카앙.
일은의 소검이 결국 튕겨 나가고 운현은 난홍십이엽을 향해 미명을 휘둘렀다.
쉬릭.
허공을 베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웃!’
객옹조차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운현은 난홍십이엽을 막아 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운현의 검에는 아무런 기운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운현은 난홍십이엽을, 막아 낸 것도 아니고 아예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스륵.
운현의 서늘한 시선이 객옹을 향했다.
객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을 객옹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더없이 서늘하고 무감각한 눈동자.
그것은 다름 아닌 일대상인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키이이잉.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빛에 휩싸인 소검이 운현에게 짓쳐 들었다.
그것은 운현의 예검을 버텨 냈다던 일은의 절기, 월하유성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검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운현은 두 손가락을 모아 검결지를 취한 후 앞으로 뻗었다.
콰과과곽.
일은의 절기는 운현의 무력한 손을 그대로 부숴 버릴 듯했다.
하지만 운현의 손끝이 일은의 소검과 닿는다 싶은 순간.
슥.
운현은 검결지를 그대로 옆으로 밀었다.
그와 함께 월하유성도 운현의 손을 따라 거짓말처럼 움직여 갔다.
빛을 뿜는 소검이 운현을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운현은 손을 거두었다.
콰아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흙이 튀어오르고 나무들이 폭풍에 휩싸인 듯 흔들렸다.
운현의 머리카락과 옷자락도 거칠게 펄럭였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저벅.
운현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였군.”
일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운현은 일은이 검결지로 자신의 검을 흘려 낸 것을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일은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객옹에게 물었다.
“원래 이놈이 이렇게 뒤끝이 있었던가?”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니지.”
일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도 고생이군.”
객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딱.
쉬쉬쉬쉭.
난홍십이엽이 운현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일은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파바박.
허공에 뜬 일은에게서 철전이 쏟아져 나왔다.
난홍십이엽과 철전이 사방에서 운현을 노리고 짓쳐 들었지만 운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쉭.
운현은 비스듬히 왼쪽으로 미명을 그어 올렸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철전이 조각났다.
휘릭.
이어서 펼쳐 낸 운현의 일검에 난홍십이엽의 기운이 사라졌다.
난홍십이엽과 철전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그사이, 일은은 객옹 옆에 내려설 수 있었다.
탁.
“무사히 넘어가긴 힘들겠군.”
일은이 중얼거렸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다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더냐?”
“내가 언제? 그런 말 한 적 없다.”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일은이 책임지겠다고 한 것은 운현이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안전과 일대상인이다.
운현을 책임지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버텨야지.”
일은이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놈이 돌아올 때까지.”
“그게 무슨…….”
“나는 못 믿어도 저놈은 믿지?”
객옹은 답하지 않았다.
일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기다려라. 반드시 돌아올 테니.”
객옹은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다음이다.
“네 절기가 뭐였지? 무슨 나비였는데…….”
“천향접이다.”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허나 현이에겐 통하지 않는다.”
운현은 이미 천향접을 깨트렸다.
난홍십이엽을 충격조차 없이 소멸시킨 것을 보면 결과는 뻔했다.
“글쎄? 해 보기 전엔 모르지. 적어도 시간은 벌어 줄 테고.”
“내 절기를 고작 시간 벌이에 쓴단 말이냐?”
투덜거리면서도 객옹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객옹의 손끝에 독기공이 모여들고 허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일은이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무슨!”
“멈추지 마라.”
우우우웅.
객옹은 눈을 부릅떴다.
자신과 일은의 독기공이 공명(共鳴)하고 있었다.
분명히 서로 다른 두 독기공이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우웅, 우웅, 우웅.
허공이 일그러지며 나지막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천향접이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게 해 달라고.
‘이, 이럴 수가…….’
객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슥.
운현이 미명을 들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눈빛은 지금까지와 달리 희미한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