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총회합의 날
호남성 악양, 일충현 본가.
아침 식사를 마친 운현은 일행과 함께 차를 마셨다.
총군사 영호준과 운현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감찰어사 조관 역시 쌍검문과 호암상단에 대한 처우를 전했다.
그리고 일아영은 내내 말없이 차를 홀짝이며 운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결국 운현이 물었다.
일아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이구나 싶어서요. 운 숙부가 창룡맹 맹주에다가 특별감찰어사라니…….”
한숨을 푹 내쉬고 일아영은 말했다.
“세상에 누가 그걸 믿겠어요?”
그녀의 눈에 여전히 운현은 조용한 성품의 문사였다.
처음과 달라진 점이라면 눈빛에 주저함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다.
“아,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운 숙부가 변하지 않은 게 저는 더 좋으니까요.”
“저도 그 점이 참 좋습니다.”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옛 책에도 이르기를 책사의 가장 큰 고민은 주군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 하니까요. 일도 힘든데 상대의 기분까지 살펴야 한다니, 얼마나 소모적인 행태입니까?”
그 말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밑에 있어 본 적이 없는 객옹은 무반응이었지만 말이다.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마침 말이 났으니 말인데, 일 소저께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저요?”
일아영이 영호준에게 반문했을 때였다.
“아가씨.”
문밖에서 노총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아영이 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달칵.
문이 열리고 노년의 총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금가장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요? 누구죠?”
“금혜린 아가씨와 능화영이라는 분입니다.”
일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혹시 운현이 불렀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우선 안으로 모시세요.”
“알겠습니다.”
노총관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일아영은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맹주님께 손님이 왔네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금혜린이 누구를 찾아왔는지도 모르는데 일아영이 저렇게 말하는 건, 반쯤은 운현을 놀리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
금혜린과 능화영은 운현을 찾아온 것이 맞았다.
객옹에게 정중한 감사를 표한 후, 금혜린은 운현과 후원에서 마주 앉았다.
함께 온 능화영은 신기한 듯 후원을 이리저리 돌아보고 있었다.
“호암상단의 내정총관이 거래를 제의했어요.”
금혜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암상단의 내정총관 이학붕은 파격적인 거래를 제안했다.
금가장에 매년 큰돈을 지원하는 대신 호암상단의 의뢰를 최우선으로 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전이라면 기꺼이 환영할 만한 제안이었지만 호암상단은 이미 금가장을 삼킬 욕심을 드러냈다.
당연히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선 운 공자의 의견을 들어 보자고 하시더군요.”
의견을 듣는다지만 사실 결정권을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주인 금사열은 일충현의 의제인 운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그건 금가장의 운영을 틀어쥐겠다는 소리군요.”
옆에 있던 영호준이 말했다.
조관과 항장익, 담소하는 관아로 떠나고 영호준과 일아영, 객옹만 운현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리되면 금가장 자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됩니다. 사실상 호암상단에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의를 거절하면 호남성에서 발붙일 곳조차 없게 될 테니, 진퇴양난이군요.”
영호준의 분석은 정확했다.
하지만 금혜린은 사뭇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저기, 영호준 대협이라 하셨던가요?”
영호준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 화산의 제자이며, 과분하게도 매화검이라는 명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생긴 영호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지만 금혜린의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능화영이 반응했다.
“매화검? 자네가 화산의 매화검이란 말인가?”
그녀는 눈을 빛내며 영호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화산이 아무에게나 그 명호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네. 혹시 한 수 겨뤄 볼 수 있겠나?”
“사양하겠습니다. 전 여성과는 싸우지 않거든요.”
영호준은 정중히 거절했다.
운현은 ‘영호준이 그랬었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소저의 뜻은 어떠십니까?”
운현이 금혜린에게 물었다.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신 것은 소저께서 생각하신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공자께는 숨길 수가 없네요.”
쓴웃음을 짓던 금혜린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곧 호암상단의 다음 주인을 정하는 총회합이 있어요. 내정총관이 금가장의 답변을 재촉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거고요. 사실 금가장의 운명은 누가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내정총관 이학붕의 제의를 거절했는데 그가 호암상단의 주인이 되면 금가장은 끝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호암상단의 주인이 된다 해도 금가장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호암상단의 총회합을 직접 보게 해 주세요. 그 후의 결정은 운 공자께 맡기겠어요.”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영호준이 불쑥 말했다.
“총회합 전에 태도를 명확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잘못하면 누가 호암상단의 새 주인이 되건 미운 털이 박힐 수 있거든요.”
“알고 있어요.”
금혜린은 나지막이 말했다.
총회합까지 대답을 미룬다는 건 결국 이학붕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에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기회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이에요. 비록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절 믿어 주세요. 이것이 가장 현명한, 아니 유일한 선택이에요.”
어쩌면 최악의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금혜린의 의지는 결연했다.
영호준은 흘깃 운현을 쳐다보았다.
호암상단에 대해서는 이미 운현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있는 데다 어차피 결정은 운현의 몫이다.
금가장이건, 혹은 호암상단이건 말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다만 저와 함께 총회합에 가시는 조건입니다.”
금혜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
두 손을 모은 그녀는 운현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에 꽂힌 은장식이 햇빛에 반짝이며 흔들렸다.
금혜린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의 인연을 빌미로 공자께 짐을 지움이 참으로 염치없는 짓임은 잘 알고 있어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단지 인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도 바라는 것이 있거든요.”
금혜린은 고개를 들었다.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그것이 무엇이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금혜린은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들어드리겠어요.”
그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일아영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혜린 역시 아차 싶었는지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이건 이상한 뜻이 아니라…….”
금혜린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능화영을 향했다.
그녀가 운현을 신경 쓰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능화영의 반응은 금혜린의 예상과 달랐다.
“나도 하겠네.”
능화영은 서슴없이 말했다.
“금가장의 일이 무사히 끝나면 나도 자네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설령 그, 환우……. 음. 어쨌든, 그런 자들과 싸우라 해도 말일세.”
환우오천존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그녀는 살짝 얼버무렸다.
하지만 능화영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다행이군요.”
운현은 빙긋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두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니까요.”
후룩.
느긋이 차를 음미하는 운현을 금혜린과 능화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던 객옹만 슬쩍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
호남성 장사, 호암상단 본가.
호암상단의 본가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총회합에 참석하기 위한 호암상단의 중직들과 장로들은 물론, 호암상단이 초청한 귀빈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며칠 전에 장사에 도착해서 고급 객잔에 머물고 있던 이들도 있었지만, 어제 오늘 도착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따각, 따각.
연이어 들어오는 화려한 마차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상단 사람들까지 섞여, 호암상단의 본가 정문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화려한 옷을 입고 귀빈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바로 내정총관 이학붕이였다.
본래 호암상단의 주인이 해야 할 일을 그가 나서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거 마운상단의 사무총관 아니시오?”
이학붕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상단의 일이 바쁘실 텐데 어찌 이 먼 곳까지 오셨소?”
이학붕의 말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귀빈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마운상단의 사무총관이었기 때문이다.
마운상단의 사무총관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정해지는 자리에 어찌 빠질 수가 있겠소? 우선 미리 축하드리오.”
이학붕은 그의 축하를 사양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웃음은 그들이 이미 우호관계를 맺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이 총관의 수완에 나는 참으로 감탄했소이다.”
마운상단의 사무총관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학붕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허허, 수완이라니 무슨…….”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창룡맹의 총군사를 모셔 오다니 말이오. 요즘 창룡맹에 줄을 대느라 다들 난리 아니오?”
이학붕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사무총관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도 어떻게든 만나려 했지만 아주 철벽이더이다. 대체 어떻게 하셨소?”
마운상단의 사무총관은 정말로 궁금한 듯했다.
천하에 손꼽히는 마운상단이 하지 못한 일을 호암상단이 해낸 것에는 분명 숨겨진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은밀한 거래이건, 혹은 알려지지 않은 인연이건 말이다.
하지만 이학붕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의례상 보낸 초청장에 답장이 올 줄은, 그것도 창룡맹의 총군사가 직접 참석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허허,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이학붕은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강 사무총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축하하오. 이 자리가 더욱 뜻깊게 되었으니 말이오. 나중에 총군사와 인사라도 나누게 해 주시오. 하하하.”
“걱정 마시오. 내 적극 도우리다.”
이학붕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지만 속으로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만하고 엉덩이 무거운 마운상단의 사무총관이 이곳까지 온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학붕이 방해를 한다 해도 어떻게든 창룡맹 총군사와 인사를 나눌 것이 분명했다.
“고맙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긴히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으니 말이오.”
마운상단의 사무총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학붕이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 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마운상단의 사무총관이 안으로 들어가고, 이학붕은 새삼 정문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초청에 응한 사람들의 직급이 이상하게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마운상단의 사무총관만 해도 본래는 부총관이나 실무급 인사가 올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학붕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자리가 더욱 빛날 것이니 말이다.
따각, 따각.
문득 들려온 소리에 이학붕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뭐지?’
이학붕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화려한, 눈처럼 하얀 커다란 마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이학붕뿐만 아니라 정문 앞에 북적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색 마차를 향했다.
커다란 백색 마차는 정문 앞에서 멈췄다.
달칵.
문이 열렸다.
시녀로 보이는 이가 먼저 내려서고 하얀 비단 옷을 입은 여인이 마차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헉.’
이학붕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사박.
생전 본 적 없는 대단한 미녀가 마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그 빼어난 미모는 물론이고 작은 동작 하나에도 기품이 넘쳐서, 마치 황실의 공주라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학붕은 입까지 벌리고 말을 잊었다.
북적이던 정문 앞이 한 순간 조용해진 것조차 이학붕은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