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군자(君子)와 미명(未明)
항주 외곽, 창룡맹 임시 총단 후원.
이른 아침이지만 후원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운현과 객옹, 군자검 제갈명과 비검 공손월 그리고 금화영이었다.
금화영은 차가 익숙하지 않은지 살짝 맛만 보는 정도였지만 운현과 객옹은 느긋한 표정으로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비검 공손월은 말없이 찻잔을 드는데 군자검 제갈명이 후원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맹주께서 정원을 가꾸는 방법은 조금 특이하군.”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군자검 제갈명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식의 정원 조성은 처음인데, 혹시 새로운 분파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오?”
그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원의 조성은 그저 보기 좋게 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나무를 정교하게 배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돌을 쌓아 산을 표현하거나[假山] 강과 호수를 재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도가나 불가가 말하는 선계나 혹은 대자연을 구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 이들이 있는 후원은 대단히 특이했다.
넓은 공터와 주변에 큰 나무가 몇 그루 있을 뿐, 거의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짧은 풀들이 초록빛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이래서는 정원이라기보다 그냥 야외다.
“저기, 그게 아니고…….”
“이검학이 한 짓이다.”
객옹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놈의 일검충천에 꽃도 나무도 다 날아갔지. 덕분에 보기 시원하게는 되었다만.”
군자검 제갈명과 비검 공손월의 눈이 빛났다.
“……검성께서, 일검충천을, 말입니까?”
공손월에 이어 제갈명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상대는…….”
슥.
객옹은 대답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운현을 슬쩍 눈짓했다.
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제갈명과 공손월의 시선은 운현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공손월이 감탄하는 시선인 반면, 제갈명의 눈빛은 기대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나마 중간에 멈췄기에 이 정도다.”
눈살을 찌푸리며 객옹이 말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객옹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명의 눈빛은 더욱 강해졌다.
‘중간에 멈췄다는 건…….’
그 의미는 분명했다.
검성 이검학의 일검충천으로도 비무를 끝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크흠.”
군자검 제갈명이 헛기침을 했다.
“맹주께서 제갈세가를 받아 주신 것은 깊이 감사하고 있소. 새삼스럽지만 다시 예를 표하오.”
슥.
제갈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예를 표했다.
운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를 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제갈세가가 뜻을 같이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소, 맹주.”
제갈명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또한 창룡맹은 일대 정파맹으로서 강호 무림의…….”
“서론은 그 정도면 됐다.”
달칵.
객옹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제갈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제갈명은 빙긋 웃었다.
“그야 당연히 비무입니다.”
그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운현을 돌아보며 제갈명은 말했다.
“계림에서 비검과 검을 나누셨다 들었소. 갑작스러운 청이오만, 내게도 맹주의 검을 견식 할 기회를 허락해 주시겠소?”
제갈명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제갈세가의 가주가 아닌 무인의 눈동자였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운현은 말했다.
그의 눈동자 역시 빛나고 있었다.
***
운현과 제갈명은 후원 한가운데 마주 섰다.
흰 수염을 기른 제갈명의 모습은 마치 노학자 같은 풍모였으나 그 눈빛만은 누구보다 강렬했다.
운현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하고 섰다.
쏴아아.
바람이 불며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사람들은 나를 군자검이라 하오.”
스릉.
제갈명이 검을 뽑았다.
그의 명호이기도 한 ‘군자검’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내 검이 온유하거나 자비로워서가 아니라오. 붓이 그것을 쥔 자의 뜻을 표현하듯 제갈가의 검은 제갈가의 뜻과 결의를 나타냄이니.”
햇빛 아래 반짝이는 칼날과 함께 제갈명은 말했다.
“이 칼날 앞에서는 온갖 허울과 위선이 사라지고 오직 진실한 것만 남게 되오. 마치 군자에게 덕(德)이 그러하듯 말이오. 그것이 바로 제갈가의 가주가 군자검이라 불리는 이유라오.”
운현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군자는 학식을 쌓은 문사나 신분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천명을 따라 덕을 쌓으며 지극한 도를 추구하며 사는 자가 바로 군자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차라리 무도(武道)에 가까운 단어였다.
“저는 창룡검주입니다.”
스릉.
미명을 뽑으며 운현은 말했다.
이 자리의 누가 그것을 모를까?
그러나 운현은 제갈명을 향해 말했다.
“그것은 제가 바로 창룡검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룡검을 보여 드릴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슥.
미명이 똑바로 섰다.
빛을 흩뿌리는 그 아름다운 칼날과 함께 운현은 말했다.
“오시지요.”
그건 참으로 오만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를 오라 하는 자가 천하에 또 누가 있으랴?
그러나 객옹은 물론 지켜보던 공손월과 금화영도, 그리고 마주 선 제갈명조차 그를 당연히 여겼다.
창룡검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는 창룡맹의 맹주이자 신승의 사제이며, 검성의 일검충천을 받아 낸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리다.”
슥.
제갈명이 자세를 취했다.
우웅.
비스듬히 누운 그의 검이 나지막한 울음을 흘렸다.
지켜보던 공손월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제갈명의 검에 떠오른 기운은 이미 공손월에게도 익숙했다.
그 푸른빛은 바로 검기였다.
옆에서 금화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호오. 노인네가 제법이군.”
공손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명호조차 들어 보지 못한 젊은 여인이 제갈세가 가주의 검기를 보고는 제법이라니?
하지만 그걸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훅.
군자검 제갈명이 크게 한 발을 내디디며 검을 내리그었다.
너무나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 결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쿠웅.
제갈명의 발밑에서 대지가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후욱.
운현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군자검의 기세는 마치 태산이라도 짓누를 듯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운현의 검 미명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검기는커녕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검이 짓쳐 드는 군자검을 향해 움직였다.
스륵.
그것은 마치 운현이 치명적인 오판을 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갈명은 자신의 검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이 푸른 하늘처럼 청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갈명의 판단은 옳았다.
검기를 뿜어내는 군자검과 무덤덤한 운현의 미명이 마주치는 순간.
훅.
‘헉!’
제갈명의 눈앞에서 하늘과 땅이 단번에 뒤집히고 있었다.
놀랄 틈은 없었다.
“타하!”
제갈명은 즉시 자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쿵.
자신의 두 발이 다시 땅을 딛는 순간, 제갈명의 검은 푸른 검기를 흩뿌리며 허공을 갈랐다.
부욱.
그러나 그 검로 앞에 운현은 더 이상 없었다.
‘큭.’
제갈명은 이를 악물었다.
운현은 자신의 등 뒤 저편에 서 있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라지만, 제갈명은 완벽하게 운현을 놓쳐 버린 것이다.
“으음.”
지켜보던 공손월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저랬군요.”
“저랬지.”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금화영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저게 되는 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금화영이 말했다.
객옹은 피식 웃었다.
그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당해 보면 알게 된다.”
공손월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러나 금화영은 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허어.”
제갈명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놀랍구려. 혹시 무당과 인연이 있으셨소?”
과연 제갈명의 안목은 남달랐다.
그는 운현의 한 수가 무당의 태극혜검과 같은 이치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검기를 상대로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이치야 누구든 아는 것이니까요.”
“허허.”
제갈명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이치야 누구든 아는 것. 다만 그것을 자신의 검으로 나타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깊은 회한이 섞여 있었다.
잠시 운현을 바라보던 제갈명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 비무는 오래 끌 수 없을 것 같군.”
사락.
제갈명이 자신의 검을 똑바로 세웠다.
그의 검에는 여전히 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실은 검성께 이 검을 보이고 싶었소. 허나 맹주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후우우욱.
폭풍 같은 기운이 제갈명에게서 터져 나왔다.
바람도 없는데 그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그의 손에 들린 군자검이 푸른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우우웅.
“이것이.”
푸른 기운이 일렁이는 칼날 너머로 제갈명은 말했다.
“내 전부라오.”
사락.
제갈명이 검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나 그의 검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우우우웅.
짙푸른 검기에 휩싸인 군자검은 놀랍게도 허공에 떠 있었다.
“헉!”
지켜보던 공손월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금화영도 눈을 부릅떴고, 객옹 역시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설마…….’
그것은 바로 내력으로 검을 다스린다는 ‘어검술’이었다.
전설 속의 검선(劍仙)이 이루어 냈다는 경지가 그 일부나마 재현된 것이다.
슥.
그사이, 제갈명은 두 손으로 각각 검결지를 취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운현을 향해 뻗었다.
“하아!”
쉭.
검기를 두른 군자검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마치 섬전 같은 빠르기였으나 운현의 미명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우웅.
미명이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서늘한 한기가 그의 검에 맺혔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결과는 분명했다.
군자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흡!”
제갈명이 자신의 가슴 앞에 검결지를 모았다.
훅.
그의 군자검이 허공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금 운현을 향해 낮은 궤적을 그리며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사람으로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검로였다.
쐐애액.
콰앙.
다시 한번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군자검은 운현의 미명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하!”
쉬익.
제갈명의 외침과 함께 군자검이 다시 운현을 향해 쏘아져 갔다.
“놀랍습니다.”
운현이 말했다.
이제껏 담담하던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빛나고 있었다.
쉭, 콰앙.
폭음이 터지고 군자검이 허공을 날아 튕겨 났다.
“허나 군자의 검 앞에서는 오직 진실만 남는다 하셨으니.”
스륵.
운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저 그것뿐이었지만 객옹은 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츠즈즈즈.
운현의 발밑에 때아닌 서리가 번져 가고 피부를 찌를 듯한 냉기가 후원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운현의 검이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기운도, 내력도 아닌 그것은 말 그대로 천년의 거목과도 같은 존재감이었다.
“저의 이 검으로써 당신의 검을 시험하겠습니다.”
운현의 빛나는 눈동자는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으득.
제갈명은 이를 악물었다.
운현의 말처럼 지금이 바로 그의 검이 시험받을 때였다.
“하아아!”
제갈명이 크게 외치며 두 손을 내뻗었다.
후욱.
허공에 뜬 그의 군자검이 운현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군자검은 푸른 검기를 흘리며 한 줄기 유성처럼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운현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리는 순간, 그의 검 미명이 움직였다.
슥.
그것은 그저 단순한 검격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제갈명은 보았다.
하늘 높이 솟은 운현의 검이 자신과 자신의 군자검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을.
그것은 마치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