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사천의 위기
운현은 즉시 항주 외곽의 저택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운현은 총군사 영호준, 대외총괄 모용미와 함께 현 상황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갔다.
“사천으로 빠져나간 마교의 군세가 얼마나 됩니까?”
운현의 물음에 모용미가 답했다.
“천운자께서는 대략 삼천 정도로 보인다고 하셨어요.”
바스락.
모용미는 공동파의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의 서찰을 건넸다.
운현은 서찰을 받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모용미가 말한 대로였다.
마교의 군세가 사천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난주의 관군이 방치했다는 지적도 적혀 있었다.
사락.
운현은 서찰을 총군사 영호준에게 건넸다.
영호준은 빠르게 서찰의 내용을 살폈다.
“허어.”
그는 탄식을 흘렸다.
“관군이 초전에 대패하고 난주에 틀어박히다니, 최악의 상황이군요.”
영호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운현에게 서찰을 돌려주며 말했다.
“제독 총병관이 전의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서안 방면만 지키면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렇게 시간을 끈다 해도 마교의 군세가 사라지진 않을 텐데요?”
모용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오히려 마교의 군세가 더 늘어나지 않겠어요? 게다가 저들이 사천으로 진출하게 되면 전황이 더욱…….”
“민란이라 여기고 있으니까요.”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민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지 못한 데다 강력한 지도력이 없으면 저절로 와해되기 마련이니까요. 민란이 다른 지역으로 번져 가는 걸 막으면서 시간을 끄는 건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모용미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민란이 아니잖아요. 저들은…….”
“그렇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마교의 군세지요.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 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난리의 진압이 아니라 박 공공을 몰아내는 것이니까요.”
모용미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마교의 군세를 부정하다니?
하지만 운현의 말이 정확하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따각, 따각.
침묵 속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득 영호준이 운현에게 물었다.
“맹주님. 사천성의 관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요?”
현재 감숙의 난리는 공식적으로는 ‘민란’이다.
사천성의 군정을 관할하는 도지휘사 역시 그들을 평범한 농민들로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대처 역시 안일하고 느슨할 터였다.
사천성의 정예 병력이 난주의 진압군으로 차출당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제대로 대응하게 해야지요.”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이 민란이 아님을 사천의 도지휘사에게 알리고, 그의 권한으로 사천의 관군을 지휘하여 마교의 군세에 대비토록 해야 합니다.”
“도지휘사가 받아들일까요?”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운현이 특별 감찰어사라 해도 군정에까지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방 대관들에게 박 공공의 영향력은 아직도 살아 있다.
비록 운현의 서찰이 예전 같은 힘을 가지진 못할지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운현이 모용미에게 물었다.
“아미파나 당문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오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천운자께서 마교의 우회를 확인하시고 즉시 급보를 보내셨으니까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군세가 사천으로 향한 것이 알려지고, 당문이나 아미파가 위협을 느껴 창룡맹으로 소식을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천운자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영호준이 혀를 찼다.
“문제는 시간이로군요.”
이곳 항주에서 사천은 대단히 먼 곳이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해도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난주에서 사천의 성도도 가까운 거리는 아니니까요.”
감숙과 사천이 이웃한 성이라지만 난주와 성도의 거리는 제법 멀다.
삼천의 군세라면 이동하는 데만도 꽤나 시일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서둘려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네요.”
모용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의 도지휘사에게 보낼 서찰이 과연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지, 도지휘사가 그 서찰의 내용을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창룡맹의 고수들이 간다 해도 마교의 군세를 과연 막을 수 있을지도 말이다.
따각, 따각.
마차는 항주 외곽의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
모든 것이 혼란하고 불확실하기만 했다.
***
사천성 성도, 당문.
“총괄군사님.”
집무실에 앉아 있던 당설련은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빛냈다.
당설련은 태평맹의 직위를 내려놓고 당문 총괄군사의 자리에 올랐다.
문주가 공석인 지금 사실상 당문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들어와.”
당설련이 말했다.
사락.
문이 열리고 수하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당설련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총괄군사님. 도지휘사와 안찰사, 포정사가 모두 면담을 거절했습니다. 지난번의 요청 역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으득.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수하 앞에서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마교의 군세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렸는데도 말이야?”
당설련이 날카롭게 말했다.
과거라면 당문이 흘리는 정보 한마디에 귀를 쫑긋 세웠을 그들이 이런 고자세라니.
“그들은 마교의 군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헛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케 하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하!”
당설련은 헛웃음을 흘렸다.
관군에게 수천의 농민들 따위는 사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금 성도로 오고 있는 자들은 결코 평범한 농민들이 아니다.
어쩌면 지방 대관들도 ‘농민들’의 정체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교의 군세에 대비해야 한다’는 당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면담마저 거부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문과 얽히지 않겠다는 뜻이다.
“창룡맹에서 연락은?”
“아직 없습니다.”
없는 것이 당연했다.
당설련이 서찰을 보낸 것이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문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자신만만한 내용으로 채워지던 서찰이, 갑작스럽게 전해진 마교의 군세에 다급한 구조 요청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총괄군사님. 과연 창룡맹이 저희를 돕겠습니까?”
수하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설련의 결정에 의심이라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설련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반드시 도우러 올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러나 수하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반응은 현재 당문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독선이 운현과 함께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설련과 청홍쌍노, 그리고 의식을 잃은 문주 당천벽뿐이다.
게다가 당문은 창룡맹과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다.
애초에 창룡검주 운현이 태평맹에 맞서 아미를 구하면서 창룡맹이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창룡맹이 당문을 도울 것이라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미파는 어때?”
“아직 답이 없습니다.”
당설련은 아미파에도 서찰을 보냈다.
마교의 군세가 내려오면 당문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 아미의 회답은 오지 않았다.
“……알았어. 나가 봐.”
“네.”
수하는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당설련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털썩.
“후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녀는 하얀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피할 수는 있어.’
마교의 위협을 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당문의 모든 식솔을 이끌고 대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서는 안 돼.’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문파와 세가가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은 일종의 자경대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당문이 이 도시를 버린다면 그것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치욕스러운 꼬리표가 되어 당문을 따라다닐 것이다.
강호 무림에서 당문의 이름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건 당연하고 말이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겠지.”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관의 대책은 믿을 수 없고 도움의 손길은 아직 멀다.
독선과 운현이 반드시 도우러 올 것을 믿지만 시간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슥.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쥐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당문이 사라지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사락, 사락.
당설련은 만일을 대비해 은밀히 옮길 것들과 피난시킬 사람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의 붓은 가볍게 종이 위를 종횡하고 있었지만 당설련의 표정은 시종 무겁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미의 서찰이 당문으로 날아들었다.
사천의 위기 앞에 옛 원한을 잠시 접어 두고 기꺼이 협력하겠다는 흔쾌한 답변이었다.
당설련은 그제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교의 삼천 군세는 시시각각 성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촤아아.
운현은 뱃머리에 부서지는 장강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지금 운현은 혈교를 토벌했던 일행들과 같이 사천성 성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운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운현은 사천의 도지휘사에게 먼저 서찰을 보냈고, 공동파에도 가능한 대로 도사들을 성도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아미파에 상황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수 신니는 ‘아미파라면 기꺼이 당문과 협력하여 성도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탤 것이다’라며 장담했지만 말이다.
“내가 당문을 돕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군.”
군자검 제갈명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옆에 있던 금화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당문이 아니라 성도의 백성들을 구하러 가는 것 아니었나?”
“같은 얘기라네.”
제갈명은 웃음을 흘렸다.
“피난하지 못한 성도 사람들과 피난할 수 없는 당문을 돕는 것이니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 않겠나?”
노년의 군자검 제갈명은 젊은 금화영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제갈명이 본래 점잖은 것도 있지만 금화영은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화영과 능세영이 속한 금가장은 앞으로 호남성의 유력 문파로 떠오를 가능성이 컸다.
“당문이 피난할 수 없다고?”
강호 무림에 어두운 금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기개 있는 무인으로서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로군!”
제갈명은 쓴웃음을 흘렸다.
당문과 무인의 기개라니, 그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어디 있을까?
운현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모용미가 있었다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겠지만 그녀는 대외 총괄로서 창룡맹 총단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래, 맹주께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
제갈명이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제 조건은 사천의 관군이 제대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교도 쉽게 성도를 넘보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사람들의 피난을 돕는 정도겠지요.”
성도가 마교의 손에 넘어간다면 제아무리 절정고수들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피난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잠시 시간을 끄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사천의 관군이 마교의 군세를 막는다 해도 문제는 있습니다. 마교의 마병들은 혈인들과 달리 이지를 가지고 있으니 분명 관군의 허점을 노리겠지요. 예를 들어 소수의 정예 마병들이 성도에 침입해 혼란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마교의 마병은 기괴한 능력과 함께 이지(理智) 또한 갖추고 있었다.
난주의 진압군을 유인한 것처럼 관군의 허점을 노릴 가능성은 다분했다.
“흠, 그걸 우리가 막는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운현의 말에 군자검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관이 살피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의미다.
“괜찮군.”
제갈명의 말은 진심이었다.
의협을 내세우거나 영웅심에 취해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도, 상황을 냉철히 판단하고 가능한 일을 찾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시간 내에 도착한다는 전제하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운현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성도가 멀쩡하리란 확신은 없었다.
성도의 도지휘사는 물론 안찰사와 포정사에게도 서신을 보내긴 했지만 과연 그들이 운현의 경고를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촤아아.
운현은 뱃머리에서 부서지는 물살을 보았다.
수군 도독 진림이 내어 준 쾌속선이 유독 느리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