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4화 (5/301)

4. 이게 나라고?

날씨는 청명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부니 나들이하기에는 더 없이 좋았다.

적비연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함께 이동하는 무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정예 무사들이 대거 빠졌다.

대신 수문무사들이 조금 포함되어 있었고, 순찰조도 몇몇 있었다.

통솔 책임자는 천성대주(天星隊主) 이제학(李諸學)이었는데, 대주들 가운데에서도 이제 막 절정에 오른 고수로 무공이 그리 센 편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겨우 이 정도 무인들을 데리고 무림맹 신의를 마중 나간다고?

그야말로 구실 맞추기가 아닌가?

만약 싸움 좀 한다는 도적 떼라도 맞닥뜨렸다간 과장 좀 보태서 마차 아래에 머리 박고 숨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하지만 곧 이해했다.

‘지금 내가 사라져서 비상이 걸렸을 테지.’

하긴.

가주의 병세를 살피러 무림맹에서 신의가 몸소 찾아오는데, 정작 가주가 실종되고 없으니 보통 일은 아니다.

아마 정예 무인들은 대부분 사라진 자신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터.

그래봐야 소용없겠지만 당장 돌아가서 말해줄 수도 없고, 참.

게다가 말 그대로 마중이었다.

가장에서 고작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악록산(岳麓山) 기슭까지만 다녀오면 되니 굳이 필요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지 않은 것이리라.

뭐, 지금까지 수차례 방문하는 동안 별일 없었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테고.

‘그래도 그렇지. 이 구성은 좀 심하긴 하네.’

적비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막천수가 어깨에 손을 척 걸쳤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냐? 아직도 총관님이 서운한 거냐?”

“아, 별로 그런 건 아닙니다.”

“짜식,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넌 총관님을 처음 봐서 잘 모르겠지만, 원래 좋은 분이시다. 내 생각에 만검세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대놓고 포상은 못 내리고, 이런 식으로 포상 대신 특근수당을 두둑하게 주려고 하시는 게 틀림없다.”

적비연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총관에 대해서라면 자신이 훨씬 더 잘 안다.

적어도 총관은 그렇게 복잡하게 포상을 내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일의 경중을 철저하게 가리는 사람이다.

하급 무사의 포상으로 그렇게까지 머리 쓸 인물이 절대 아니다.

더구나 가주가 사라진 지금이라면 더더욱.

‘이건 그냥 말 그대로 특근일 뿐이야, 이 사람아.’

뭐, 수당은 좀 더 쳐줄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속내를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으니, 적비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막천수는 수당 생각에 입이 헤벌쭉 벌어져서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수당이 두둑하니 마음 풀어라. 그렇잖아도 재정 상태가 어렵다는 이유로 봉급도 삭감됐는데 잘 됐잖아? 너, 수당 받으면 한 턱 쏴야 한다.”

“제가요?”

“그래, 난 처자식 먹여 살려야지. 그렇잖아도 이번에 수당 받으면 약재나 제대로 지어서 마누라 먹이련다. 몸져누운 지가 꽤 지났는데 아직도 차도가 없으니…….”

그러고 보니 막 조장의 안사람이 병치레를 한 게 벌써 한 달째인가?

새로 주입된 기억을 더듬어보면 분명 그 정도 된 것 같다.

가주로 지낼 때는 전혀 모르던 일이었다.

하긴 당장 자신이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데 남의 마누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었겠나?

게다가 봉급이 삭감되다니.

가장의 재정 상태가 그 정도였나?

한편 아내를 떠올린 막천수가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돌팔이 영감탱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지만. 돈 냄새 좀 맡게 해주면 성의라도 달라지지 않겠냐? 이참에 밀린 외상값도 갚으면 좋아할 거고.”

“그럼요. 분명히 완치될 겁니다.”

“그래야지. 내가 장가를 늦게 가서 애들도 아직 한창인데 제발 그래야지. 우리 애들을 위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막천수의 얼굴에 언뜻 시름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말 못하며 지내는 사이에 아내의 병세가 꽤나 심각해진 모양이었다.

적비연은 자세히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서라,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굴 걱정하나?

당장 내 몸뚱이도 찾지 못하는 판국에.

그렇게 악록산(岳麓山) 기슭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만치 길가에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한 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상이었다.

정말이지 무림맹 신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출한 구성원.

마부 한 명에 호위 무사가 두 명.

원래는 그마저도 싫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의 거듭된 건의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아상의 인품이 썩 좋은 것은 또 아니다.

‘노인네 순수 자기 호기심으로 날 보러 온단 말이지.’

사실 공위지체가 강호사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체질이다 보니 의원으로서 호기심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자고로 의원이라면 치료법부터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아닌가?’

적비연은 지난 일을 생각하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간 아상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막말로 그 까칠한 늙은이의 똥구멍까지 핥아댈 기세로 지극정성을 다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법을 알아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야말로 아상 앞에서는 자존심이라는 건 똥통에 처박아 넣고 철저한 ‘을’의 입장을 유지했다.

그런데도…….

‘날 실험도구처럼만 여겼단 말이야. 괘씸한 늙은이.’

다시 생각하니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마침 천성대주 이제학이 아상에게 다가가 포권했다.

“벽력적가 천성대주 이제학이 아상 어르신을 뵙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적가장까지 모시겠습니다.”

“나도 이제 막 도착해서 쉬던 중이니 잠시 머물다 가세. 산들바람도 부니니 날이 좋구먼.”

저것 봐라.

집에서 눈 빠지게 기다릴 환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꼴이라니.

이제학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모두 잠시 휴식한다.”

무인들이 저마다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휴식을 취했다.

“어때? 완전 꿀이지 않냐?”

막천수가 적비연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적비연이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네요.”

“그것 봐라. 이런 간단한 일에 그만한 수당이라니. 이게 다 포상이라니까. 이제 좀 알겠냐? 총관님의 깊은 뜻을?”

뭐, 그렇다고 치자.

그보다 이렇게 아상 영감을 만났으니 확인이라도 해볼까?

정말 내 몸을 고칠 생각은 하고 있는 건지 말이다.

적비연은 막천수에게 대충 웃어 보이고는 아상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 너 어디 가냐?”

막천수가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적비연이 아상 앞에 다다르자, 호신위 두 명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앞을 막아섰다.

마침 아상이 호신위들에게 손을 저었다.

“비켜라. 그늘진다.”

잠시 머뭇거리던 호신위들이 곧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언제든 검을 뽑을 태세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적비연이 다가가자, 아상이 눈을 슬쩍 치뜨고는 물었다.

“내게 볼일이 있느냐?”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아니, 두 가집니다.”

적비연의 말에 아상이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맹랑한 꼬마로구나. 네 이름이 뭐냐?”

“적…… 남운재입니다.”

“그래, 내게 물어볼 용건이라는 건?”

“아상 어르신은 벌써 수차례 저희 적가장을 방문해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가주님의 병세에 차도가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주님의 병세가 점점 깊어진다는 소문만 퍼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신의라는 별호가 무색할 정도지요.”

또박또박 내뱉는 말투에 다른 무인들이 입을 딱 벌리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하긴 놀라 자빠질 만하겠지.

적가장의 말단 수문무사가 무림맹 신의 앞에서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따지고 있으니.

이제학이 험악한 표정이 되어 나서려는데, 그보다 먼저 막천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정, 정말 죄송합니다, 어르신! 이 녀석이 며칠 병치레를 하더니 지금 제정신이 아닌지라…….”

“흥! 적가장에서는 제정신도 아닌 무사를 호위로 보냈단 말인가?”

“아, 그, 그게…….”

“됐다. 물러나라. 이 아이는 나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으니.”

“그, 그러실 필요는…….”

하지만 막천수는 아상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막천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안절부절못했다.

‘도대체 저 녀석이 왜 저러는 거야? 진짜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 이제 어쩌지?’

한편 아상은 입매를 비틀며 적비연을 가만히 보았다.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꼭 너희 가주를 닮았구나.”

잘 보셨소, 그 싸가지가 바로 나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싸가지는 좀 너무한 것 아닌가?

그동안 내가 얼마나 굽실거렸는데.

아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궁금한 건?”

“아상 어르신께서는 가주님의 병을 못 고치시는 겁니까? 안 고치시는 겁니까?”

이제 이제학과 막천수의 낯빛은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속이 후련했다.

진작 물어보고 싶었다.

아상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곧 완치될 거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함부로 따지지도 못했다.

적비연에게 아상은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려 줄 유일한 동아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말하니 속은 시원하다.

아상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주를 향한 네 충정이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런 민감한 사안은 내 직접 당사자에게 전해야겠다. 두 번째 질문은?”

허! 결국 이런 식으로 피해 간다는 건가?

예상은 했지만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이건 사실상 치료를 못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니까.

만약 완치가 가능하다면 이 늙은이 성격상 이렇게 말을 돌리지는 않았을 거다.

적비연이 주위를 슬쩍 훑은 다음 아상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조금 황당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영혼이 멀리 떨어진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게 의술로 가능합니까?”

“불가능하다. 마교의 대법으로는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마저도 대상이 바로 곁에 있어야만 한다고 들었다.”

그럼 마공에 당한 것도 아니란 말인가?

하긴 그 요상한 영약을 복용하고 사이한 심법을 익히면서도 마기를 전혀 느끼지는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질문은 없다.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비연이 꾸벅 인사하고는 돌아서는데, 아상이 손목을 휙 낚아챘다.

“잠깐. 한데 너는 왜 그런 게 궁금한 거냐? 음? 가만…… 넌……!”

순간 아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적비연이 얼른 손을 빼내며 물러났다.

찰나에 맥을 짚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아상이 미간을 모으더니 천천히 물었다.

“너는…… 정말로 적가장의 수문무사더냐?”

“그렇습니다.”

적비연이 아상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아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한데 어찌 한낱 말단 수문무사의 내력이…… 게다가 그 기운은 마치 적가주의…….’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뭐, 좀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적가주를 만나면 이 아이에 대해서 먼저 물어봐야겠군.’

생각을 갈무리한 아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만들 일어나도록 하지. 적가주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참 일찍도 서두른다.

적비연은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을 꿀꺽 삼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막천수가 얼른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운재야, 운재야. 너, 정말 왜 이러냐? 앞으로 나댈 때는 나한테 상의 좀 해줄래? 너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 살겠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없지만…… 네가 이렇게 돌발행동을 하면 내 심장에 무리가 간단다. 봐라. 지금도 어르신께서 널 노려보고 계시잖냐?”

막천수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그의 말대로 아상은 깊어진 눈으로 적비연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맥을 짚고 뭔가 이상하다고 여긴 게 분명하리라.

‘기회가 되면 영감님한테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서두를 일은 아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자고로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위험한 법.

신중하게 고민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대략의 정비가 끝나자 이제학이 말에 올랐다.

막천수가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켰다.

“으읏차! 이제 집에 가는구나. 어서 가서 내 새끼들 보고 싶네.”

“언제는 애들 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더 편하다면서요?”

“원래 애들은 보고 있으면 힘들고, 안 보면 또 보고 싶은 거…….”

쉬이이잇!

퍼억!

순간 막천수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갔다.

목이 떨어져 나간 막천수의 몸이 피분수를 터뜨리면서 털썩 쓰러졌다.

“어……?”

적비연이 눈을 부릅뜨는 사이,

쒸에엑! 퍼억!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말 위에 앉은 이제학의 이마를 정통으로 꿰뚫었다.

슈우욱, 콰다앙!

그대로 머리가 박살 난 이제학이 말에서 날아가듯 떨어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적, 적이다앗!”

“우아앗!”

사방에서 외치는 고함 소리가 난잡하게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적비연은 정면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보고 최대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푸욱!

“크어억!”

심장에 틀어박힌 화살이 그대로 적비연과 함께 날아가면서 나무 기둥에 박혔다.

꽈다앙!

“쿨럭! 커헉! 이런…… 썩을……!”

적비연은 가물가물 흐려지는 눈으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보았다.

누군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저놈…… 누구지……?’

복면을 쓴 상대.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만큼은 굉장하다.

적어도 초절정을 앞둔 고수!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발을 들어 올렸다.

“가거라.”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발바닥이 화살 박힌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남운재의 몸으로 환생한 지 정확히 사흘째.

적비연이 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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