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5화 (6/301)

5. 이게 나라고?

귀가 멍멍하다.

아스라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한데 꿈결에서 부르는 것처럼 아득하다.

누가 뭐라는 거지?

“……차려.”

뭐라고? 좀 더 크게 말해야 듣지.

“정신 차려! 박 호위!”

순간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바늘처럼 고막을 찔렀다.

동시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이어진다.

적비연이 퍼뜩 눈을 떴다.

“헉!”

헛바람을 삼키고는 얼른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꿈? 현실?

눈앞에는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다.

여기저기에서 칼부림을 하는 무인들.

복면을 쓴 적들에게 아군들이 일방적으로 도륙당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똑같은 장소.

나, 죽은 게 아니었나?

얼른 몸을 더듬어 보았다.

어라? 뭔가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옷도 다르고, 깡말랐던 체형도 탄탄한 근육질로 변했다.

다만 내상을 입은 것인지 뱃속이 욱신거린다.

입가에서는 비릿한 혈향이 맡아진다.

소매로 훔치니 핏물이 묻어나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뒤에 아상이 타고 온 마차가 멈춰 있다.

‘저 복면인들! 도대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적비연은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경악스러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만치 보이는 시체 두 구.

하나는 목이 잘려 나간 막천수의 시체였고, 다른 하나는 심장이 으깨진 채 절명한 남운재의 시체였다.

‘저, 저 시체는 나…… 아니, 남운재잖아!’

그제야 적비연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몸으로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 도대체 이게 뭐야……? 왜 계속 다른 사람 몸으로…….”

“박 호위! 정신 안 차려!”

다시 고막을 찌르는 고함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등지고 우뚝 선 호신위가 연신 어깨를 들먹이고 있다.

그의 옆구리와 허벅지에는 화살이 한 대씩 박혀 있다.

적비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부르는 박 호위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박 호위! 진짜 이대로 뒈질 생각이냐?”

앞에 선 호신위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또 소리친다.

정말이지 정신도 없고 무슨 조화인지 알 수가 없지만,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환생한 게 분명한 모양이다.

문제는 환생한 몸도 내상을 입어서 썩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점.

적비연은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 파악이 잘 되진 않지만, 마냥 넋을 놓고 있다간 또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죽을 수 있다.

아군은 대부분 죽었다.

하긴 처음부터 적가장에서 파견된 무사들은 오합지졸이었다.

반면 복면인들은 전부 절정 이상.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걸까?

적비연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새끼들아! 지금 마차에 계신 분이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거냐?”

하지만 복면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두려움에 떠는 무인들이나 달아나는 무인들을 하나하나 처리할 뿐이었다.

“박 호위!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다! 내가 어떻게든 버텨볼 테니까 적가장으로 달려라! 지원을 요청해!”

하지만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모두 절정 고수다.

그것도 절정 중에서도 중간 단계 이상으로 보인다.

그런 자들을 오상춘(吳上春) 혼자 막을 수는 없다.

음? 근데 내가 저 호신위 이름을 어떻게 안 거지?

그냥 알게 됐다.

그러고 보니 없었던 기억이 마구 생겼다.

‘이 몸의 주인이 가진 기억이구나!’

남운재의 몸에 들어갔을 때처럼 약간의 시간이 지나니 낯선 기억들이 마치 제 것인 양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 신기한 현상에 감탄할 때가 아니다.

자칫하다간 또 죽을 수도…….

“커억!”

오상춘이 비명을 터뜨렸고, 적비연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오상춘의 등을 뚫고 검신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곧이어,

쒸쒸에엑!

푹! 푹푹푹!

화살 네 대가 순식간에 오상춘의 가슴과 목, 단전, 허벅지에 박혔다.

“상춘아!”

적비연이 눈시울을 붉히고는 거칠게 소리쳤다.

자연스럽게 밀려든 감정.

비록 자신의 것이 아니었지만, 오상춘과 함께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원래 적비연이 겪었던 일처럼.

그렇게 기억을 되새기니 저절로 울분이 차올랐다.

“이 개 같은 놈들아!”

적비연이 달려 나갔다.

쒸이이잇!

“마지막 발악이냐?”

복면인 중 하나가 비소를 날리며 순간 검을 뻗어왔다.

적비연이 찰나지간 가문절기인 섬전보(閃電步)를 밟아 파고드는 검신을 미끄러지듯 피했다.

복면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어떻게……?’

아주 잠깐의 동작에 불과했지만, 상대의 싸움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다소 답답하면서도 안정적인 방어형 태세였다면, 지금은 철저하게 공격형으로 전환됐다.

물론 동료가 죽어서 분노했기 때문에 제 한 몸 사리지 않고 달려드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무공의 결이 달라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확실히 지금 상대의 움직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호신위의 몸에는 적비연의 혼이 들어가 있었으니.

누가 알았으랴?

무림맹 소속 무사가 벽력적가의 가문절기를 사용할 줄을.

갑자기 변칙적으로 파고들자 복면인의 손발이 순간적으로 어지러워졌다.

적비연이 비록 공력을 온전하게 회복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절정 경지의 고수였다.

상대의 빈틈을 그대로 놓칠 리가 없었다.

“뒈져라!”

쫘르르르릉!

그가 내뻗은 검이 천둥소리를 울리며 그대로 가슴을 꿰뚫었다.

가문절기 중 천명뇌검(天鳴雷劍) 초식이었다.

푸콰악!

“커헉! 컥!”

복면인이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칫! 빗맞았나?’

검봉이 닿았을 때 눈치챘다.

급소를 살짝 비껴 맞았다는 것을.

만약 몸이 멀쩡했다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어질 공격에서는 반드시 끝낸다!

“끝이다!”

적비연이 검을 뽑아내는 것과 동시에 돌풍처럼 회전했다.

그대로 검을 횡으로 그어 상대의 목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쒸에에엑! 푸욱!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 한 자루가 적비연의 목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커억!’

그대로 픽 쓰러진 적비연이 눈만 끔뻑인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이 고통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찢어진 목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저벅저벅……!

조각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아래에 복면인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적비연을 내려다보는 복면인은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쯧……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날씨잖아.’

복면인이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렸다.

콰직!

* * *

찰싹! 찰싹!

뺨이 따갑다.

그만 때려라. 아프다.

찰싹! 찰싹!

“아, 좀 그만 때리라니까!”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면서 눈을 떴다.

‘헉! 또……?’

틀림없다.

또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환생한 거다.

복면인이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정신 좀 드냐?”

어딘지 낯설고 탁한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곧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형님……?”

적비연이 저도 모르게 말을 뱉어내고는 흠칫거렸다.

형님이라니.

이런 놈들을 형님이라고 부르다니.

하지만 어느새 떠오른 기억 때문에 불쾌감보다는 자연스럽다는 느낌이다.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급한 대로 지혈을 해두었다. 운이 좋았다. 조금만 비껴 맞았어도 죽었을 거다.”

“감사합니다. 이 형(二兄).”

“환라육천골(換裸肉千骨)로 상처 부위만 좀 줄여라.”

“예, 형님”

적비연이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수라장이 된 주변은 완전히 정리되어 있었다.

벽력적가의 무인들은 모두 길바닥에 널브러져 꿈쩍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었다.

적비연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죽기 전에 천명뇌검으로 검을 쑤셔 박았던 그 복면인으로 환생했다.

‘이걸로 대략 상황 파악은 되는 것 같은데…….’

분명히 죽을 때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환생하고 있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왜 그런 걸까?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

‘설마 그년 때문에……?’

그래, 분명 공위증을 치료하고 무적불사의 몸을 만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정체불명의 무공비서와 영약 때문이라면?

합리적인 추론이다.

무적까지는 몰라도 어떤 의미로 보면 불사는 틀림없으니까.

거기에 또 하나 특이점.

‘이번에도 모든 기억이 저절로 떠오른다.’

타인의 몸을 빌려 환생하게 되면, 원래 그 몸의 주인이 겪었던 기억을 모두 흡수하게 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단전에 사기(邪氣)까지 느껴지는군.’

적비연은 얼른 내공을 운기해 보았다.

확실하다.

정연한 기운이 아니라, 어딘지 거칠고 패도적인 성질이 여실히 느껴진다.

거기에 운기 방식도 다르다.

사공인 만큼 어딘지 변칙적이고 자유분방한 느낌마저 든다.

적비연은 무의식중에 이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운기했다.

‘그렇다면 환라육천골도……?’

스스슷……!

놀랍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구결에 따라 운기를 하니 환라육천골도 어렵지 않게 시전된다.

축골공과 비슷한 이 사공은 복면인들의 독자무공이었는데, 몸을 자유롭게 변형시키기에는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 말은 곧…….

‘환생했을 때 그 육체가 가진 능력도 고스란히 흡수한다는 건가?’

이건 놀랍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본체의 능력, 그러니까 적비연 자신의 내공까지 회복되니 그 능력들이 더해진다면…….

‘완전 꿀인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죽을 때마다 전자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혹시 능력도 환생할 때마다 그대로 이관되며 계속 쌓이는 게 아닐까?’

환생할 때마다 능력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인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그년 말대로 ‘불사’ 앞에 ‘무적’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될 만하다.

그렇다고 그게 궁금해서 또 죽어볼 수는 없다.

언제까지 이 환생이 반복될지 알 수도 없고, 무엇보다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다시 겪기도 싫다.

그나저나 환생할 몸이 선택되는 기준이 뭐지?

하필 환생한 몸뚱이가 강동칠괴(江東七怪)라니.

적비연은 머릿속에 들어온 기억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복면인들이 강동칠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적비연은 막내인 칠괴(七怪)의 몸으로 환생했다.

원래 흑천련(黑天聯)이 군림하는 강동지역에서 활동하던 자들이었는데, 최근에는 중원 전역을 싸돌아다니며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전해졌다.

오죽하면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금전칠괴(金錢七怪)라고 부를까?

그야말로 돈을 위해서라면 오늘만 산다는 놈들이었다.

그런 강동칠괴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은 곧…….

‘누군가 우리에게…… 아니, 이놈들에게 의뢰를 했다는 건데…… 누굴까?’

대체로 이런 일은 대역을 시켜 의뢰를 하고, 일이 끝나면 대역마저 토사구팽하기 마련.

그만큼 의뢰자의 신분을 알기가 어렵다.

물론 의뢰받는 입장에서도 의뢰인의 신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는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신뢰의 문제랄까?

그러다 보니 적비연은 전생자의 기억을 온전히 흡수하고도 의뢰자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설마 흑천련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무림맹 신의를 급습할 까닭이 있겠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것들을 다 쓸어버리고 싶지만 일단 참아야 한다.

겨우 환생했는데 또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마침 일괴가 다가오더니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영감 꺼내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덩치 큰 삼괴가 저벅저벅 걸어가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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