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의가 되다
“비켜라!”
하천웅이 무인들을 제치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생존자가 있다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된다.’
다소 긴장한 표정이던 하천웅은 칠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입매를 말아 올렸다.
‘뭐야? 다 죽어가잖아?’
칠괴는 그야말로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늑골이 부서졌기 때문인지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마침 적비연이 하천웅을 지나치며 칠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얼른 칠괴의 손목을 들어 맥을 짚어보았다.
‘가망이 없다.’
그야말로 곧 끊어질 생명 끈을 겨우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빙의했던 육신이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그 말은…… 다른 몸으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잖아?’
다만 여전히 환생의 횟수에 제한이 있는지 알 방도가 없다.
만에 하나라도 제한이 있다면 무작정 죽거나 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쳇, 하나를 풀면 하나가 막히는군.
적비연이 생각에 잠긴 사이 칠괴는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천웅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어르신,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시지요.”
“흐음. 그러지.”
적비연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평소 꼴 보기 싫던 하천웅이 자신에게 연신 굽실거리는 모습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적비연이 마차에 오르자 하천웅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긴 적비연은 묵묵히 하천웅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적비연이 하천웅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사냥을 하러 왔다가 우연히 강동칠괴를 보았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어르신.”
적비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짐짓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군. 만약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내게 큰일이 벌어질 뻔했어. 내 목숨을 빚진 셈이야.”
“하하! 별말씀을요. 어르신을 알아본 이상 저희들이 놈들을 쫓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과연! 그럼 강동칠괴는 자네들을 보자마자 겁을 먹고 도망을 간 것이군? 다른 누구도 아닌 만검세가니까 말일세. 게다가 자네가 무인들과 함께 있었으니.”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사실 뭐, 그놈들이 저희들을 알아보고 줄행랑을 칠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지요. 혹여나 그 와중에 어르신이 다칠까 염려되었거든요.”
“그렇게 추격전을 벌이다가 그 버려진 사당 근처까지 이르게 된 거였군.”
“그렇습니다, 어르신. 정말 이만한 게 천만 다행입니다.”
“고맙네. 덕분에 살았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걸렸다. 이 새끼야.
거짓말을 지껄이려거든 적어도 주둥이에 침이라도 발라야지.
뭐? 만검세가를 보고 강동칠괴가 줄행랑을 쳐?
애초에 강동칠괴는 추격전을 벌인 적이 없다.
자신이 칠괴의 몸을 빌려 행동했으니 그것만은 분명하다.
사당에서 누군가의 일권에 늑골이 으깨지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아마도 그 일권을 내지른 자는 철검당주 만대균이었을 거다.
모든 정황을 미루어 유추해 보면 이번 사건에 하천웅이 강동칠괴를 끌어들였고, 그들을 토사구팽한 것이다.
이 때려죽일 놈!
아무리 욕망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어찌 사람으로서 그딴 짓을 한단 말이냐?
적비연은 헤실헤실 웃는 하천웅의 안면에 당장에라도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최대한 꾹 눌러 참았다.
사실을 안 이상 분풀이는 언제든 할 수 있다.
지금은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일단은 좀 쉬고 싶었다.
도대체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난 건가?
문득 남운재의 몸으로 지낼 때가 떠올랐다.
자연히 막천수도 떠올랐다.
‘막 조장…… 특근수당을 받는다고 그리 좋아했는데.’
어쩌면 그의 처자식들은 지금 막천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제길!’
* * *
바닥에 길게 깔린 융단과 높은 천장을 떠받치는 굵직한 기둥.
어지간한 어전(御前)을 방불케 하는 웅장한 공간.
장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그곳 태사의에는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는 중년 사내가 척 앉아 있었다.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은 그는 바로 만검세가주 하불범(河佛範)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차분한 인상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사내가 있었는데, 바로 소가주 하기룡(河起龍)이었다.
하불범은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 듯 연신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따금씩 태사의 손잡이를 콱 틀어쥐곤 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웅아가 신의를 모셔왔다고…….”
“예, 아버님.”
“웅아가 신의를 모셔왔단 말이지…… 그것도 강동칠괴가 납치하려던 현장을 덮쳐서…….”
“그렇습니다.”
“웅아가 그랬단 말이지…….”
“…….”
원래라면 기뻐서 펄쩍 뛰었어야 할 소식이다.
늘 사고뭉치였던 둘째가 이제야 사람이 된 모양이라며 함박웃음을 터뜨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 기쁨에 취해 뒤통수를 맞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이젠 으레 드는 생각.
‘그놈이 도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지?’
하불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하기룡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엔 철검당주께서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하불범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하기룡을 힐끔 보았다.
“다행이라? 너는 속도 좋구나. 철검당주가 어째서 그 녀석에게 붙었는지 모르진 않을 터.”
“그 속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다만 철검당주님이라면 혹여나 실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지요.”
하기룡이 빙그레 웃었다.
사실 철검당주의 속이야 빤히 보인다.
만검세가에서 점점 입지가 좁아지는 철검당이었다.
게다가 하기룡과는 어딘지 모르게 사사건건 의견 충돌이 잦았다.
아마 이 기회에 하천웅과 연을 이어서 만검세가의 실권을 한 번 잡아보겠다는 속셈이겠지.
하불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이지 내 자식이지만 어찌 이리도 다른 성격이더냐? 웅아 녀석이 네 반만 따라갔더라면 오죽 좋겠느냐?”
“언젠간 철이 들지 않겠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그보다 웅아가 본가의 명성을 드높일 계기를 만든 것은 틀림없으니 칭찬해 주시지요. 신의를 구한 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말입니다.”
마지막 말을 뱉을 때, 하기룡의 눈빛은 섬뜩하게 빛났다.
하불범이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네 생각에는 이번 일을 어찌 보느냐?”
“그냥 보이는 대로 볼 뿐입니다. 강동칠괴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신의를 납치했고, 이를 우연히 발견한 아우가 신의를 구한 것이지요.”
“벽력적가는 신의를 지키지 못하고 전멸한 것이고.”
“그렇지요.”
하기룡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면 사주한 자는 누구일 것 같으냐?”
“무림맹 신의를 납치할 만한 자라면 역시…….”
“흑천련주다?”
하기룡이 대답 대신 빙그레 웃기만 했다.
확실히 그림은 좋다.
이 가정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럴싸함이 중요하다.
이건 꽤 그럴싸하지 않은가?
이걸로 벽력적가는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만검세가는 무림맹에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흑천련에 대해 강경론을 펼치던 만검세가에게 더욱 힘이 실릴 수밖에 없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삼조가 아닌가?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다더니.
모처럼 웅아가 그럴싸한 사고를 쳤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웅아라면 어떠한 실수를 남겼을지도 모를 일.
“룡아.”
“이미 사람을 보내두었습니다. 꼼꼼히 살펴볼 것입니다.”
하불범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하기룡이 대답했다.
하불범은 흡족한 듯 웃었다.
역시 척하면 딱이다.
만약 어떠한 증거라도 만검세가에 불리한 게 남아 있다면 하기룡이 깔끔하게 처리하리라.
‘기특한 녀석. 내 너라도 없었다면 진즉 앓아누웠을 게다.’
마침 밖에서 하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소자가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어서 오너라.”
하불범이 대답하고는 태사의 아래로 내려갔다.
문이 열리면서 하천웅과 아상, 철검당주가 들어왔다.
한편 아상의 몸을 하고 있는 적비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여긴 올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무슨 황제가 사는 궁궐도 아니고 말이야.’
이러니 하천웅이 쥐뿔 없는 실력으로 허세만 잔뜩 들어가 있는 게 아니겠나?
하불범은 활짝 웃으며 아상을 맞이했다.
“아이고, 천기당주(天氣堂主)님을 이렇게 뵙는군요. 먼 길 오셨는데 이 무슨 난리랍니까?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천기당주는 현재 아상의 무림맹 공식 지위였다.
적비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 나는 괜찮소.”
“정말 다행입니다. 어르신께서 큰일을 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가슴이 철렁하던지! 아니, 당주께서 이렇게 위험에 처할 때까지 벽력적가는 도대체 뭘 했답니까? 제가 다 화가 나는군요!”
적당히 해라. 적당히.
적비연은 하불범의 호들갑이 내심 불편했지만, 시종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하기룡이 하천웅에게 다가왔다.
“네가 큰일을 했다. 정말 장하다.”
“별말씀을요, 형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뭐? 운이 좋아?
적가장의 무인들은 전멸당했는데 운이 좋다고?
하, 이걸 진짜 갈아 마실 수도 없고.
하천웅의 표정은 그야말로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하불범이 하천웅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퍼부었다.
“녀석, 늘 말썽만 부리더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장하다. 정말 장하다! 벽력적가도 구하지 못한 어르신을 네가 구해 드렸구나!”
“과찬입니다, 아버지. 마침 놈들과 마주친 게 다행이었지요.”
“그래, 이야기는 들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강동칠괴와 마주쳤다지?”
“예, 아버지. 녀석들이 본가 무인들을 보고 달아나는 게 영 수상쩍어서 잽싸게 추격을 하…….”
“잘했다! 잘했다! 네가 큰일을 했다.”
이것 봐라?
말을 막았다.
행여나 하천웅의 말이 길어져서 실수라도 할까 봐 미리 나선 게 분명했다.
적비연은 삼부자를 가만히 번갈아 보았다.
‘혹시 이번 일은 하천웅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건가?’
제집에서도 구제불능 취급받는 하천웅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을 통해서 만검세가가 노리는 것은 분명하다.
만검세가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과 동시에 벽력적가의 명성을 땅바닥에 처박으려는 거다.
이것들을 어떻게 조져야 하지?
사고를 친 망나니나, 그걸 덮어주고 이용하려는 아비와 형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네놈들의 그 같잖은 야욕 때문에 본가 무인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알아? 이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아.’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당장 뭔가를 할 방법이 없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설치다간 뒷감당을 할 수 없을 테니.
그래, 서두를 건 없다.
어차피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언젠간 반드시 응징하리라.
“큰일을 겪으셨는데, 우선 본가의 지객당에서 편히 쉬시지요. 적가장에는 사람을 보내 일러두겠습니다.”
“그럴 것 없소. 어차피 여기서 적가장이 멀지도 않으니 곧장 가리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여 적가장에 계시다가 또 괴한들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하불범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속뜻은 은근히 벽력적가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아무렴 벽력적가보다는 이곳이 안전하지 않겠냐는.
“원래 내가 가야 할 곳이었소.”
“흐음, 그럼 웅아, 네가 어르신을 모셔다 드려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적비연은 거절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잘됐다.
돌아가는 길에 이 개망나니 녀석부터 손을 좀 봐줘야겠다.
물론 일이 커지지 않을 만큼 알게 모르게 말이지.
“그럼 이만 가겠소.”
적비연이 막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아참.”
하불범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적가주는 괜찮은 거지요?”
적비연이 미간을 꿈틀거리고는 돌아섰다.
“무슨 뜻이오?”
“아, 항간에 요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말입니다. 적가주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괴이한 소문이지요. 허참,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마음에…….”
아주 지랄을 하네.
왜 차라리 고사를 지내지? 당신이 나를 걱정한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
‘나를 떠보겠단 말이지?’
적비연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본디 소문이란 사실보다 부풀기 마련 아니겠소? 걱정 마시오. 적 가주께선 아주 건강하시오. 가벼운 병치레를 하는 중이니 곧 나을 것이오.”
“가벼운 병치레를 하는데 신의 어르신께서 주기적으로 먼 길을 찾아와주시다니. 역시 정이 넘치시는 분이군요. 적가주를 대신해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말 속에 뼈가 있다.
가벼운 병세를 살피러 무림맹 신의가 굳이 여기까지 왜 오냐는.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내 소싯적에 전대 적 가주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그렇소. 그것도 아주 큰 도움을 말이지.”
“아, 그러셨군요.”
하불범의 표정이 대번 굳어졌다.
그래, 불쾌하겠지.
아무래도 무림맹 신의와 본가가 특별한 관계라는 게 당신한테 좋을 건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아버지가 진짜 아상 어르신을 구한 적이 있었을 줄이야. 나도 그동안 이 영감이 왜 매번 찾아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이 역시 아상의 몸으로 깨어난 후에 저절로 떠오른 기억이었다.
하불범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고맙소. 오늘 일은 내 절대 잊지 않겠소. 난 보다시피 은원을 평생 기억해 두는 사람이니.”
적비연이 두 눈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암, 절대 잊지 못하지. 이 썩을 놈들.
그 숨은 뜻을 알지 못한 하불범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별말씀을요. 제 아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자, 그럼 이제 내 진짜 육체가 멀쩡한지 보러 갈 차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