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8화 (9/301)

8. 마침내 비동(秘洞)으로

적비연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운기를 했다.

‘과연. 정기와 사기가 뒤섞여 있다. 한데 기묘하게 이 두 기운이 충돌하지 않는구나.’

정말이지 남자와 여자만큼이나 다른 성질의 두 기운이었다.

그런데 이 둘은 마치 몸속에서 서로 어울려 노는 것처럼 자유분방하게 뒤섞였다.

그럼에도 육체에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운기하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가지 기운은 각각의 흐름을 가지고 따로 놀기도 했고, 의지에 따라 하나로 합쳐지기도 했다.

음양의 조화도 아닐 진데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공과 사공이 조화를 이루며 몸에 녹아나다니?

범인이라면 이 두 가지 기운을 동시에 품은 것만으로도 최악의 경우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으리라.

물론 재능이 있는 자는 또 다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선 역시 재능이 있는 걸까?

적비연은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

어쩌면 각각의 기운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흡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반강제적으로 주입당한 게 아니라 선천지기처럼 저절로 생겨나고 있으니까.

‘내공이 늘었어.’

원래 적비연은 절정 이 단(二段)에 속해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서는 한 단을 오르는 데에만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도 걸린다.

먼 옛날에는 절정고수만 되어도 강호에서 한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무공은 점점 발전했고, 무인들의 수준 역시 향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정을 열 단계로 세분화했고, 초절정을 다시 열 단계로 나눴다.

어쨌거나 절정에 도달하면 무공의 성취 속도는 급속도로 더뎌진다.

인간에게는 신체적 한계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데 벌써…….

‘이 정도면 절정 삼 단(三段)에 해당하겠군.’

내공은 더 놀랍다.

최소한 수년간 수련을 해야 쌓을 수 있는 내공을 하루 만에 얻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평생 익힐 일이 없을 것 같은 사공과 그 내공심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머릿속에는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귀한 의술 지식이 가득하다.

이걸 좋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본체를 잃은 건 속상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룬 무공의 성취와 방대한 지식만큼은 가슴이 떨릴 정도로 흥분된다.

‘좋아, 일단은 이 순간을 즐기도록 하자. 뭐가 됐든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잖아?’

어차피 일 년짜리 시한부 인생이었다.

그보다 더 나쁠 건 또 뭔가?

뭣 하면 죽기 전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뭐.

덜컹덜컹…….

마차는 이제 번잡한 저잣거리를 지나 조금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적비연은 다시 한 번 가주전에 들어갈 방법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만검세가에 잠깐 머무는 동안 적비연의 머릿속은 온통 가주전의 비동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법 그럴싸한 계획을 세웠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한숨이 새어나왔다.

적가장의 무인 다수가 떼죽음을 당했는데, 가주는 어딘가로 사라져 나타나질 않으니 다들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수습해야 할 일이 많겠어. 하지만 그전에…….’

적비연의 시선이 마주 앉은 하천웅에게 향했다.

‘이놈에게 먼저 벌을 좀 내려야겠지.’

적비연이 창밖을 보며 짐짓 무심한 척 말을 흘렸다.

“만검세가 소가주는 길을 제대로 걸었더군. 과연 만검세가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었어.”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에 하천웅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하천웅은 적비연이 슬쩍 흘린 미끼를 덥석 물었다.

“어르신, 그게 무슨 뜻인지요?”

“뭐가 말인가?”

“조금 전에 하신 말씀 말입니다. 형님에 대해서…….”

“흐음. 말 그대로네. 자네 형은 체질에 적합한 무공을 올바르게 수련했지. 한마디로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잘 찾아 입었단 말일세.”

“맞는 옷이라는 게?”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체질이라는 게 있지. 정확한 건 맥을 짚어봐야 알지만, 외형으로도 대충 알 수는 있다네. 가령, 자네를 보면 찬 것을 좋아하고 더운 것을 싫어할 테지?”

“아, 그걸 어찌…….”

“한겨울에도 찬 것을 좋아할 테지.”

“그렇습니다, 어르신.”

“자네 같은 사람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보약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정말 그렇습니다! 어찌 이리 정확하십니까?”

“이 정도는 별것 아닐세. 지금 말한 것처럼 사람마다 체질이라는 것이 있다네. 무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체내에 내공을 쌓는 일인데 그 체질을 무시하고 내게 어울리지 않는 기운을 담으려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당연히 발전이 더딜 수밖에.”

“한데 형님은 제 몸에 맞는 무공을 익혔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네. 모르긴 해도 자네 형은 언젠간 초절정의 경지에도 오를 수 있을 걸세.”

“헉! 초절정까지!”

하천웅이 마차 안이라는 사실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적비연이 조소를 지었다.

“왠지 별로 기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군?”

“아, 하하. 그럴 리가요. 너무 기뻐서 놀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답과 달리 하천웅의 표정은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은근히 소가주 자리를 노리는 입장에서 형의 승승장구 예언은 달가울 리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하천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어…… 혹시 그럼 저는 어떨까요? 저도 저에게 맞는 옷을 입는다면…… 그러니까 제 체질에 맞는 방식으로 무공 수련을 한다면 초절정의 경지까지 넘볼 수 있을까요?”

“당연. 자네는 아직 젊으니 충분히 가능하지. 맞는 옷만 입는다면 천하제일인들 안 될까?”

천하제일!

하천웅의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적비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건 맥을 짚어야 알겠지.”

“그, 그럼 감히 어르신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거절하겠네.”

“예?”

하천웅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망할 영감탱이가 왜 안 해주는 거야?’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꿀꺽 삼키고는 굽실거렸다.

“어르신,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진맥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는 내가 떠돌이 약장수로 보이나?”

“아! 그, 그런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천웅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적비연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이 상황을 즐겼다.

그래, 더 조아려 봐라. 더, 더.

“내 진맥을 받기 위해 줄 선 사람들만 따지면 만검세가 연무장 예순 바퀴는 채워야 할 걸세. 그런데 이리 사사로이 진맥을 해주면 그들이 섭섭할 일이 아닌가?”

하천웅이 뺨을 씰룩였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영감 목숨을 살려줬잖아!

진짜 이렇게 비싸게 굴 거야?

그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적비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자네가 오늘 날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네. 하나, 사실 나는 오늘 납치를 당할 뻔한 거지, 죽을 뻔한 건 아닐세. 죽을 운명이었다면 강동칠괴가 진작 죽였겠지. 그렇지 않은가?”

“그, 그렇겠지요.”

“그러니 내가 진맥까지 해주는 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하천웅은 기가 막힌 억지논리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무림맹 신의가 원래 이렇게 꽉 막힌 인간이었나?

하긴. 좀 평범하진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납치당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줬는데 고작 진맥 한 번 하는 걸로 이렇게 비싸게 굴어?

적비연이 말을 다시 이었다.

“정 진맥을 받고 싶으면 후에 맹으로 찾아오게. 정식으로 접수하면 차례에 따라 진맥을 해주겠네. 뭐, 육 개월만 기다리면 될 걸세.”

‘육, 육 개월……?’

이렇게 되니 하천웅은 오히려 진맥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간절해졌다.

하천웅이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고는 말했다.

“외람된 말씀인줄 압니다만, 이동하는 동안 잠깐만 봐주시면 안 될는지요? 어르신의 조언을 꼭 듣고 싶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허참. 사람 난감하게 만드는군. 안 된다니까.”

‘영감탱이, 도대체 얼마나 잘나빠진 진맥이기에 이렇게 비싸게 구는 거냐?’

하천웅이 입술을 살짝 씹는데, 적비연이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혹시 지금 ‘이 영감탱이가 도대체 얼마나 잘나빠진 진맥이기에 이렇게 비싸게 구는 거냐?’ 하고 욕한 건 아닐 테지?”

“헛! 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하. 하. 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좋아, 자네가 그리 간절하다면 내 특별히 진맥을 해주지. 뭐, 빚진 것도 있으니 이왕 보침(補鍼)까지 놔주도록 하겠네.”

하천웅은 귀가 번쩍 뜨였다.

“오, 정말입니까? 보침까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어디 맥을 볼까?”

“예,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천웅이 얼른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적비연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맥을 짚었다.

“흐음.”

예상대로 평범하네.

딱히 무공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다만 좋은 환경 탓인지 어려서부터 영약으로 내공을 보충한 흔적이 있다.

지독하게 노력한다면 죽기 전에 초절정 언저리까지는 가능할 것 같지만…….

‘이놈이 노력파일리는 없고.’

겨우 이런 놈 때문에 이 난리를 겪어야 했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좋아, 어디 한번 당해봐라.’

손목에서 손을 뗀 적비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걸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천웅이 잔뜩 걱정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자네는 지금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네. 운기 방식에 문제가 있어.”

“이런! 어쩐지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공이 늘지 않더라고요. 그건 제 가문의 무공이 저와 맞지 않기 때문이었군요!”

아니. 그건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고.

하지만 적비연은 속내와 달리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혹시 요즘 무공을 수련할 때마다 피곤해지면서 그만두고 싶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정확하십니다.”

그래, 그건 네가 게을러서 그런 거지.

하지만 적비연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역시 체질적인 문제일세. 혹시 조금만 힘들어도 때려치우고 싶던가?”

“와, 어쩌면 이렇게 콕 짚어내십니까?”

“보통의 무인들은 힘들수록 중독성이 생겨서 더 하고 싶게 마련이지. 한데 자네는 만사 귀찮았을 걸세.”

“오오, 정말 그랬습니다. 진짜 신기하군요. 이렇게 저에 대해 속속 다 알아내시다니!”

“요즘 들어 신경도 날카로워졌을 테고.”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말하면 교주로 모실 기세.

적비연이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지금이 자네 인생에서 정점이 될 수도 있네.

“예에? 정, 정점이라고요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이제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여기까지가 끝이라니?

하지만 상대는 무림맹 신의!

이 세상에서 가장 몸을 잘 살피는 의원이 한 말이다.

그의 의술은 화타의 환생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젠장…… 그럴 수가……!’

적비연이 쐐기를 박았다.

“아마 반년도 지나지 않아 자네 몸은 점점 약해질 걸세.”

“그, 그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천웅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적비연이 한참을 뜸들이다가 대답했다.

“좋아, 어차피 약속한 일이니 내가 자네에게 보침을 놓아주지. 내 자네의 체질을 개선해서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내게 시술을 받으면 당장 공력이 향상되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걸세.”

“정말이십니까? 오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하천웅은 이제 엎드려 발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적비연은 내심 조소를 짓고는 침통을 꺼냈다.

“자, 그럼 어디 보세.”

“예, 어르신!”

적비연이 거침없이 하천웅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실제로 적비연은 하천웅의 막힌 요혈 몇 군데를 개통시켜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공력이 늘어났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리라.

체력도 늘 것이고.

하지만…….

스윽.

적비연은 침을 놓으면서 은근슬쩍 내력을 흘려보냈다.

사기였다.

이제 이 사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하천웅의 몸에서 말썽을 일으킬 것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네.”

“무엇입니까?”

“자네의 체질을 내가 고쳐주지만, 한 가지는 어쩔 수가 없네.”

“그게 뭔지요?”

“바로 흥분일세. 자네는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흥분해서는 안 되네. 흥분할 때는 내공이 뒤얽혀 체내에서 기의 폭발이 일어날 수 있네. 그러면 꽤나 고통스러울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응당 무인이라면 사사로이 흥분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지.”

하지만 다혈질인 네가 정말 흥분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특히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순간이라면……?

흥, 볼만하겠군.

침술을 끝낸 적비연이 마침내 마차에서 내렸다.

하천웅 역시 마차에서 내리며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확실히 달라졌다!’

하천웅의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내공이 증진되고 몸이 가벼워진 것이다.

‘과연, 무림맹 신의가 돌팔이는 아니었구나!’

자꾸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래, 흥분하지 말라했지.

이런 일로 들떠선 안 될 말이지, 암.

좋아, 오늘부터 달라진 몸으로 일취월장해 주마!

한편 적비연은 잔뜩 들뜬 하천웅을 힐끔 보고는 내심 웃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실컷 즐겨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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