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9화 (10/301)

9. 마침내 비동(秘洞)으로.

예상대로 적가장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이미 적가장 사람들은 악록산 기슭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긴 만검세가에서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녔을 테니 모를 수도 없었을 거다.

정문을 지키는 수문무사들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을 이끌던 조장이 한나절 사이에 싸늘한 주검이 되었단 소식을 들었을 테니 마음이 뒤숭숭할 수밖에.

한참이 지나서야 총관 우벽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 천기당주(天氣堂主) 어르신 오셨습니까?”

적비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데, 하천웅이 주변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내 미리 연통을 넣었을 터인데 어찌 이리 늦소? 어르신께서 오시는데 진작 나와 계셨어야지.”

마치 자기 수하를 대하듯 꾸짖는 말투.

이걸 그냥 확 까버려?

적비연은 내심 주먹이 올라왔지만, 우벽산은 그답게 침착함을 유지했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 조금 늦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하천웅이 나서며 말했다.

“하긴. 악록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초상집 분위기일 테군. 괴한들을 막지 못해 전멸을 당했으니. 쯧쯧.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바이오.”

말이 좋아서 위로지 그 속내는 뻔했다.

적가장 무인들을 눈앞에 대놓고 무시하는 것.

그 속셈을 알기에 수문무사들이 하천웅을 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하지만 우벽산은 속도 없는지 하천웅에게 포권하며 허리까지 굽혔다.

“저희 가문 대신 어르신을 지켜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적가가 공자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이, 어이. 그건 너무 갔잖아?

적비연은 저도 모르게 달려 나가서 우벽산의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하천웅 따위에게 이렇게까지 예를 차린단 말인가?

이래서야 마치 만검세가가 벽력적가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하천웅이 기고만장해져서는 큰소리를 쳤다.

“정말 큰일 날 뻔했소. 우리가 조금만 늦었어도 어르신께서 변을 면치 못했을 거요. 우 총관께서도 들어보셨을 거요. 금전칠괴라고.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아주 악랄한 조직이지. 게다가 무공 수준도 꽤나 고강해서…….”

“피곤하군. 잡설은 그만두고 들어가세.”

적비연이 까칠한 목소리로 말하자, 하천웅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예. 어르신. 들어가시죠.”

총관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적비연이 문득 멈추고는 돌아섰다.

“자네는 왜?”

“네?”

“자네는 왜 따라 오냐고 묻는 걸세. 여긴 적가장이 아닌가?”

“아, 예. 그렇지요. 하하. 저는 그저 걱정되는 마음에 어르신을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지켜…….”

“흥! 내가 어린애라도 되는 줄 아는가?”

“그, 그건 아니지만 역시 괴한들이 또…….”

“지나친 걱정일세. 그만 돌아가게.”

“아…… 하지만 적가장이라고 마냥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적가장은 가주가 부재한…….”

순간 적비연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고, 하천웅은 입을 다물고는 우벽산의 눈치를 살폈다.

우벽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비연이 하천웅을 보며 물었다.

“가주가 뭐? 무슨 말인가?”

“그, 그게 그러니까 가주께서 병치레를 하는 중이니 거의 부재한 상황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지요.”

하천웅이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적비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처음 말할 때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

분명 가주의 실종 상태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적가장에 간자가 있단 말인가?’

마침 우벽산도 기분이 언짢았는지 이맛살을 구겼다.

“공자께서는 말씀을 삼가주십시오. 혹여 가주님이 들으시기라도 하면 매우 서운해하실 겁니다.”

이미 들었다.

서운한 정도가 아니지.

그저 자근자근 밟아버리고 싶을 뿐이야.

하천웅도 실수를 인지하고는 서둘러 인사를 남겼다.

“커험. 알겠소. 그럼 어르신,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게. 이곳은 적가장이 아닌가? 장사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 이제 위험할 건 없을 테지.”

“아, 예…… 뭐.”

하천웅은 장사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아상이 그렇게 느꼈다는데.

하천웅이 돌아가자, 우벽산은 적비연을 지객당으로 안내했다.

“머무시면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가주님께서는 현재…….”

“그럴 것 없네. 바로 가지.”

적비연이 불쑥 꺼낸 말에 우벽산이 흠칫거리고는 물었다.

“바로 가시다니…… 어딜……?”

“가주님을 뵈러 말일세.”

“아…… 그래도 큰일을 겪으신 데다 여독이 쌓이셨을 테니 오늘 밤은 쉬시고…….”

“나는 괜찮네. 나보다는 가주님의 상태를 살피는 게 우선이니 가주전으로 가지.”

“아, 저 그게…….”

우벽산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이쯤에서 적비연은 준비해 온 것을 꺼냈다.

“알고 있네. 가주님께서 행방불명이 되셨을 테지?”

“……!”

우벽산이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적비연을 응시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는 머릿속으로 지금 이걸 순순히 인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발뺌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상의 표정이 워낙 진중한데다 거짓말이 통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그가 이실직고했다.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이거네.”

“이건……?”

적비연이 내민 서신을 우벽산이 받아 들었다.

놀랍게도 서신은 벽력가주 적비연이 아상에게 보낸 것이었다.

수십 년을 적가장에서 총관으로 지낸 우벽산이었다.

적비연의 필체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사실 이 서신은 적비연이 아상의 몸으로 만검세가에 잠깐 머무는 동안 직접 적은 것이었다.

그가 거듭 고민한 끝에 비동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내용인즉슨, 자신은 가주전의 비동에서 폐관수련 중이니, 아상이 오면 직접 가주전 안으로 들어와 진맥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만약 가신들이 가로막으면 이 서신을 보여주면 될 것이라는 첨언도 함께.

적비연이 우벽산을 힐끔 보았다.

“이제 됐나?”

“흐음.”

우벽산이 침음을 흘리자 적비연이 조바심에 말을 이었다.

“설마하니 자네가 가주님의 필체를 못 알아볼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예, 이건 틀림없이 가주님의 필체가 맞습니다. 의심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면 뭐가 문제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점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상한 점?”

적비연이 내심 긴장해서는 되물었다.

우벽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어르신이 가주전으로 들어가시면 가주님이 비동에서 나오신다는 말씀일까요?”

“그렇겠지. 가주전에 내가 도착했다는 사실 정도는 비동에서 알 방법이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가주님은 왜 저희에게 한마디 말씀도 남기지 않고 폐관수련에 들어간 것일까요? 게다가 가신들도 모르는 비동이라니. 그런 비동에 계시면서 왜 이렇게 서신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알린 걸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생각해 봄직한 내용이다.

이럴 땐 쓸데없이 꼼꼼하단 말이야.

좀 대충 넘어가 주길 바랐건만.

적비연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그런 건 자네가 알아야 할 일이지! 아니면 가주께서 자네들을 시험해 보는 걸지도 모르지.”

“시험이라고요?”

아무렇게나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우벽산은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무얼 시험한단 말씀입니까?”

“그야 내가 어찌 알겠나? 뭐, 이 기회에 누가 진짜 충신인지 가려보려는 걸지도 모르지?”

“갑자기 그런 걸 왜…….”

“나도 모르지. 다만 장사의 실세를 두고 만검세가와 벽력적가가 다투고 있는 상황인 데다 최근 적가장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으니 한 번쯤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혹여 적가장 내에서 만검세가에 줄을 대려는 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사실 처음 말을 꺼냈을 때는 되는 대로 떠든 것이었는데, 내뱉고 나니 왠지 그럴듯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빨리 비동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

“아, 갈 거야? 말 거야?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고 결정하게나! 자네가 막으면 나도 별수 없이 맹으로 돌아가겠네!”

적비연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우벽산이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신에 적혀 있듯이 가주님의 병세를 살피는 일일세. 말이라는 게 원래 얇은 귀로 들어가 가벼운 혀로 나오는 법이지. 그러니 내가 가주전으로 들어가면 일절 안쪽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말라 이르게.”

“명심하겠습니다.”

우벽산은 곧바로 적비연을 데리고 가주전으로 향했다.

그는 가주전을 지키는 사령검들에게 대략의 사정을 알리고는 가주전 바깥으로 경계를 강화하되, 안쪽으로는 일절 관심을 두지 말도록 일렀다.

묵검은 적비연을 찾으러 나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상황 정리를 끝낸 우벽산이 적비연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가주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적비연은 대충 손을 들어 보이고는 가주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마침내 실내로 무사히 들어선 적비연이 기감을 활짝 펼쳐 보았다.

늘어난 공력 덕분에 기감은 매우 예민해져 있는 상태.

‘확실히 아무도 없군.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적비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로 들어간 적비연은 책상 뒤쪽 책장으로 걸어가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서책을 꺼낸 자리에는 깊숙한 곳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적비연이 그 구멍으로 가볍게 지풍(指風)을 쏘았다.

툭!

약한 충격음과 함께 책장 전체가 꿈틀 흔들렸다.

기관을 작동시키기 위한 전초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때 지풍에 실리는 공력의 양은 정확해야 한다.

조금의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기관장치가 작동 준비를 마친다.

이제부터는 수동이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책장이 앞으로 조금 밀려 나왔다.

책장을 힘으로 끌어내면 그 뒤에 사람 두어 명 정도가 들어갈 만한 틈이 나타난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하지만 그 공간 자체가 기관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적비연은 그 빈틈으로 몸을 밀어 넣은 다음 다시 책장을 끌어당겨 입구를 틀어막았다.

이 과정이 온전한 수동인 이유는 이곳에 기관장치가 있다는 흔적을 최대한 없애기 위함이다.

어쨌든 이제 누군가 가주전의 집무실로 들어온다고 해도 아상의 존재를 찾을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책장 뒤의 공간에 들어온 적비연은 양쪽 벽의 정해진 위치에 열 손가락을 맞대고는 다시 공력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각 손가락에서 뻗어 나오는 공력의 양은 정확해야 하고, 그 공력이 유지되는 시간 또한 조금도 차이가 없어야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이 공간에 대해 듣고 나서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던가?

어쩔 때는 되고, 어쩔 때는 실패하고.

하지만 이제는 몸이 기억을 하고 있다.

마침내,

그그그그응!

놀랍게도 적비연이 서 있는 공간이 통째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적비연은 이 장치를 승강기(昇降機)라고 불렀다.

지하 깊숙이 가라앉던 바닥이 어느 순간 멈췄다.

마침내 눈앞에 비동이 드러났다.

가슴이 뛰었다.

적비연이 내려서자 승강기는 다시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매번 들어올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놀라운 장치란 말이야.’

맹도 아닌 한 가장에 이 정도로 정교한 기관장치가 있을 줄 누가 알까?

이런 기관이라면 설치 당시 강호에서 제일 뛰어난 기관 전문가를 고용했으리라.

과거 벽력적가가 얼마나 명성을 떨치던 가문이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자, 그럼 이제 내 진짜 몸을 살펴볼까?

적비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비동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벽과 천장에 박힌 야명주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빛이 있었다.

마침 저만치 쓰러져 있는 한 구의 시…… 아니지, 아직 죽은 게 확실하지도 않으니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어쨌거나 뭔가가 보인다.

천천히 다가간 적비연은 생각보다 반듯하게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을 보고는 울컥했다.

‘나구나……! 진짜 나다!’

자신의 몸을 제삼자가 되어 내려다보는 기분이란 무척 묘했다.

적비연이 얼른 다가가 맥을 짚으려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흠칫거렸다.

다음 순간,

“너냐?”

차가운 음성에 이어 쏟아지는 살기.

스윽.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신이 적비연의 목에 바짝 와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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