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침내 비동(秘洞)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지독한 살기.
벌써 여러 번 죽음을 경험했지만, 이러한 살기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다.
주륵.
목에 와 닿은 검신 때문에 가느다란 선혈이 생기면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순간 적비연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스쳤다.
어째서 비동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가주만 들어올 수 있는 이 공간에 누가 감히 들어왔단 말인가?
살기를 뿜어내는 자가 더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놈이냐고 물었다. 셋 센다.”
“무슨 뜻인지…….”
“하나, 둘.”
“잠, 잠깐!”
적비연이 서둘러 말했지만, 목소리는 가차 없었다.
“셋.”
순간 폭사되는 살기!
‘이런 미친……!’
적비연이 그대로 허리를 활처럼 젖혔다.
쒸이이이잉!
목에 와 닿았던 검신이 곧장 움직이면서 적비연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팽그르 회전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상대의 검이 끈질기게 뒤쫓아 왔다.
“헛!”
사각!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만 머리를 묶어둔 끈이 잘려나갔다.
사락!
허옇게 샌 머리가 산발이 되며 흩어져 날았다.
잘려 나간 끈과 하얀 머리카락이 희끄무레한 빛 속에서 눈발처럼 흩날렸다.
촤아아앗!
적비연의 발이 반원을 그리듯 미끄러지면서 성큼 물러났다.
‘젠장! 또 죽을 뻔했잖아!’
적비연이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어둠 속의 사내를 응시했다.
하필 야명주가 사내의 등 뒤쪽에 있어서 잔뜩 그늘진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누구냐?”
적비연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며 냉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랍군. 무림맹 신의가 이곳 비동에 나타날 줄이야.”
적비연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어둠 속에서 점점 드러나는 상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반듯한 이마 아래로 짙은 눈썹, 오뚝한 코와 날렵한 턱선, 얇게 다문 입술.
미중년의 사내.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강인해 보이는 인상.
어……?
적비연이 입을 척 벌렸다.
“너, 너는……?”
“날 알아보시는가? 하긴 몇 차례 본가를 방문했으니 날 기억할 수도 있겠군.”
알다마다.
“묵검……!”
적비연의 입에서 사내의 정체가 흘러나왔다.
맙소사, 묵검이 왜 비동에 있는 거지?
설마 묵검이 배신자……?
“묵검.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누가 할 소리를!”
찰나지간 묵검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쒸아아아앙!
시퍼런 검기가 적비연을 향해 거침없이 쇄도했다.
‘이런 대책 없는……!’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물러나면서 쌍장을 뻗었다.
퍼퍼엉!
검기와 장력이 충돌하면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반발력으로 적비연이 두어 장 미끄러지며 물러났다.
묵검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무림맹 신의께서 뜻밖에도 무공 수준이 상당하시군!”
“잠, 잠깐! 우선 말로……!”
하지만 묵검은 막무가내였다.
다시 시퍼런 검기 수십 줄기가 적비연의 전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제길! 이러다간 또 죽는 건 일도 아니겠어!’
적비연이 얼른 몸을 옆으로 굴렸다.
슈콰과곽!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기다란 칼자국이 상처처럼 마구 생겨났다.
등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적비연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필 무기로 삼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칼 한 자루 들고 싸워도 이길 수 없을 텐데, 맨몸으로 싸우려니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다.
‘미치겠네.’
반면 묵검은 여유가 있었다.
적비연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언제든 눌러 죽이면 그만일 벌레를 보는 듯했다.
묵검의 입에서 다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유가 뭐요?”
“그러니까 무슨 이유…….”
쉬이이이잇!
“허업!”
검은 바람이 순식간에 적비연을 덮쳐왔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검 한 자루라도 있었더라면.
초절정고수인 묵검을 이기진 못하더라도 몇 마디 말 나눌 기회는 있었을 텐데!
시퍼런 검기가 찰나지간에 목까지 날아들었을 때, 적비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이번에도 죽는구나.
한 번 더 다른 몸으로 환생할 수 있기를 기도할 수밖에!
척!
“…….”
다행히 칼날이 목을 썰어내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안 죽었나?
천천히 눈을 떴다.
“헉!”
어느새 바로 코앞에서 노려보는 묵검.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물러나다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그럼에도 묵검은 적비연의 목에 검신을 바짝 들이민 채 귀신처럼 따라붙었다.
“마지막이오. 무림맹이 왜 가주님을 노리는 거요? 가주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아……! 그런 거였나?
적비연은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묵검이 배신한 건 아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고요하게 얽혀들었다.
마침내 적비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면…… 믿을 수 있겠어?”
묵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턱짓을 했다.
일단 말하라는 뜻.
‘다행히 말할 기회는 얻었는데…… 제길,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총관에게 써먹은 방법은 절대 통하지 않을 거다.
평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는 호신위다.
그런 묵검도 모르게 아상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오히려 더 큰 의심만 사리라.
‘그냥 정면으로 부딪쳐 봐?’
그 외엔 방법이 없다.
당장 자신이 비동에 들어온 것부터 설명이 되지 않을 테니.
그러고 보니…….
“넌 어떻게 비동으로 들어온 거지?”
대답 대신 질문이 먼저 나가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묵검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기다리던 대답이 아니라는 뜻.
살기가 막 전해지려는 순간, 적비연이 얼른 입을 열었다.
“기다려! 기다려! 내가 먼저 말하지. 사실 난…….”
아, 진짜 미치겠네.
내 말을 믿으려나?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무림맹에서 온 신의가 비동에 제 발로 찾아온 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역시 정면 돌파다.
적비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토해내듯 소리쳤다.
“내가 바로 적비연이다!”
“…….”
“그래, 황당한 소리로 들릴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진짜야. 난 네 주인 적비연이다. 그리고 이곳 가주인 적비연이다.”
말해 버렸다.
저질렀다.
묵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발 믿어라. 제발 믿어라! 제발!’
마침내 묵검이 검을 스르르 내렸다.
오! 믿어주는 건가?
역시 묵검은 내 심복! 나의 진심이 통했다!
나의 외모보다는 내면을 알아보고 마음이 통하여…….
“영감탱이가 노망이 든 모양이군!”
쒸아아아아앙!
“우악!”
적비연이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슈콰가가가각!
느닷없이 날아든 검기 때문에 벽면 깊이 검상이 새겨졌다.
푸스스스……!
상처가 생긴 벽에서 돌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묵검! 기, 기다려! 진짜야! 내 말 좀 들어봐!”
“이 미친 영감이 감히 누굴 사칭하는…….”
“헉.”
다리에 힘이 풀린 적비연이 주저앉은 채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묵검이 오늘처럼 화내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묵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살벌한 기운에 떠밀리듯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살기로 번뜩이는 안광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다.
죽, 죽는다.
이대로는 진짜 죽는다.
내가 가장 믿는 충신인 묵검에게!
나를 가장 위해주는 심복에게!
‘이런, 상제 새끼야! 도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비극을 안겨주는 거냐?’
마침내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살기등등한 묵검이 바로 앞에서 검을 들어 올렸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의지가 읽힌다.
더 이상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안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 둘만의 추억! 그거라면!
“묵검! 내, 내가 여덟 살 때 생각 나? 내가 물어봤잖아. 하루 종일 나를 호위하면 똥오줌은 언제 싸냐고. 기억나지? 이건 우리만 나눈 대화잖아!”
아주 잠깐 묵검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죽음을 코앞에 둔 적비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묵검이 말했지! 수양이 깊어지면 생리현상 정도는 상당 시간 조절이 가능하다고! 그래서 내가 물어봤잖아! 그럼 내가 똥오줌 쌀 때도 지켜보냐고! 묵검은 다 지켜본다고 했었지! 내가 배탈이 나서 설사하는 것도 다 지켜봤다고 했잖아! 그 지독한 냄새를 참으면서 말이야! 내가 적비연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까지 알겠냐고! 응?”
하아, 이게 뭔가?
어떻게든 나를 증명하기 위해 둘만의 추억을 꺼내려던 것인데…….
왜 이런 더러운 이야기만 떠오르는 거지?
그래도 절박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묵검의 감정이 아주 약간 동요한 것을 확인한 적비연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불공평하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지? 대신 묵검도 똥오줌 싸는 거 보여달라고 졸랐잖아! 그래서 나랑 같이 계곡에서 오줌 싼 적도 있잖아! 정말 기억 안 나? 이건 우리만 아는 이야기라고! 이런 이야기를 내가 아니면 누가 알겠어? 더 얘기해? 그때 내가 묵검이 오줌 누는 걸 보면서 생각보다 묵검의 거시기 크기가…….”
“거기까지.”
이건 너무 간 건가?
어째 아까보다 더 무서운 표정인데?
그나마 다행히 묵검이 검을 스르르 내렸다.
“믿, 믿는 거야?”
하지만 묵검은 여전히 싸늘한 눈초리로 적비연을 응시했다.
“설명해야 할 거요. 충분히. 하지만 재미없는 농을 하는 거라면…….”
뒷말을 잇진 않았지만 묵검의 전신에서 그 내용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적비연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법 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묵검은 시종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정체불명의 여인이 전해준 비서와 영약.
그리고 기적처럼 일어난 환생의 연속.
그 모든 과정을 쏟아낸 적비연이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된 거야.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
모든 사정을 전하고 나자 비동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고요하게 들렸다.
적비연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안다.
한 번에 와닿진 않겠지.
실제로 겪은 입장에서도 황당하니까.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래도 못 믿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
다만 다행이라면…… 더 이상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까?
마침내 묵검의 입이 열렸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태상가주님이 돌아가셨을 때, 묘지에서 내게 한 말을 기억하시오?”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적비연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기억하고말고.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날이 아니랄까 봐.
온 세상이 눅눅하게 젖었던 그날.
홀로 아버지의 묘지 앞에 섰을 때 묵검에게 말했었지.
이렇게.
“하늘이 대신 울어주었으니 이젠 흔들리지 않을 거다. 네가 나를 지켜주는 만큼 나는 강해질 거다. 나를 지켜라, 묵검.”
적비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묵검의 눈동자가 그날의 눈빛을 품었다.
다음 순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군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묵검이 그날처럼 그 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더니 포권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주군!”
적비연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았…… 군.
“다행이야. 네 손에 죽지 않아서. 혹여 그랬더라면…….”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식 웃었다.
“네가 너무 괴로워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