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1화 (12/301)

11. 네가 의술을 알아?

“흐음.”

적비연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맥을 짚던 손목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자신의 본체를 내려다보았다.

“어떻습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묵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적비연은 대답 대신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눈가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칠십 평생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

물론 칠십 년의 세월은 적비연의 경험이 아니다.

아상의 기억을 흡수했기에 느끼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본체는 매우 기이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마치 수련 중인 사람처럼 기의 흐름이 일정했고, 호흡도 일정했으며, 맥박 역시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살아 움직일 때보다 더욱 정직한 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인간의 몸이 이렇게 일정한 수준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가?

마치 인간이 아니라 기관장치인 것처럼 일정한 움직임이다.

‘설마 내가 강시가 된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의원으로서 직감이랄까?

게다가 강시라면 이미 사이한 기운이 물씬 풍겼을 것이다.

하지만 본체에 흐르는 기운은 오히려 무척 정연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살아 있되, 혼은 비어 있는 상태.

완전히 빈 그릇.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아상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도 해석이 안 될 줄이야.

“공위증은 좀 어떻습니까?”

묵검의 질문에 적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여전해. 본체의 체질이 변하진 않았어.”

“그렇다면 이대로 본체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도 문제군요.”

적비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이 상태라면 본체로 돌아가 봐야 다시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할 운명이다.

그나저나…….

“네가 비동의 위치를 알고 있을 줄이야. 아버지한테 완전히 속았어.”

전대 가주가 살아 있을 때 묵검에게만은 비동의 위치와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혹시라도 지금처럼 적비연이 비동 안에서 의식을 잃는 일이라도 생길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귀띔도 해주지 않으시다니.

뭐, 아버지 속내야 충분히 짐작한다.

자신이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잠적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어려서부터 워낙 별나게 굴었으니까.

묵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데 죽을 때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환생을 하셨다니 다시 생각해도 정말 놀랍군요.”

“그러게. 아상 어르신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싹 뒤져도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어. 신의라 불리는 사람조차도 모르는 현상이란 뜻이지.”

“그렇다면 우선 그 묘령의 여인부터 찾아내는 게 급선무겠습니다.”

“그렇지. 지금으로서는 단서가 거의 없는 게 문제지만 추적을 하다 보면 뭐라도 나올 테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좋아. 그럼 우선 본가의 안정부터 되찾자. 그동안 내가 병치레를 하느라 가장의 상태가 말이 아닐 테니.”

적비연이 힐끔 보며 말하자, 묵검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묵검의 주된 임무는 가주인 적비연을 호위하는 것이었지만, 적가장의 전반적인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

확실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재정 상태는 점점 기울었고, 장사의 실세는 만검세가가 거의 장악하는 분위기였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우선 이 몸은 좀 적응되지 않는데…….”

“죽여 드릴까요?”

“너무 살벌한 거 아냐?”

“어차피 환생하실 테니. 고통 없이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농담…… 이지?”

“농담입니다.”

묵검이 그제야 희미하게 웃었다.

내심 긴장했던 적비연도 픽 웃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 긴장을 놓고 웃는 시간이었다.

웃음을 거둔 적비연이 자못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생한다고 무턱대고 죽어대면 곤란해. 언제까지 가능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아상의 신분을 차지한 이상 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볼 생각이야. 본가를 강호 정점에 올려놓기 위해서 말이지.”

“하긴 신의의 신분이라면 쉽게 생각할 수 없죠. 그 나름의 이점이 있으니.”

잠시 생각을 정리한 적비연이 묵검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아무래도 본가에서 만검세가와 내통하는 자가 있는 듯해.”

“가주님의 상황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겠군요.”

“그렇지. 일단 나는 건재하고 밀실에서 수련 중인 걸로 한다. 다만 폐관수련은 아니고, 묵검과 아상 어르신만 대면하는 정도로 해두지. 모든 일의 진행은 내가 너를 통해서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그걸 증명할 만한 글을 적어줄게.”

“하면 우 총관이 서운해하지 않을까요?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가 생길 때까지는 최대한 신중해야지. 그리고 우 총관이라면 이미 내가 약을 쳐놔서 먹힐지도 몰라.”

“약이요?”

“뭐, 그런 게 있어.”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지금쯤 우벽산은 적비연이 한 말을 곱씹고 있을 거다.

충신을 가리기 위해 가주가 뭔가를 계획한다는 그 말을 말이다.

묵검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폐관수련이나 다름없다고 일러두면 상당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일단 묵검은 현재 본가의 문제점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게 뭔지 알아봐 줘. 그동안 내 몸을 돌보느라 너무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

“왜 그렇게 보고 있어?”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던 묵검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예전의 주군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반갑군요.”

“예전의 나?”

되묻던 적비연이 문득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그 시절의 나는 언제나 의욕이 넘쳤으니까.

적비연이 자신의 본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변화가 일어났으니. 최악의 상태에서 일어난 변화는 반가운 신호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거든.”

“옳은 말씀입니다. 가장의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빨리 파악한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는 지객당에 머물도록 할게. 맹에 서신을 보내면 한 달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혹시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날 지켜줄 생각은 하지 마.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날 철저히 아상 어르신으로 대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군이 또다시 환생한다면 제가 알아볼 방법이 있겠습니까?”

“흐음…… 한 가지 있어.”

적비연이 앞섶을 풀어헤쳤다.

오른쪽 가슴 언저리의 맨살을 드러내자 붉은 반점 세 개가 보였다.

“이 반점들. 어쩐지 내가 환생한 몸마다 이 세 개의 붉은 반점이 있었지.”

그랬다.

처음 남운재의 몸을 빌려 깨어났을 때도, 칠괴의 몸으로 환생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 외에는 깨어나자마자 죽어버려서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이 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났을 때마다 똑같은 부위에 붉은 반점 세 개가 찍혀 있었다.

선천적으로 생긴 반점은 아니다.

아상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이런 부위에 붉은 반점이 있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남운재와 칠괴도 마찬가지.

그 말은 곧 자신이 그들의 몸을 빌려 환생한 다음에 생겼다는 뜻이다.

“그럼 오른쪽 가슴에 붉은 반점 세 개가 있다면 주군이라고 생각해도 되겠군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어. 너무 많이 죽었더니 피곤하네.”

* * *

다음 날 아침, 적비연은 연무장 한쪽에 널려 있는 거적들을 보고는 시종을 불렀다.

“저게 다 무엇이냐?”

“예, 어르신. 어제 악록산 기슭에 마중을 나갔다가 변을 당한 자들의 시신입니다.”

“하면 그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고 어찌 적가장 복판에 늘어놓은 것인가?”

“그것이…… 다수는 가족에게 돌려보냈으나, 연고가 없는 이들은 본가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음. 그렇군. 잘 알겠네.”

시종이 물러가고 나서 적비연은 시신들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거적을 들어 올려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가 찾는 시신 한 구가 보였다.

‘남운재…….’

한때나마 몸을 빌렸던 남운재였다.

남운재의 기억은 여전히 자신에게 남아 있는데, 정작 그 본체는 이렇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가슴의 붉은 반점이 보이지 않는군.’

분명 자신이 이 아이의 몸으로 살아 있을 때는 오른쪽 가슴에 붉은 반점이 있었다.

하지만 혼이 빠져나온 지금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딱한 아이였지.’

남운재는 평생을 외로이 지내던 아이였다.

그를 챙겨준 사람은 유일하게 막천수뿐이었다.

때론 아버지 같았고, 때론 친형 같았으며, 때론 친구가 되어주었던 막천수였다.

한데 이제 저승길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너는 외롭지 않을지라도 막 조장의 남은 가족이 안쓰럽구나.’

그러고 보니 그 아내가 중병에 시달린다지?

몸을 일으킨 적비연이 가장을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

“어르신, 어딜 가십니까?”

어느새 우벽산이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네.”

“하면 호위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네.”

“하지만 악록산에서도 변을 당할 뻔하셨으니, 부디 부족한 저를 봐서라도 사양치 말아주십시오.”

우벽산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뭐, 상관없으려나?

“알아서 하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적비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를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들었는가? 어제 벽력적가가 큰 화를 당했다던데?”

“그 얘기는 들었지. 무인 백여 명이나 죽었다면서?”

“아니, 이백 명이라던데?”

“허어, 거참. 무림맹 신의를 마중 나갔다가 봉변을 당했다며?”

“그러게 말일세. 사실 벽력적가도 이젠 끝물이긴 하지. 빚도 많다던데.”

“엇? 쉿! 저분이…… 그 신의 아냐?”

이것들아, 작작 해라. 다 들린다.

적비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나참, 이백 명이 당했다고?

뭐? 끝물?

아예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떠벌리지 그러냐?

아무리 소문이 부풀려지게 마련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설마 이것도 만검세가의 수작이려나?

그러고 보니 만검세가에 대한 칭찬은 자자했다.

만검세가의 차남이 신의를 구했다는 둥, 이제 장사의 실세는 만검세가라는 둥, 만검세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둥…….

잠시라도 듣기 싫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참을 수밖에.

그렇게 번잡한 거리를 벗어나 조금 한적한 길로 접어든 적비연은 곧장 막천수의 집으로 향했다.

원래 그는 막천수의 집이 어딘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남운재의 기억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마침내 저만치 허름한 집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그 집이 바로 막천수의 가족이 머무는 곳이었다.

한데 막천수의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저런…… 쯧쯧. 어쩌면 좋누?”

“정말이지 요즘 적가장과 관련 있는 자들은 죄다 안 좋은 일만 생긴다니까.”

“그래도 한때 잘나가던 곳이었는데 어쩌다가…… 쯧쯧.”

적비연이 눈살을 구기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무슨 일이지?’

그가 사람들을 비집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초상집의 참담한 광경이 드러났다.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을 아이들이 거적에 덮인 막천수의 시신을 붙들고 울고 있었고, 안색이 창백한 여인은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흘릴 눈물마저 말라 버린 듯한 표정.

그곳에는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건장한 사내들이 막천수의 집을 온통 들쑤시고 있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노인이 그 사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막천수가 입버릇처럼 돌팔이라고 부르던 그 동네 의원 왕진상(王陳相)이었다.

마침내 집을 들쑤시던 건장한 사내들이 왕진상 앞에 각종 잡동사니를 쏟아냈다.

“의원 나리. 돈이 될 만한 건 이게 전부입니다.”

사내 한 명이 말하자, 왕진상이 이맛살을 와락 구겼다.

“그래도 적가장 수문장이라기에 형편이 좀 나은 줄 알았더니. 완전 상거지가 따로 없군! 전부 챙겨서 가자. 특히 곡식들과 약재는 모조리 압수해라.”

“예, 나리.”

건장한 사내들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여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왕진상의 바짓단을 붙들었다.

“나리. 그건 안 됩니다. 저라도 살아야 이 아이들을 먹여 살리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주시면…….”

“아, 시간은 무슨 시간? 그동안 내가 시간을 안 준 줄 아는가? 자네 남편이 오늘까지는 꼭 갚겠다고 약조를 했단 말일세! 한데 갚기는커녕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으니, 나도 내걸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사정을 봐주세요. 나리.”

“사정은 개뿔. 자네 남편이 죽은 건 안타깝지만 계산은 바로 해야 할 일이지. 가만…….”

왕진상의 눈길이 거적에 덮인 시체로 향했다.

그가 곧 건장한 사내에게 턱짓을 했다.

“저 시체라도 뒤져보게. 뭐라도 나오면 챙겨야지.”

“예, 의원님.”

사내가 다가가자 아이들이 얼른 그 앞을 막아섰다.

“우리 아빠 만지지 마세요!”

“저리 가! 나쁜 사람!”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

사내가 윽박을 질렀지만 아이들은 막무가내였다.

“싫어! 안 비킬 거야! 우리 집에서 나가란 말이에요!”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

사내가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탁!

아이의 뺨을 내리치려던 사내가 움찔 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웬 노인이 자신의 손목을 낚아챈 게 아닌가?

적비연이었다.

적비연이 그 어느 때보다도 노기 서린 음성으로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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