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네가 의술을 알아?
“뉘시오?”
사내가 손목을 빼내고는 뒤로 슬쩍 물러났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민첩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은 무공을 익혔을 확률이 높았다.
반면 왕진상이 데려온 사내들은 대부분 힘깨나 쓰는 장사였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
적비연이 싸늘한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아이에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더구나 초상집에 찾아와 이 난동이라니.”
그러자 뒤에서 지켜만 보던 왕진상이 다가왔다.
“흥!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끼어들 바가 아니오.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중이니까.”
“정당한 권리?”
“밀린 외상값을 받으려는 것일 뿐이오.”
“외상값이라. 무릇 의원이라면 사람의 목숨을 가장 중한 가치로 여기는 법이거늘. 초상집에 찾아와 외상값을 독촉해?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도리라는 것을 모르는가? 너희들이 그러고도 사람이더냐?”
“뭐요? 듣자듣자 하니까 이 영감이 진짜 못 하는 말이 없구먼! 내가 그간 이 집구석에 얼마나 많은 호의를 베푼 지 아시오? 이 약재만 해도 자그마치 이백 냥이오! 오늘까지 갚겠다는 말만 믿고 선심을 썼는데, 갚기는커녕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돌아왔으니 내 손실은 누가 채워준단 말이오? 나는 뭐 뒷마당 파서 약재 만드는 줄 아시오?”
“흥. 얼마나 대단한 약재인지 한 번 보지.”
화가 난 적비연이 성큼성큼 다가가 왕진상의 손에 들린 약재 꾸러미를 휙 낚아챘다.
“엇?”
당황한 왕진상을 뒤로하고 적비연이 꾸러미를 펼쳐 약재들을 살펴보았다.
“이건…… 청귀자(靑貴茨)로군. 그리고 복순지(福荀芝)와 자경초(紫景草). 영지(靈芝)와 구기청(九氣菁)도 있군. 청귀자는 빛깔이 희미하고, 복순지는 뿌리에 맥아리가 없고, 자경초는 너무 짙은 색이야. 영지는 볼 것도 없고, 구기청은 너무 작다. 죄다 소여물로도 쓰지 못할 최하품이로군. 그래, 이것들이 얼마라고 했지? 이백 냥이라고 했나?”
적비연이 줄줄 읊어대자, 왕진상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악덕함을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이런 노망난 늙은이가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드는 거야? 뭐 하는가? 저 늙은이에게서 어서 내 약재를 빼앗아!”
“예!”
건장한 사내가 적비연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휘이잉!
차아앙!
검은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타난 호위무사가 검을 뽑아 들며 앞을 가로막았다.
“헉!”
사내와 왕진상이 헛바람을 삼키며 물러났다.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도 연신 웅성거렸다.
적비연을 등진 호위무사가 두 사람을 싸늘한 눈초리로 훑었다.
“물러나라. 이분은 무림맹 신의시다.”
“헉……!”
“신, 신의……!”
이내 두 사람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림맹 신의가 여긴 왜……?
이거야 말로 완전 엿 된 일 아닌가?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차갑게 일렀다.
“이런 최하품 쓰레기를 이백 냥이나 받아 처먹었다고? 이런 양심을 똥통에 처박은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네놈이 그러고도 의원이라고 할 수 있느냐?”
추상같은 고함 소리에 왕진상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그, 그러니까 그것이…….”
“비켜.”
“네, 네?”
“비키라고.”
“아, 예.”
왕진상이 연신 굽실거리며 물러났다.
적비연이 성큼성큼 걸어가 여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여인의 병세가 무엇이냐?”
왕진상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러니까 기가 허하고, 두통이 심하며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잦은 구역으로 평범한 음식은 소화시키기 어렵다 합니다.”
“해서?”
“네?”
왕진상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자 적비연이 미간을 구겼다.
“해서 처방을 어찌 했느냔 말이다.”
“아, 예. 그것이…… 맥을 짚어보니 요혈 몇 군데가 막혀 있어 경화된 혈 자리를 풀고, 기의 흐름을 돕기 위해 청귀자와 자경초, 그리고…….”
“됐다. 더 들어볼 것도 없군.”
적비연이 손을 내젓고는 여인의 손목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맥이 전해진다.
예전 같으면 이 맥으로 기의 흐름이나 대충 볼 줄 알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치 여인의 몸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것처럼 자세한 분석이 가능해졌다.
확실히 놀라운 경험이다.
‘과연 증세는 틀림없어.’
하지만 처방은?
완전히 틀렸다.
대충 보면 왕진상의 처방이 일리 있는 것 같지만, 그 근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히려 왕진상의 처방이 독이 되고 말았다.
청귀자로 음의 기운을 보한 것은 오히려 음기가 넘치면서 막힌 혈 자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자경초는 무리하게 기를 부추겨 두통을 더 심하게 만든 셈이었다.
게다가 발진이 일어난 곳에는 봉침(蜂針)까지 제멋대로 놓아서 내성만 더 키운 셈이 됐다.
적비연이 차갑게 일렀다.
“기가 막혔으면 무조건 뚫으려 할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이 무엇인지부터 파헤쳐야 하는 것을. 무조건 힘으로 뚫으려니 해결될 리가 있나?”
“그, 그럼 근원이라는 게……?”
“독충에게 쏘였으니 응당 독부터 제거했어야지.”
“아…….”
여인도 왕진상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적비연이 여인을 바로 눕히고는 서둘러 침통을 꺼냈다.
“우선 독을 빼낼 것이니 마음 편히 가지시게.”
“네, 나리.”
적비연이 곧 거침없이 침을 놓았다.
왕진상은 물론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
“오오, 신의의 침술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손놀림이 빠르시군. 저것 좀 봐.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셔.”
마지막으로 명치 쪽에 침을 놓자, 여인이 ‘윽!’ 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다음 순간,
“우우욱! 쿨럭!”
여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그것만으로도 여인의 혈색이 좋아졌다.
“아아, 속이 무척 편안해졌어요, 나리.”
“다행이군. 이제 잘 쉬기만 해도 몸은 건강하던 때로 돌아갈 걸세.”
“아아, 이렇게나 간단히…….”
여인은 물론 지켜보는 왕진상과 마을 사람들 모두가 탄성을 터뜨렸다.
적비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적 가주의 전언이네만…….”
그의 시선이 막천수의 시체로 향했다.
싸늘하게 식은 주검을 보자니 마음 한편이 시큰하다.
적비연은 일부러 모두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특근수당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지원을 끊지 않겠다고 하니 너무 걱정 말게.”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일도 아니지. 그리고 적 가주가…… 흐음…… 미안했다고 전해달라더군.”
적비연의 말에 여인이 구슬프게 흐느꼈다.
그때 왕진상이 불쑥 나서며 분위기를 깨트렸다.
“엇? 그럼 밀린 외상값도 모두 갚을 수 있겠군요! 그러니까 계산을 해보자면…….”
따악!
“아윽!”
왕진상의 뒤통수를 후려친 적비연이 눈을 치떴다.
“네놈이 엉터리로 처방을 하는 바람에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한데 뭐? 외상값? 오히려 네놈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해도 모자랄 판이야!”
“에, 저 그러니까…… 그것이…….”
“어디 물어나 보자.”
“예? 아, 예.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굳이 오늘 같은 날 쳐들어와서 돈을 받으려는 이유가 뭐냐?”
“아…… 그것이 실은…….”
왕진상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적비연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곳 장사에 약재가 씨가 말라 되찾아가려는 거였다? 그 참에 밀린 외상값도 받아내고?”
“그, 그렇습니다. 마침 오늘이 약조한 날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소여물로도 쓰지 않을 이딴 쓰레기를 이백 냥씩이나 받아먹은 거냐?”
“그, 그건…….”
“됐고. 갑자기 장사에서 왜 약재가 귀해진 건지나 읊어봐.”
“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약재를 구하려면 만강원(萬剛院)으로 가야 합니다. 어르신께서 약재가 필요하시면 만강원으로 가신다면…….”
“잠깐, 만강원이라면…….”
“아, 어르신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만강원은 만검세가가 관리하는 의원입지요. 아주 큰 의원인데 그곳이라면 현재 약재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금액은 좀 나갑니다.”
이것 봐라?
장사에서 약재가 사라졌고,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은 만검세가가 관리하는 만강원이라?
이거 냄새가 나는데?
“약재가 갑자기 귀해진 이유는 무엇이냐?”
“그, 그건…… 그러니까…… 저어…….”
왕진상이 은근히 적비연의 눈치를 살폈다.
적비연이 빨리 말하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곧 말을 이어갔다.
“사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벽력적가주가 병치레를 하면서 약재를 긁어모으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두어 달 전부터 돌았으니까요. 소속 무인들 봉급까지 삭감해 가며 그랬으니 말 다했지요.”
뭐라고?
그럼 그게 나 때문이라고?
적비연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그럼 이 현상이 전부 벽력적가 때문이다?”
“뭐, 일단은…….”
“누가 그런 망발을!”
“어이쿠, 어르신 죄송합니다!”
왕진상이 바짝 엎드리며 사죄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 의아한 기색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무림맹 신의가 지나치게 적가를 감싸는 것 같지 않은가?
심호흡을 한 적비연이 서둘러 수습했다.
“내가 적 가주를 뵈러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은 곧 내 탓이라는 말도 되렷다! 그게 아니면 나를 오만가지 약재가 없으면 가벼운 병조차도 치료하지 못하는 무능한 의원으로 보았거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찌 신의를 감히…….”
적비연은 입을 꾹 다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 소문이 퍼져 있을 줄이야.
봉급 삭감이 사실이더라도 장사의 영약을 다 쓸어간 건 아니다.
그래, 자신이 살기 위해 한동안 영약을 많이 복용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었겠나?
그제야 저잣거리를 지나쳐 오면서 들은 이야기들이 이해가 된다.
어쩐지 적가에는 냉담하고 만검세가에는 우호적이더라니.
확실히 냄새가 난다.
아니, 아주 대놓고 악취가 난다.
‘만검세가 이 잡것들이 누굴 만만히 보고 개수작을……!’
정말이지 내가 의원이었다면 이런 개수작질을 진즉 눈치채고 한마디 했을…….
가만, 지금 나 의원 맞잖아?
그것도 중원 제일의 신의!
순간 적비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래, 그렇다면!’
적비연의 입매가 씨익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곧 왕진상을 엄하게 꾸짖었다.
“어쨌든 너는 환자를 위험에 빠트릴 뻔했으니 더 이상 이 집에 얼씬도 하지 마라. 당장 꺼져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왕진상이 사내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적비연은 여인에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일러주고는 곧바로 적가장으로 귀환해 가주전으로 갔다.
묵검과 미리 손을 써둔 바가 있었기에 그를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으레 가주의 병세를 살피는 일이라 여길 터였다.
“묵검!”
“예, 주군.”
묵검이 방 안에 홀연히 나타났다.
“뭘 좀 사야겠다.”
“분부하시면 준비하겠습니다.”
“전각 한 채. 사 층 이상으로.”
“알겠습…… 음? 예?”
“이왕이면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저어…….”
“최대한 서둘러 주면 좋겠어.”
묵검이 멍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럴 돈이 없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