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3화 (14/301)

13. 네가 의술을 알아?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주군…….”

“아, 나한테도 일단 생각이 있어서 그래. 이건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거든.”

“저어, 주군…….”

“아마 장사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야. 어쩌면 중원의 모든 사람들이 놀랄지도 모르지.”

“주군……?”

“이 계획이 성공하면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 사조가 될 거다.”

“주군!”

그제야 적비연이 망상을 거두고는 돌아보았다.

“왜?”

“저어…… 그러니까…….”

“묵검답지 않게 뭘 망설이는 거야?”

결국 묵검이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돈이 없습니다.”

“응?”

“어떤 계획이 있으시든…… 돈이 없습니다.”

적비연이 묵검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정도야?”

“예, 당장 본가의 가장 큰 문제점을 알아보라 하셨지요? 가장 시급하고 큰 문제는 바로…….”

“돈이 없다?”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나?”

“겉은 멀쩡하나 속이 곪아 있습니다. 무인들 봉급이 삭감 된지는 꽤 됐고, 빚은 점점 쌓이는 중입니다.”

“흐음.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완전히 헛소문은 아니란 거군.”

“죄송합니다, 주군.”

“묵검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 그동안 내가 가장의 일을 등한시한 책임이니. 그나저나 그럼 돈을 빌릴 만한 곳은?”

“그게 이미 빚이 상당한 수준이기에…… 자금줄이 모두 막힌 상황입니다. 당장 기존 빚을 기일 내로 변제하지 않으면 가장 내의 전각마저 넘어갈 판입니다.”

허어, 전각이 넘어간다고?

아무리 내 한 몸 살피느라 가장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었다지만, 이건 너무 심각한 수준인데?

하긴. 공위증을 앓은 후부터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으니.

모든 걸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고 관심도 두지 않았지.

이러니 본가를 떠나서 만검세가에 들어가려는 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거고.

“변제 기일은 언제까지지?”

“가장 시급한 건 두 달 정도 남은 것으로 압니다.”

“가장 시급하다는 말은…… 그것 외에도 계속 있단 말인가?”

묵검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말해봐.”

“현재 본가의 전각 여섯 채가 담보로 잡혀 있습니다.”

“뭐, 뭐라고?”

적비연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정말이지 뒷목 잡고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나이가 드니 정말 뒷골이 뻐근해지긴 하는구나.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묵검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본가의 전각 여섯 채가 담보로 잡혔고, 빚을 기일 내에 변제하지 못하면 전부 빚쟁이들 손에 넘어간다?”

“예, 주군.”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아무리 내가 집안일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지만……!

“총관! 우 총관 어디 있어?”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자, 묵검이 당황해서 말렸다.

“주군, 고정하시…….”

“놔 봐. 도대체 우 총관은 그동안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우 총관! 우 총관!”

마침 우벽산이 헐레벌떡 가주전으로 달려 들어왔다.

“무, 무슨 일입니까? 설마 가주님이 잘못되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예? 무슨 말씀을……?”

“어째서 이렇게 빚이 많냐고 물었다! 그동안 우 총관이 어떻게 재정 관리를 해왔기에 본가가 빚더미에 눌러 앉았느냐고! ……적 가주가 매우! 진노하시더군!”

“아…….”

그제야 우벽산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적 가주는 조용한 곳에서 안정해야 하다 보니 내게 전달을 부탁하셨네. 자, 그러니 말해보게!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우벽산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가주님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여러 영약을 구하다 보니 자금이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우선 기둥이 튼튼해야 집도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는 법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영약을 구했기에 그러는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만, 최근 약재값이 상승하여 자금이 많이 들었습니다.”

“약재값이 상승한 이유는 적가장이 약재를 긁어모았기 때문이라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가에서 약재가 필요할 때쯤 마침 장사에서는 약재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역시 본가가 약재 구한다는 소문을 미리 입수하고서는 만검세가에서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

이 약아빠진 것들.

“그래서 가주께 구해 드린 영약은 무엇인가?”

“만년설삼(萬年雪蔘) 한 뿌리, 천년설삼(千年雪蔘) 여섯 뿌리, 공청석유(空淸石乳) 다섯 방울,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 한 뿌리, 천년하수오…….”

“잠깐. 잠까안!”

“예?”

“지금 그걸 내가 다 먹었다고?”

“예? 어르신이요?”

아차. 또 실수.

“아니, 그러니까 그 많은 걸 지금 내가 진료하는 적 가주가 다 드셨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런 걸 먹은 기억이 전혀 없는데? ……라고 적 가주가 말하던데.”

“그러실 수도 있겠군요. 대부분 영약을 푹 달여서 진액만 드렸으니까요.”

“왜 그런 짓을…….”

“영약은 달여서 드셔야 한다고 어르신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벽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기억난다.

물론 적비연의 기억이 아니라, 아상의 기억이었다.

공위증 때문에 약재를 날것으로 복용해 봐야 소용도 없고 흡수도 어렵다고 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분명 영약을 굳이 먹을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어차피 공력이 소실되니 영약으로 보충해 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놈의 성질 때문에.’

그래, 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래서 뭐가 됐든 영약을 구해오라고 자꾸 지시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푹 달여 온 약탕을 복용했다.

약재에 대해 시녀가 줄줄 읊어주었지만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살고 싶어서 먹고는 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이미 희망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하아, 그런데 그동안 그 비싼 걸 많이도 처먹었구나.

이래서 생각 없이 살면 안 되는 건데.

제아무리 훌륭한 영약도 복용한 자가 흡수력이 낮으면 맹물만도 못한 법.

한데 공위증이 걸린 몸이었으니 오죽하랴.

이거야말로 온갖 귀한 재료들을 뒷간 오물통에 쏟아버린 꼴이 아닌가?

후우. 그래, 가세가 기울 만도 했겠다.

후회스럽지만 어쩌겠나?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지.

“끄응.”

적비연이 침음을 흘리자, 우벽산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당연히 문제지.

지금 집안이 통째로 엄한 놈에게 넘어가게 생겼는데.

하지만 그 속내를 감추며 적비연이 한숨 섞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적 가주는 이 사실을 잘 모르더군. 어째서 자네는 가주님을 그리 모셨는가? 이는 자네에게도 책임이 있네.”

“죄송합니다, 어르신. 여러 차례 재정 상태에 대해 고한 적이 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들으시려 하질 않으시니…….”

우벽산이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봐야 제 주인의 뒷담화만 하는 꼴이니 스스로도 머쓱했으리라.

대신 그가 말을 돌렸다.

“한데 가주님은 본가의 재정 상태를 왜 갑자기 어르신께…….”

“커험. 가주님과 내가 추진하려는 사업이 있네. 하지만 이래서야 제대로 진행하기도 어렵겠군.”

“대체 어떤 사업이기에…….”

“자세한 건 기밀사항이네. 가주님과 나만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니 자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는 건 이해해 주게.”

“아…… 예.”

우벽산이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일전에 말한 ‘충신을 가리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가주가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 적비연이 한마디 덧붙였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일단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전각 하나가 필요하네.”

“예? 전각이라면…… 사람이 드나드는 건물…… 그 전각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다른 전각도 있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우벽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각이라니.

전각이 뉘 집 똥개 이름인가?

말 한마디 하면 어디서 뚝딱 생기게?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적가장의 재정 상태가 여유로울 때도 그런 건물 하나를 사들이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벽력적가가 무림명가이긴 했으나, 부유한 가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벽산이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어떻게든 자금이 필요하시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아직 돈을 빌릴 만한 곳이 있다는 건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게 어디지?”

“만검세가입니다.”

“……!”

적비연의 표정이 대번 굳어졌다.

하필 돈 빌릴 수 있는 곳이 만검세가밖에 없다니.

“다른 곳은?”

“없습니다. 이미 웬만한 전장과 상단에는 빚이 있는 상태입니다.”

“허어, 참.”

“만약 만검세가라도 상관없으시다면 제가 길을 만들어보겠습니다.”

“흐음.”

적비연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쩐다?

하아, 어쩌긴 뭘 어쩌나?

그래도 방법이 없으니 저지를 수밖에.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적비연이 우벽산을 보았다.

“좋네. 가능하다면 자네가 애 좀 써주게. 나를 봐서라도 만검세가가 매정하게 대하진 않을 걸세.”

“예, 그럼 진행해 보겠습니다.”

우벽산이 허리를 숙이고는 가주전에서 물러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묵검이 빙그레 웃었다.

“우 총관이 저리 고분고분 따르다니. 무림맹 신의라는 신분도 나쁘지는 않군요.”

“두고 봐. 앞으로는 이 신분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테니까. 만검세가에 아주 큰 엿을 먹일 거란 말이지.”

적비연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 * *

“흐음. 이렇게 신의 어르신을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이런 일로 말이지요.”

“그렇게 됐구려.”

만검세가주 하불범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무림맹 신의께서 적 가주와 함께 사업을 하신다니 뜻밖이었습니다.”

“전대 적 가주의 유언이었소.”

뭐, 이건 거짓말이지만 만검세가주가 알 바는 아니다.

확실히 우벽산은 수완이 좋았다.

일은 생각보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바로 이튿날 적비연은 하불범과 마주 앉았다.

“사실 본가도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닙니다만, 어르신의 부탁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맙소.”

하불범이 턱짓을 하자, 건장한 체구의 시종 두 사람이 커다란 상자를 가져왔다.

두 사람이 탁자 위에 상자를 올려두고 덮개를 열자 번쩍번쩍 빛나는 누런 금덩이가 드러났다.

“정확히 오십만 냥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뭐, 확인까지야. 하 가주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하하하! 역시 호탕하십니다. 하지만 오십만 냥은 저로서도 꽤나 큰 금액입니다. 그런 만큼 이율이…….”

“들었소. 달에 이 할.”

“그렇습니다.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고개부터 내저으리라.

오십만 냥에 이 할의 이율이면 한 달에 십만 냥이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폭리!

아무리 빌린 돈이 크다지만 누구는 평생을 벌어도 구경도 못할 돈이다.

하지만 적비연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괜찮소.”

“알겠습니다. 그럼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고맙소.”

적비연이 오십만 냥을 챙겨서 돌아가자, 옆에 앉아 있던 하기룡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적은 돈이 아닙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오십만 냥은 큰돈이지. 그러니 더욱 좋은 일이다.”

“아…… 애초에 불가능한 걸 염두에 두셨군요.”

하기룡의 말에 하불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달에 이 할이다. 어떤 사업을 구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달 십만 냥을 갚는 건 어려운 일이지. 적 가주가 많이 아프다더니 정말인 모양이다. 이제 적 가장이 몰락하는 건 시간문제. 그리고 우리는 덤으로 무림맹 신의까지 얻게 될 것이다.”

“소자,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했습니다.”

“룡아, 당장 나가는 돈을 아쉬워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이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것이다. 이보다 확실한 투자가 또 어디에 있겠느냐?”

“새겨듣겠습니다.”

“너는 영특하니 금방 이해할 것이다.”

하불범의 입매가 길게 찢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 오십만 냥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 빌려준 돈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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