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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14화 (15/301)

14. 인맥 줍기

구오오오.

정좌를 한 적비연의 전신에서 오묘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얼마나 운기를 했을까?

마침내 적비연이 스르르 눈을 떴다.

‘확실히 몸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비록 나이 많은 신체였지만, 공위증을 앓던 본체에 비한다면 날아갈 듯한 가벼움이었다.

게다가 정기와 사기가 고루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니 운기를 할 때마다 재미가 붙었다.

‘좋아, 그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달려볼까?’

적비연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공위증을 앓던 때는 만사가 귀찮았다.

삶에 대한 집착만 남아 있을 뿐, 매사 무기력했고 절망 가득한 나날들이었다.

오죽했으면 재정 상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을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록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기적 같은 변화들이 조금 즐겁기도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는 어쩌면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

지금 적비연에게는 작은 변화가 아니라 엄청난 변화가 불고 있다.

그래, 지금은 이 변화를 즐기는 거다.

지객당을 나선 적비연은 곧장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묵검이 모습을 드러내며 적비연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주군.”

“응. 지시한 일은?”

“뇌검대주(雷劍隊主)를 시켜서 처리하도록 일러두었습니다.”

“잘했군. 뇌검대주라면 믿을 만하지. 그 녀석이 좀 촐랑거리긴 하지만.”

“주군을 위한 일이라고 하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더군요.”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부터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뇌검대주였다.

적비연보다 한 살 어린 그는 무공에도 제법 재능이 있어 일찌감치 대주의 자리에 올랐다.

뭐, 나보다 재능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랬던 뇌검대주도 자신이 공위증을 앓으면서부터는 조금 거리를 두고 지냈다.

젊음을 무기로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그와 달리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자신을 지켜보는 게 괴로웠던 탓이다.

다만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뇌검대주로서는 조금 서운할 만도 했을 테지.

묵검이 넌지시 물었다.

“일단 뇌검대주가 지시대로 했습니다만, 그 많은 서신을 대체 어디로 보내신 겁니까? 수신처가 다 다른 곳인 것 같던데요.”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내 벗이라고 해두지.”

“벗……? 주군에게 저도 모르는 벗이 있었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 벗이 아니라, 아상 어르신의 벗이지.”

“아…….”

“무림맹 천기당에 들어가기 전에 인연을 가진 친구들이야. 이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하거든. 그건 그렇고 전각은?”

“지하 이 층에 지상 오 층짜리 전각을 구했습니다. 현재 내부 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좋아, 잘하고 있군. 나는 이제 또 다른 벗을 찾으러 다녀와야겠다.”

“어딜 다녀오시려고…….”

“일단 맹에는 형산(衡山)에 다녀오겠다고 일러두었다. 총관에게도 그리 말해두면 될 거야.”

“그 말씀은 형산에만 다녀오진 않을 거란 말씀이군요?”

“맞아. 한 군데 더 들를 거야.”

“어딥니까?”

“정강산(井衡山).”

“예?”

묵검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강산이라니.

정강산이면 강서성(江西省)이 아닌가?

그곳은 흑도 무리가 장악한 지역이다.

현재 무림은 정서흑동(正西黑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중원의 서쪽은 정파 중심의 무림맹이, 동쪽은 사파 중심인 흑천련의 영역이었다.

정도 무인이 흑천련 지역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과 같은 뜻.

그리고 강서성은 흑천련이 장악한 동쪽 지역에 해당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묵검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적비연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괜찮아. 정강산이면 별로 깊은 곳도 아니고. 거의 경계지역이니까.”

“오히려 경계지가 더 위험한 법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앞으로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반드시 가야 해.”

묵검은 더 말리고 싶었지만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미 적비연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말려봐야 시간낭비라는 것을.

자신의 주인은 예전부터 그랬다.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상제가 찾아와도 꺾지 못할 기세였다.

저 똥고집을 어찌 꺾겠나?

그렇다고 적 가주의 호신위로서 무림맹 신의를 호위하겠다며 따라나설 수도 없고.

“그럼 뇌검대주라도 대동하시지요.”

“흐음.”

적비연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뇌검대주라.

오랜만에 좀 만나볼까?

하긴. 무림맹 신의가 단신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적가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는 게 보기에도 좋으리라.

결국 적비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뇌검대주를 호위로 붙이도록 하지. 그편이 보기에도 그럴듯하니.”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를 찾는 일은 어찌 되고 있지?”

“알아보고는 있습니다만, 워낙 단서가 적어서 쉽지가 않습니다.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바로 움직일 테니 준비해 주도록.”

“알겠습니다. 주군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면 뇌검대주도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뭐, 그럴 테지.

그 녀석의 충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테니까.

다만 너무 촐랑거리고 입이 가벼워서 문제지.

묵검은 곧 시종을 시켜 뇌검대주를 불렀다.

잠시 후 뇌검대주가 가주전으로 들어왔다.

“뇌검대주 단휘(段煇), 무림맹 신의 어르신을 뵙습니다.”

“반갑네. 자네는 나와 함께 어디 좀 다녀와야겠네.”

옆에 있던 묵검이 한마디 덧붙였다.

“가주님을 위한 일이야.”

“가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이 단휘,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거창할 건 없고 그냥 단순 호위 임무일세. 자, 가세.”

“예? 지금 바로요?”

“그럼 내년 이맘때 가려고 했나?”

“아,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갑자기…….”

“분칠할 시간이라도 필요한 겐가?”

“아, 아닙니다!”

묵검이 다시 슬쩍 나섰다.

“총관님께는 내가 이야기해 둘 테니 다녀와.”

“예, 알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은 더 이상 말을 나눌 것도 없다는 듯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야말로 마실이라도 다녀올 것만 같은 태도였다.

* * *

적비연과 단휘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

너른 중원에 비하면 장사에서 형산까지가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관도를 따라 이동하던 중, 단휘가 옆으로 다가오며 넌지시 물었다.

“저어, 어르신.”

“뭔가?”

“우리 가주님 말입니다. 가벼운 병인 게 틀림없습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랬지요.”

“한데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단휘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그건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은 아니고…… 단지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워낙 흉흉하다 보니…….”

말끝을 흐린 단휘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녀석, 그래도 어지간히 걱정이 되긴 하는 모양이다.

하긴. 공위증을 앓고 나서부터는 얼굴 한 번 마주하질 않았으니.

그래도 나를 친형처럼 여기며 따랐던 녀석인데.

마음 같아서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아니다. 조금 더 두고 봐야지.

이 녀석은 행실이 가벼우니 어디서 어떤 실수를 할지 모른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걱정 말게. 적 가주님은 쉽게 쓰러지실 분이 아니니. 의지가 굳건하신 분이야.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내 그토록 멋있는 분은 본 적이 없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단휘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역시 그렇지요? 우리 가주님이라면 분명 금방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금방일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리 될 걸세.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예, 어르신! 부디 가주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가주님…… 우리 가주님은 반드시 쾌차하셔야 합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가주님은 제게…….”

“……?”

단휘가 그렁거리는 눈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제게 끝내주는 기녀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셨거든요.”

그쪽…… 이었냐?

순간 이마에 핏대가 섰지만 모른 척했다.

그러고 보니 공위증을 앓기 직전에 단휘에게 그런 약속을 했었다.

홍월루(虹月樓)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녀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워낙 자신을 잘 따르는 단휘가 귀여워서 한 말이었다.

한데 하필 그 직후에 공위증을 앓아버렸다.

하아, 이제 보니 네놈의 충심은 거기에서 나온 것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하긴 그게 너다운 것이긴 하다만.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이 배신감은 뭘까?

단휘가 손을 모아 쥐며 말했다.

“가주님이 건강을 되찾으시면 제가 누구보다 먼저 달려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홍월…….”

따악!

“아얏! 왜 때리십니까?”

뒤통수에 불이 난 단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냥. 때리고 싶어서.”

“뭐라고요? 갑자기 왜…….”

따악!

“아앗! 정말 왜 이러세요?”

“가끔 한 번씩 이렇게 뒤통수를 때려줘야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거든. 이리 와봐.”

“아……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도 혈액순환이 너무 잘됩니다.”

“아냐. 이리 오라니까? 기의 흐름이 좀 막힌 것 같은데.”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어어, 다가오지 마십시오.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왜 이래요? 정말!”

결국 슬금슬금 물러나던 단휘가 말을 몰며 먼저 달려 나갔다.

적비연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날 호위하지 않을 생각인가?”

“아까부터 어르신 좀 이상하다고요! 왜 자꾸 때리십니까?”

“안 때릴 테니 이리 와.”

“거짓말이신 것 같은데요?”

“당장 이리 안 와?”

“싫어요!”

저만치 물러나서 소리치는 단휘를 보면서 적비연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모처럼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은 드네.’

* * *

형산 중턱.

관도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약초를 파는 중년의 사내는 한쪽 뺨에 긴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산에서 금방이라도 구른 사람처럼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눈빛만큼은 무척이나 매서웠다.

누가 보더라도 소싯적에 칼 좀 부렸을 인상.

하지만 사내에게서는 단 한 줌의 공력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약초를 팔 의욕이 있기나 한 것인지 시종 심드렁한 표정으로 먼 산만 보고 있었다.

그런 사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내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죽립을 푹 눌러쓴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중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사람이 불쑥 물었다.

“쓸 만한 것 좀 있는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노인이었다.

사내가 표정만큼이나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뭘 찾으시오?”

“쓸 만한 걸 찾네.”

“아, 글쎄, 쓸 만한 것도 쓸 만한 사람에게 가야 쓸 만해지는 법 아니오? 개똥도 쓸 만한 사람에게 가면 약이 되는 법인 것을.”

“옳거니. 그래서 그 쓸 만한 개똥을 구하려고 왔네.”

순간 사내가 흠칫거렸다.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다시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노인이 죽립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잘 지냈는가? 만초단주(萬草團主).”

“아, 아상 어르신?”

“오랜만일세.”

“만, 만초단주 곡양기(穀梁器)가 신의 어르신을 뵙습니다!”

순간 자신을 곡양기라 지칭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적비연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상의 모습을 한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만초단이 해줄 일이 생겼네.”

곡양기가 엎드린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초한 곡 가. 오늘만을 기다렸습니다! 은인이시여!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곡양기를 내려다보며 적비연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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