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맥 줍기
따닥. 딱…….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가 이따금씩 울렸다.
온갖 풀벌레 소리, 밤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풀잎이 눕는 소리, 잎사귀가 서로 비벼대는 소리.
‘생각보다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군.’
일렁이는 불빛을 보며 적비연이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껏 살면서 노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 어딜 가든 최고의 잠자리와 최고의 식사, 최고의 목욕 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숲속 한가운데에서 거적 하나 깔고 잠들어야 할 상황.
원래 그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면 모를까?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상뿐만 아니라, 아상의 호신위, 칠괴, 남운재의 기억이 공존해 있었다.
기억상으로는 이런 경험이 숱했다.
특히 남운재의 기억으로 따지면 이보다 더한 불편함도 무수히 겪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노숙은 처음이지만, 처음 같지 않은 익숙함이 있었다.
거기에 묘한 향수까지.
“젊은 시절 자네와 이러고 자주 다녔지. 하긴 그렇게 젊을 때라고 할 수도 없지만.”
“지금도 정정하십니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긴 하군요.”
적비연의 말에 곡양기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의 추억을 공유할 수 없는 단휘는 그저 타오르는 불길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적비연이 일어났다.
“좀 씻어야겠네.”
“호위하겠습니다.”
단휘가 따라 일어나자, 적비연이 손을 저었다.
“아서라. 늙은이 몸 훔쳐보는 게 취미더냐?”
“그럴 리가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됐다. 여긴 무림맹 권역이지 않느냐?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악록산 기슭도 무림맹 권역이었지요.”
“그땐 내 행적이 고스란히 밝혀졌지만,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제 본분을 다해서…….”
“거참, 말 많네! 필요 없대도!”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자, 곡양기가 웃으며 나섰다.
“단 대주, 어르신 뜻대로 하시오. 한 번 저리 생각하시면 고집을 꺾기 힘드오.”
“지금 내 흉을 보는 건가?”
적비연이 쏘아붙이자, 곡양기가 손사래를 쳤다.
“하하. 그럴 리가요. 전 그저 어르신 뜻을 존중해 드려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아무튼 난 씻고 오도록 하지. 계곡도 근방이니 얼른 다녀오겠네.”
“끄응.”
단휘가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몰래 뒤따라갈까도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그 사실을 곡양기가 일러바치면 이대로 장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그렇게 무리를 벗어난 적비연은 곧 계곡을 찾아 옷을 훌훌 벗고 몸을 담갔다.
‘크으, 시원하다!’
오랜만에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니 그간의 피로가 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단 대주는 변한 게 없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혹은 친형제처럼 지냈던 단휘.
지닌 재능에 비해 마음도 약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성심이 있으며, 생각은 단순하다.
그러다 보니 장난치고 놀려먹기에 딱 좋다.
‘이렇게 오랜만에 녀석하고 시간을 보내니 옛 생각이 나는군.’
많은 사람의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역시 적비연 자신의 기억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일단 시작해 볼까?’
슈우우우.
적비연은 곧바로 운기를 시작했다.
그가 굳이 혼자 가겠다고 고집 부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운기행공에 집중하기 위해서.
혹시라도 단휘가 봤다간 무공을 할 줄 알았냐는 둥, 어떤 무공을 익혔냐는 둥, 왜 사람들에게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냐는 둥 온갖 질문을 퍼부을 게 뻔했다.
그 수다를 다 받아줄 자신이 없었다.
‘좋아. 점점 기운의 색깔이 희미해져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기와 사기는 더욱 조화롭게 뒤섞였다.
애초에 두 종류의 기운이 아니라, 원래 하나였던 것만 같다.
그렇다고 각각의 성질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지에 따라 지닌 내공 전부를 정기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었고, 사기로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매일 이렇게 수련한다면…… 정사를 넘나드는 수준의 무공을 구사할 수도 있겠는데?’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 아닌가?
내공을 한 차례 일주천한 적비연이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주먹을 꾹 쥐었다.
좋아, 한 번 더!
* * *
한편 그 시각 단휘는 곡양기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 만초단은 원래 전부 무인이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어느덧 말을 편하게 하는 곡양기였다.
확실히 단휘는 상대방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휘가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수백 명이 전부요?”
“아, 전부는 아닐세. 하지만 대다수가 그렇지. 그중에는 한때 절정을 넘어섰던 고수들도 있지.”
“맙소사! 절정고수까지! 그럼 단주님은…….”
“나? 나는 절정 구단까지 올랐었네.”
“우왓!”
단휘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한때 칼 좀 부렸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절정 구단이라니?
초절정을 코앞에 둔 고수였다는 게 아닌가?
지금은 공력 한 줌 느껴지지 않기에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곡양기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다 옛날 얘기지. 아무튼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한때 무인이었던 우리가 생사지경을 헤맬 때, 아상 어르신 덕분에 기적처럼 살 수 있었지. 비록 무공은 잃었지만.”
“그렇게 목숨을 구한 분들이 모여서 아상 어르신께 보답하기 위해 만초단을 결성한 것이고요.”
“그렇다네. 우린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언제든 연락이 닿을 수 있지. 하루하루 귀한 약초를 캐다 보면 언젠간 어르신께 보은할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어르신은 좀처럼 우릴 찾지 않으셨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오랜 세월을 오로지 은혜 갚을 생각만 하며 그렇게 버티시다니.”
“오히려 무공을 잃었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르지. 칼밥 먹고 살던 자들이 갑자기 실직 상태가 되었으니 약초꾼처럼 만만한 것도 없지 않겠나?”
말을 마친 곡양기가 껄껄 웃으며 주전자를 들었다.
“자, 마시던 차나 마저 드시게.”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저만 먹는 듯해서…….”
“어차피 난 마셔봐야 헛일이야. 드시게.”
“저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기에 엄청난 영약이 들어간 건 아니죠?”
“응? 무슨 영약?”
“아, 하하. 반평생 약초만 캐셨다고 하니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후후. 별로 대단한 건 아닐세. 방금 거기에는 천년하수오 한 뿌리밖에 안 들어갔으니.”
“푸우우웁! 콜록, 콜록!”
차를 들이켜던 단휘가 기침을 마구 해댔다.
그런데 언제 돌아온 것인지 옆에서 늙수레한 목소리가 버럭 튀어나왔다.
“뭐? 천년하수오?”
두 사람이 놀라서 돌아보니 적비연이 어깨를 들먹이며 씨근거리고 있었다.
“어르신 오셨습…….”
“이 사람아! 천년하수오를 왜 저딴 녀석에게 준 거야? 차라리 날 주지!”
“예?”
당황한 곡양기를 뒤로하고 적비연이 사레 걸린 단휘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그 아까운 걸 왜 뿜고 지랄이야?”
“쿨럭, 그, 그게 저도 깜짝 놀라서 그만…….”
“그리고 그렇게 귀한 걸 처먹었으면 멀뚱거리지 말고 곧장 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예? 아, 예!”
단휘가 허둥지둥 한쪽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천년하수오 한 뿌리.
운기만 잘하면 최소 십 년 이상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곡양기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단휘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 같더군요.”
“뭐, 나름 좋은 녀석이지.”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곡양기가 넌지시 물었다.
“어르신도 그럼…… 한 뿌리 더 끓일까요?”
“그래! 한 뿌리 더…… 응? 한 뿌리 더? 한 뿌리가 더 있어?”
“예, 뭐…… 몇 뿌리 있습니다만…….”
“뭐? 몇 뿌리가 더 있어?”
“예, 어르신. 그런데 어르신은 영약을 따로 챙겨 드시진 않는 걸로 알았는데…….”
아, 음. 그렇지.
아상 어르신은 영약을 따로 챙겨 드시진 않았지.
어차피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사치는 의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하지만 난 먹고 싶은데.
그렇다고 덥석 받아먹자니 모양새가 이상하고.
적비연이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는 헛기침을 했다.
“커험. 넣어두게.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약재가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니 그렇게 막 쓰지 말게.”
“예, 어르신. 그럼 잘 보관…….”
“잠깐만.”
“예?”
“요즘 나이 들어 기력도 쇠한데 한 뿌리만 끓일까? 딱 한 뿌리만…….”
* * *
다음 날, 곡양기는 곧장 만초단원들에게 연락을 취하러 떠났고, 적비연과 단휘는 정강산을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들이 다릉(茶陵)을 지나 강서성으로 접어들 때는 속도를 조금 늦추고 신중을 기했다.
정강산이 강서성 끄트머리에 위치한 접경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흑천련 권역에 속하는 곳이다.
무림맹 소속 사람이라면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하물며 명성이 자자한 무림맹 신의라면 더더욱.
마침내 정강산 기슭에 다다랐을 때, 단휘가 넌지시 물었다.
“어르신의 인맥이 흑천련 권역에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 인맥이 아니다.”
“예? 그럼 누구 인맥을……?”
“거참 쫑알쫑알 궁금한 것도 많구나. 알면 네가 찾아줄 거냐?”
“아, 그건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단휘를 보며 적비연이 혀를 찼다.
사실 대꾸하기도 애매했다.
지금 찾아가는 인맥은 강동칠괴와 인연이 있는 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걸 말했다간 또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겠지.
‘그렇다고 내 안에 칠괴 있다’라고 말 할 수도 없지 않나?
대신 찾는 자가 누군지 정도만 말해주는 건 괜찮을지도.
“지금부터 찾아갈 사람은 다면선사(多面禪師)라는 자다.”
“아…… 스님이군요?”
그제야 단휘의 얼굴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혹시라도 무시무시한 흑도 무리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닌가, 내심 긴장하던 터였다.
하지만 만날 상대가 스님이라니 한편 마음이 놓였다.
“흐음. 어디 보자. 분명 이 길이었지?”
조금 오래되니 가물가물하네.
적비연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몰았다.
사실 지금의 기억은 칠괴의 것이었다.
하지만 칠괴 역시나 꽤 오래전에 찾아온 길이었기에 적비연도 조금 헷갈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따금씩 헤매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길을 찾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정강산을 올랐을까?
“옳지. 저기다.”
적비연이 손가락을 들어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언덕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는데, 다소 생뚱맞게 홀로 지어진 느낌이었다.
주변에 다른 사찰은 보이지 않았다.
적비연은 얼른 말을 몰아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꼼꼼하게 살펴봐야지.’
오로지 가물가물한 기억에만 의존한 것이다 보니 신중할 필요는 있었다.
산속의 암자야 다 비슷하게 보일 수 있으니.
‘음. 확실히 여기가 틀림없는 것 같군. 그럼 사람만 확인하면 될 문제.’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말에서 내렸다.
단휘도 말에서 내려 적비연 옆에 붙어 섰다.
“계시오? 아무도 없소?”
암자 주변이 고요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해질녘 길을 잃어서 그런데 하룻밤 신세 좀 질 수 있겠소?”
적비연의 태연한 거짓말에 단휘는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진짜 아무도 없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문이 열리면서 한 승려가 나타났다.
하얀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스님이었는데, 어딘지 기품이 흘러넘쳤다.
적비연이 속으로 흠칫거렸다.
기억하고는 좀 다른데?
하지만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래, 충분히 다를 수도 있지.
그러는 사이 노스님이 다가와 합장하며 물었다.
“무량수불(無量壽佛). 시주께서는 뉘신지요?”
“길을 잃어 부득이 민폐를 끼치게 되었소. 스님을 뵐 낯이 없소이다.”
적비연의 말에 노스님이 껄껄 웃었다.
“낯이 없으면 좋은 일로 만들면 되지요.”
암어(暗語)!
순간 적비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놈이다!’
다음 순간,
퍼억!
“컥!”
슈우우우욱! 쿠당탕!
적비연의 발길질에 포탄처럼 튕겨 날아간 노스님이 문을 부수며 암자 안에 나뒹굴었다.
옆에 서 있던 단휘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어, 어, 어르신…… 지금 이, 이게 대체 무슨……?”
넋이 나간 그에게 적비연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뭐 하느냐?”
“예? 뭘요?”
“가서 보쌈 해야지.”
“예에엑?”
“아, 어서 점혈하고 보쌈 하라고!”
“헉.”
단휘는 벌어진 입을 여전히 다물지 못하고는 노스님과 적비연을 번갈아 보았다.
‘엄마, 나 이 영감님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