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화 (17/301)

16.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흐음.”

묵검이 침음을 흘리고는 정문 앞을 연신 서성였다.

그는 이따금씩 걸음을 멈추고는 적가장 앞에 모인 사람들을 힐끔 보았다.

대략 쉰 명.

그들 모두 적가장을 찾아온 손님들이었다.

근래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찾아온 경우는 없었기에 무척 낯선 광경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었는데, 어딘지 점잖고 지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아상을 찾아온 손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벽산은 가장 안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상 어르신이 오실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만 했다.

단정한 외모와 달리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서생들의 모습을 보니 조금 의외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 많은 손님들이 기다리는 한 사람.

바로 아상이 아직 적가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늦어. 너무 늦어.’

아상, 아니, 적비연이 가장을 떠나기 전부터 불안해하던 묵검이었다.

정강산은 엄연히 흑천련의 권역이었으므로 혹여나 나쁜 일이 생겼을 때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더구나 아상의 외모를 가진 적비연이라면 더 위험할 수밖에.

물론 다른 몸으로 환생할 수 있다지만 적비연의 말대로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이번 환생이 마지막이라면 적비연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만다.

‘불안하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드는 생각.

‘공위증에서 자유로워진 가주님이라면 누군가에게 쉽게 당할 분은 아니시다. 게다가 단 대주가 함께 갔으니 별일 없겠지.’

서산에 걸친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땅거미가 길어지면서 곧 적가장도 어둠에 잠길 듯했다.

그때 석양을 등진 누군가 말을 타고 가장 쪽으로 다가왔다.

묵검이 얼른 다가갔지만 곧 눈살을 찌푸렸다.

‘하 공자…….’

하필 만검세가의 이 공자인 하천웅이 아닌가?

그가 적가장 앞에 다다르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적가장 앞에서 뭐 하는 것이오?”

“아상 어르신을 찾아온 본가의 손님들입니다. 다만 어르신께서 아직 복귀하지 않으셔서 이곳에 기다리겠다고 하십니다.”

묵검의 대답에 하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거였군. 그런데 아상 어르신은 어딜 가셨소?”

“잠시 볼일이 있다며 떠나셨는데, 곧 돌아오실 겁니다. 한데 무슨 용건으로 하 소협께서 이곳에……?”

‘하 소협?’

하천웅이 기분이 나빴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약관을 훌쩍 지나 서른을 얼마 앞두지 않은 자신에게 ‘소협’이라고 지칭한 것은 일부러 시비 거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지만 이런 일로 흥분할 수야.

자신은 시비를 당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시비를 걸러 온 것이다.

하천웅이 피식 웃었다.

차라리 잘됐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적가를 난감하게 몰아세우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으니.

“걱정이 돼서요. 지난번에도 아상 어르신이 적가의 호위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납치당하실 뻔했지 않소?”

“그랬지요.”

묵검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적가장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상이 위험에 처했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천웅이 이때다, 하는 생각으로 몰아붙여 갔다.

“묵 호위께서도 화가 나지 않소? 천만다행히 본가의 도움으로 어르신이 무사하셨지만, 까딱하면 납치를 당해 강호가 발칵 뒤집혔을 테니 말이오. 그랬다간 적가의 위신도 크게 떨어졌을 테고. 어쨌거나 아상 어르신을 지키지 못해 전멸당하는 수모를 겪어…….”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던 하천웅은 순간 오싹한 기운을 느끼고는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묵검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헉! 무슨 사람 얼굴이……!’

분노로 부릅뜬 두 눈동자, 억지로 말아 올린 입꼬리, 씰룩이는 뺨.

그 묘한 조화 탓일까?

어딘지 괴기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묵검의 표정은 오싹했다.

곧 묵검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공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떤 개새끼가 사주를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감히 본가를 능멸한 그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는 반드시…… 죽음보다 더한 지옥을 선물해 줘야겠지요. 그게 누구든…… 자비 없는 고통을 베풀 생각입니다. 아주 자근자근 씹어 삼킬 노루 고기처럼 말이지요.”

“그, 그래야지…… 요. 적가는 본가와도 각별한 사이니…… 나 또한 물심양면으로…… 돕겠소.”

“감사합니다.”

묵검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하천웅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설마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알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잠깐 흔들렸던 마음을 추스른 하천웅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새로 시작한다는 사업은 잘 되시는지……?”

“아직 준비 중입니다.”

“서둘러야 할 텐데. 듣기로는 매달 십만 냥을 갚아야 한다고…….”

“저희들은 가주님과 아상 어르신의 뜻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지요.”

“하지만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당장 다음 달에 지불할 능력이…….”

그때였다.

가장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연히 묵검과 하천웅의 시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동했다.

말을 탄 채 서녘 해를 등지고 걸어오는 두 사람.

그중 한 사람은 수레를 끌고 있었다.

마침내 묵검이 반색하며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가장 앞에 도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적비연과 단휘였다.

그 순간 적가장 앞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불초 제자들! 사부님을 뵙습니다!”

서생들의 목소리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쩌렁쩌렁한 울림이 적가장 앞에서 솟구쳤다.

적비연은 바닥에 엎드린 자들을 보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잘들 지냈는가?”

그러자 가장 앞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다가왔다.

그는 하남성(河南省)에서 명의(名醫)로 소문이 자자한 제원중(齊沅重)이라는 의원이었다.

“하늘같은 사부님의 은혜가 있었으니 어찌 잘 지내지 못했겠습니까? 이리 다시 뵐 수 있어서 제자는 평생소원을 이룬 기분입니다.”

“허참, 자네는 여전히 입에 발린 소리를 잘도 하는구먼.”

적비연이 핀잔을 주었지만 딱히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한편 이 광경을 지켜본 하천웅은 조금 당황했다.

‘이자들이 전부 제자들? 그럼 모두 의원이란 말인가?’

하긴 아상이 무림맹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픈 자들을 돌보며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힘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만 맹에 들어가면서 그들과 모두 결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업을 앞두고 이들을 다시 모았다는 것은…… 설마 장사에 의원을……?’

그렇다면 만강원을 위협할 만한 상황이 올 수도 있지 않나?

‘어쨌든 오늘 와보길 잘했군. 이런 정보라도 얻어갈 수 있으니.’

때마침 적비연의 시선이 하천웅에게 향했다.

적비연이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가 이곳에는 왜 온 것인가? 설마 그새 빚 독촉이라도 하려고 온 것인가?”

“그럴 리가요.”

“그렇습니다.”

동시에 대답한 하천웅과 묵검이 고개를 들고 서로를 보았다.

하천웅이 짐짓 크게 웃었다.

“하하하! 묵 호위께서는 무슨 그런 농을 하십니까? 제가 온 것은 그저…….”

“당장 다음 달에 빚 갚을 능력이 되는지 의심스러워서 온 것이지요.”

“그렇습…… 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다만 와서 보니 좀 걱정이 되었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절대 의심이 아닙니다.”

하천웅이 대답하며 적비연의 눈치를 살폈다.

상대는 무림맹 신의.

아버지가 욕심을 내는 인재다.

벽력적가가 밉다지만, 아상의 기분까지 상하게 하면 안 된다.

적비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게. 행여나 돈 문제라면 걱정 말게나.”

“아무렴요. 저야 아상 어르신을 무조건 믿습니다.”

믿기는 개뿔.

적비연은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꿀꺽 삼켰다.

그런데 막 떠나려던 하천웅의 시선이 단휘가 끌고 온 수레로 향했다.

그곳에는 묵직한 뭔가가 자루에 담겨 있었는데, 이따금씩 꿈틀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저건 뭡니까?”

“별것 아닐세. 적 가주님 몸보신 해드리려고 노루 한 마리 잡아왔네. 고기 좀 씹어 드시라고.”

“아, 그, 그러시군요.”

하천웅은 괜히 조금 전 노루 고기를 빗대어 얘기하던 묵검의 표정이 떠올라 등골이 서늘했다.

그때 자루가 다시 꿈틀 움직이자, 적비연이 단휘에게 알게 모르게 눈짓했다.

단휘가 움찔거리고는 수레로 가서 검집으로 내려쳤다.

퍼억!

이내 자루가 털썩하더니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단휘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 나는 분명 죽어서도 벌 받을 거야. 죄송합니다, 노스님.’

한편 적비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쯧쯧. 노루가 아직도 살아 있었나 보군. 고통 없이 보내줬어야 했는데 많이 괴로웠겠어.”

“그럼 먼저 노루부터 장원으로 옮기겠습니다.”

“그래, 바로 삶아먹을 테니 가주전으로 곧장 옮기게.”

“예, 어르신.”

적비연이 장원으로 들어가는 단휘를 보다가 하천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자네 아직도 안 갔나?”

“아, 지금 막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하천웅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멀어져 갔다.

* * *

가주전으로 들어온 적비연이 묵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여자는?”

“조금씩 범위가 좁혀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꼬리는 밟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적비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신을 이런 몸으로 만든 여인.

현재로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기현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여자를 다시 만난다면 최소한의 실마리 정도는 풀 수 있으리라.

그때 단휘가 들어왔다.

“어르신,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그가 데려온 사람은 바로 아상의 수제자인 제원중과 만초단주 곡양기였다.

모두 모이자 적비연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미 짐작한 바가 있겠지만, 내가 자네들을 장사에 부른 이유는…….”

* * *

“중원 제일의 종합의원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불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만검세가 총관 진서국(眞西菊)이 고개를 숙였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틀림없다고 합니다.”

“의원이면 의원이지, 종합의원은 또 무엇이냐?”

“무림맹 신의의 제자들은 저마다 전문 분야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 테면?”

“신체 부위나 증상별로 유독 뛰어난 분야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난임이나 임산부의 증상에 대해서 능통하고, 어떤 이는 피부병에 대해서, 또 어떤 이는 뼈에 관련하여, 또 어떤 이는 내상 등, 이런 식으로 각자 전문 분야가 명확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애초에 신의가 그렇게 가르쳤다는 건가?”

“예, 제자들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대충 짐작이 되는군. 결국 그런 명의를 한자리에 모아서 철저하게 분야를 나눠 진료를 하겠다는 거군.”

“그런 것 같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 모였으니 명실상부한 중원 최고의 의원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새로 만들 의원이 천상원(天上院)이라고 했던가?”

“예, 하늘 위의 기술로 치료한다고 하여 그리 이름을 붙였답니다.”

어찌 보면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지만, 아상이 세운 의원인 만큼 오히려 신뢰감이 생긴다.

진서국이 말을 이었다.

“벌써 장사의 모든 의원이 천상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고 합니다.”

“장사의 모든 의원이?”

“예, 어차피 천상원이 생기면 독과점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니 일찌감치 천상원으로 들어가서 신의의 의술을 배우고 싶어 한답니다. 일정 수습 기간을 거치면 정식 의원으로 천상원에서 진료가 가능하고요. 뿐만 아니라 중원의 뛰어난 의원들이 지금 장사로 모여들어 천상원에 들어가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그 경쟁률이 워낙 치열해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수습 의원조차 될 수 없다고 합니다.”

“허어.”

하불범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사에서는 약재를 구하기 어려울 텐데?”

“그것도 만초단이라는 약초꾼들이 협조하여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확실히…… 이렇게 나오면 조금 난감하군.”

아상이 벽력적가를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도울 줄은 몰랐다.

역시 돈을 취하는 건 쉬워도 사람을 취하는 건 어려운 법일까?

이 상태라면 당장 만강원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약재란 약재는 다 긁어모아 놨건만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환자들을 치료해서 받은 돈으로 매달 십만 냥이나 되는 돈을 갚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훗. 궁금하군. 과연 그 돈은 어찌 갚을 생각인지.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모르지. 어쩌면 본가가…….”

하불범이 얼버무린 말을 총관 진서국이 마저 이었다.

“……천상원을 접수할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후후.”

하불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어쩔 거요? 신의.’

* * *

“영단을 만드시겠다고요?”

제중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적비연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상은 지금까지 환자를 치료할 때만 의술을 써왔을 뿐, 영단을 제조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상의 평소 철학이었다.

의술은 아픈 자를 치료하기 위함이지, 더 우월한 삶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지금은…….

철학은 개뿔.

매일 같이 흑도 무리가 날뛰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강해져서 정의를 지킬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함이 옳은 것 아니겠나!

‘어르신의 소신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지만,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나랑 안 맞습니다.’

적비연이 생각을 갈무리하고는 씨익 웃었다.

“영단만큼 목돈을 벌기 쉬운 것도 없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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