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상은 지금껏 영단을 만드는 일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의술이란 무릇 아프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이지, 남들보다 앞서거나 우월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철학 때문이었다.
해서 무림맹에 입맹하면서도 맹주와 처음 약조한 것이 바로 영단 제조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부분이었다.
그런 아상이 이제 영단을 제조하겠다고 한다.
제중원은 이 묘한 위화감 속에서도 조금 흥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부님이 영단 제조를……!’
만약 그렇다면 이 중원에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화타의 환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상의 의술은 대단했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영단을 만든다면 과연 어떤 물건이 나오게 될까?
모르긴 해도 소림사의 대환단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소림사의 대환단만 해도 그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다.
한데 그보다 더한 것을 만든다면?
‘엄청나겠군. 어쩌면 이 좁은 방에 모여 나눈 지금의 대화가 무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일 수도 있겠어.’
제중원은 그 중심에 서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갑자기 환단을 제조하시겠다는 건 지난번 납치 사건의 영향 때문인가?’
지레짐작한 것이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자신이 아는 아상은 타인의 목숨도 중하게 여기지만, 본인의 목숨은 더욱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자기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오만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오만함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람.
그게 바로 신의 아상이었다.
사파 무리의 횡포에 맞설 정파 무인들의 실력 향상.
그래야 무림맹 신의인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건지도 모른다.
뭐, 사실 이유야 아무려면 어떤가?
자신의 사부님이 새로운 길을 가신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배움의 기회가 어디 있겠나?
“곡 단주, 현재 만초단이 보유하고 있는 약재들은 뭐가 있지?”
적비연의 물음에 곡양기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약재 목록을 읊었다.
무인이라면 스쳐 듣기만 해도 놀라 자빠질 만한 영약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수백 명의 만초단이 지난 수십 년간 중원 전역의 험산을 오르내리며 모은 약재들이었다.
그 어떤 조직보다도 다양하고 많은 약재들을 보유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약재에 대해 모두 들은 적비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적지 않은 양이군. 그간 고생이 많았겠어.”
“아닙니다. 그저 어르신의 은혜만 생각하며 하루하루 즐겁게 지냈습니다. 만초단원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적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분명 곡양기가 불러준 목록은 웬만한 무인이라면 침을 질질 흘릴 만한 것들이었다.
하긴 천년하수오를 아무렇지도 않게 차에 넣고 끓이던 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 정도로는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 수준에 이르기 어렵다.’
소림사의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대환단.
이것이 대단한 이유는 복용하는 즉시 물처럼 녹아 흡수될 뿐만 아니라, 즉각적으로 엄청난 양의 내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림의 독문심법으로 운기하지 않는다면 약기(藥氣)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감당하기만 한다면 엄청난 내공 증진 효과는 보장된다.
뿐만 아니라 단전의 크기도 확장되어 앞으로 더 쌓아갈 수 있는 내공의 양도 큰 폭으로 증가한다.
만약 대환단이 소림사에서 유출되는 사건이 벌어진다면?
글쎄, 정사막론하고 아마 눈에 불을 켜고 개떼처럼 달려들겠지.
그 작은 영단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피 튀기는 살육전이 벌어지리라.
‘적어도 그 정도 되는 영단을 만들어야 떼돈을 벌 텐데.’
적비연이 생각을 갈무리하고는 곡양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조금 부족하군. 물론 지금 가진 것들로 무당의 태청단(太淸丹)이나 화산의 자소단(紫霄丹) 정도는 만들 수 있을 테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돈은 될 테고. 하지만 나는…….”
“……?”
“소림의 대환단을 능가하는 영단을 제조할 생각일세. 이름 하여 천상단(天上丹).”
“헛!”
곡양기가 입을 딱 벌렸고, 제중원은 ‘역시!’ 하는 생각에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묵검 역시 내심 놀라서 흠칫거렸다.
“외람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곡양기가 지극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능하다. 나라면.”
적비연은 확신했다.
아상의 지식을 총동원한다면 대환단보다 효과가 좋은 영단을 제조할 수 있다.
다만 그만큼 약재가 중요해진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번 구하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지만, 그 한 번을 구하기 어렵다.
곡양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필요하신 것은 혹시…….”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물(靈物)이다.”
“역시군요.”
“구할 수 있겠나?”
곡양기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만초단원 대부분은 무공을 잃거나 아예 익히지 않은 자들입니다. 영물을 구해오는 건 어렵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일반인이 영물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무인이라도 최소한 절정고수 이상이어야 잡을까 말까 할 테니.
곡양기가 말을 이었다.
“다만…….”
“다만?”
“영물들의 서식지를 본단보다 잘 아는 자들도 없을 겁니다.”
곡양기가 입매를 치켜 올렸다.
적비연도 덩달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면 충분하지.”
곧 곡양기가 중원의 지도에 동그라미를 표시하며 영물의 이름을 적어갔다.
지도 수십 군데에 새겨지는 표식을 보며 제중원이 입을 딱 벌렸다.
‘이렇게나 많은 영물들이……!’
마침내 모든 표시를 끝낸 곡양기가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잘 아시겠지만 영물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희도 이 녀석들의 활동구역만 알고 있을 뿐 감히 잡을 시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잘했다. 이거면 충분해. 내가 맹으로 돌아가 맹주님께 말씀드리면 병력을 내어주실 거다.”
제중원이 나서며 물었다.
“하면 그 기간 이곳 천상원은 누가 다스립니까? 천상원주는 어르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잖아도 그 부분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나는 무림맹 신의라는 신분이기에 천상원주를 맡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네 두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지.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고 실무에 있어 가장 바쁠 테니. 해서 이번에 천상원에 지원하는 의원들 중 의술과 약술에 두루 능한 자를 고용해서 원주로 앉힐 생각이다. 물론 시험에 통과한 자들 중 최종단계에서 내가 직접 뽑을 생각이고.”
“아,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겠군요.”
두 사람이 곧 납득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상이 직접 뽑는 자라면 믿고 따를 수 있을 테니까.
적비연이 제중원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이제부터 천상부원주가 될 걸세. 그리고 이건 천하단(天下丹)을 만드는 비법을 적어놓은 걸세. 화산의 자소단이나 무당의 태청단 수준은 될 걸세. 이 또한 적잖은 목돈이 될 테니 잘 만들어보게.”
“예, 사부님!”
적비연이 건넨 종이에는 각종 약재와 그 비율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태청단과 자소단.
대환단에 비해 이 두 가지가 좀 아쉬울 뿐이지, 실제로 그 가치가 어마어마한 단환들이다.
천하단이 그 영단들과 비슷한 효능을 지녔다면, 이것만 잘 만들어 팔아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영단을 제조한다는 것은 당분간 기밀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적비연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 * *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없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
언제부턴가 나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이름이 없는 나는 그냥 ‘나’였다.
그렇게 내 나이가 두 자릿수를 채우던 해에 나는 우연히 거리에서 공연하는 변검술사를 만났다.
순식간에 가면을 바꿔 쓰는 기술은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그날부터 변검술사를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조르고 졸라서 변검술을 익혔다.
변검술사는 나를 ‘꼬마’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제자’라고 불렀다.
그래도 그게 내 이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름을 갖고 싶었지만,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건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사부가 내 옷을 벗기고 겁탈을 시도했다.
사부가 남색을 즐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반항하던 끝에 단도로 사부의 목을 찔러 죽였다.
배신감과 분노, 절망과 안도가 뒤섞인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울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쓰러진 사부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이 내게는 마치 하나의 계시처럼 여겨졌다.
변검하듯 사부의 탈을 쓸 수 있다면?
내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사각. 스슥.
나는 단도로 사부의 얼굴 가죽을 벗겨갔다.
그리고 그 가죽을 내 얼굴에 덮어씌웠을 때의 안도감이란…….
‘아아, 내게도 드디어…… 이름이 생겼다. 사부의 이름이.’
그날 처음 나도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나는 기회만 되면 이름을 수집했다.
주로 떠돌이 거지들이나, 나를 멸시하던 또래들이었다.
어둑한 저녁, 인적 드문 뒷골목에서 작업한 적도 있었고, 야산으로 끌어들여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이 내게 차곡차곡 쌓여갔다.
처음 몇 번은 운이 좋아서 나의 범행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후에는 의심을 사서 관아에 쫓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능숙하게 변검술을 이용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모퉁이 하나만 돌면 나는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보고는 번번이 허탕 치며 걸음을 돌리는 나졸들을 보면 어찌나 우습던지.
그렇게 나는 중원 각지를 떠돌며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수집했다.
그 과정에 몇몇 이름 없는 무인들을 만나 무공을 전수받기도 했다.
지겨워질 때쯤이면 얼굴과 이름을 바꾸고는 도망쳤다.
세월은 흘렀고,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굳이 대상을 죽이지 않아도 얼굴을 수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즈음 되자,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내 진짜 이름을 모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내 존재를 알게 됐다.
나는 거상이 되었다가 무림고수가 되기도 했고, 거지가 되었다가 덕망 높은 벼슬아치도 됐다.
이 세상은 무대였다.
내가 여러 이름을 가지고 뛰어노는.
그래도 정착할 곳은 있어야 편했기에 정강산 언저리에 조그마한 암자를 만들어 지냈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기에 이따금씩 손님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나처럼 이름이 필요한 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새 얼굴과 함께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나를 다면선사라고 불렀다.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매번 다른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지만, 거의 항상 승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주로 사파 고수들이 찾아왔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언제든 잠적하고 또 새로운 이름과 얼굴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아마 이 뛰어난 재능 때문에 나는 점점 유명해지겠지.
하지만 나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다.
수많은 얼굴을 가졌지만 단 하나의 이름이 없기에.
“흐흐흐흐!”
내 이름은 없다.
그러나 내게는 많은 얼굴이 있다.
“흐흐흐흐!”
* * *
“흐흐흐. 헤헤헤헤!”
묵검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아상을 돌아보았다.
“주군, 이 환자 자꾸 웃는데요?”
“그럼 정신 차리게 깨워야지.”
적비연이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그대로 다면선사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커헉! 우아악!”
화들짝 놀란 다면선사가 퉁퉁 부어오른 뺨을 움켜쥐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났다.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이런 곳에? 이들은 누구……?’
그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중원에서 가장 많은 얼굴을 가졌으며,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다.
한데 지금은…….
‘묶여 있잖아?’
우선 침착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숱한 고비가 있었지만 잘 헤쳐오지 않았던가?
아주 약간의 기회만 주어지면 이런 곳에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다면선사가 심호흡을 하고는 적비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주께서는 어찌 소승에게 이런…… 음? 이제 보니 당신은……?”
순간 다면선사가 적비연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시주께서는…… 무림맹 신의?”
“잘 아네.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
“네? 헉!”
순간 적비연이 다면선사의 턱을 잡아당기더니 뭔가를 입안에 쑥 집어넣었다.
입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를 느낀 다면선사가 기겁을 했지만, 적비연이 곧바로 혈을 눌러 강제로 삼키게 만들었다.
“컥! 쿨럭! 우웩! 뭐, 뭡니까? 방금 내가 삼킨 것이?”
“뭐긴? 복혈고(服血蠱)지.”
“설, 설마…… 고독? 그럼 앞으로 난 어, 어떻게 되는 거요?”
“어떻게 되긴. 이제부터 내 말 안 들으면 뒈지는 거지.”
적비연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