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 그러니까 저분의…… 얼, 얼굴이 필요하신 겁니까?”
눈자위가 시퍼렇게 멍든 다면선사가 퉁퉁 부은 얼굴로 비동 한가운데에 있는 적비연의 본체를 가리켰다.
아상의 몸을 한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좀 말귀를 알아듣는군.”
“바, 바로 만들까요?”
“뭐,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자네 실력을 직접 확인도 할 겸.”
“그럼 단도가 필요한데…….”
“단도는 왜? 자, 여기 있다.”
“히익!”
적비연이 가볍게 던진 단도가 주저앉은 다면선사의 가랑이 사이에 꽂혔다.
다면선사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주워 들고는 적비연의 본체가 있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잠시 후 그가 적비연의 아래턱 쪽에 단도를 들이대는 순간,
빠악!
“커어억!”
비명을 내지른 다면선사가 뒤통수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아이고, 나 죽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이 맹랑한 새끼가 감히 누구 얼굴에 지금 칼질을 하려고…….”
적비연이 무서운 눈으로 다면선사를 깔아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저자의 인피면구가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기술이면 굳이 인피가 아니라 소가죽으로도 충분할 텐데?”
“그야 그렇지만 역시 가장 훌륭한 것은 직접…….”
“더 맞고 싶냐?”
“힉.”
“잘 들어. 저분의 얼굴에 상처 하나라도 생기면 넌 그날로 뒈진다.”
“알,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교한 면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본을 떠야만 합니다.”
“얼굴에 칼을 대는 것이냐?”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럼 해. 대신 약간의 상처만 나도 넌…… 알지?”
“알, 알겠습니다.”
다면선사가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무림맹 신의가 왜 여기서 이런 짓을 시키는 거지?
게다가 자신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야.”
“넵!”
적비연의 부름에 다면선사가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적비연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다면선사의 볼을 꼬집었다.
“볼수록 신기하군. 이건 진짜 같은데? 멍도 들고 상처도 났어.”
“이, 이건 진짜입니다! 진짜 제 얼굴입니다.”
“정말?”
“그, 그렇습니다!”
“묵검.”
“예, 주군.”
“거기 떨어진 단도 좀 건네줘.”
“여기 있습니다.”
순간 다면선사가 펄쩍 뛰어올랐다.
“헉! 뭐, 뭐 하시는 겁니까?”
“확인해 보려고. 진짜 네 얼굴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진, 진짜입니다!”
“걱정 마. 아주 얇게 벗겨볼 테니까. 진짜라고 해도 죽진 않을 정도로 벗길게.”
다면선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 이런 미친……!
무림맹 신의가 괴짜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였나?
“가, 가까이 오지 마시오!”
“나 신의라 불리는 사람이야. 최대한 안 아프게 벗겨볼게.”
으아, 이런 미친 영감이……!
결국 다면선사가 양손을 앞으로 쭉 내밀며 소리쳤다.
“인정하겠습니다! 이 얼굴은 가짜입니다!”
“호오, 역시 그런가?”
“제가…… 직접 벗겠습니다.”
말을 마친 다면선사가 목 아랫부분에 손을 가져가더니 이내 얇은 피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얼핏 보면 정말로 피부 껍데기를 손으로 벗기는 것만 같았다.
아주 얇은 피부를 벗겨냈음에도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이제…… 됐습니까?”
“역시 대단하군.”
적비연은 벗겨낸 피부를 건네받으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지보다도 얇은 피부다.
그런데 이걸 덮어쓴다고 어떻게 외모가 저렇게 변할 수 있지?
지금 눈앞에 드러난 다면선사의 얼굴은 노인이 아니라 중년이었다.
게다가 머리카락마저 풍성하다.
“혹시 그 얼굴도 가짜 아니야?”
“지금은 진짜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적비연이 어딘지 광기 서린 표정으로 묻자 다면선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이 미친……! 진짜라고 지금은!’
하지만 적비연의 눈동자에는 이미 불신이 가득했다.
적비연이 히죽 웃었다.
“역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우악! 진짜라니까요!”
“쓰읍. 가만있어.”
“우아아악! 저, 저리 가! 이 악마야! 진짜라고! 진짜라니까!”
“거참, 고통 없이 처리해 준다니까.”
“우아아악!”
마침내 적비연이 든 단도가 아래턱을 푹 찔렀다.
그 순간 다면선사가 오줌을 지리면서 혼절하고 말았다.
적비연이 혀를 차고는 돌아섰다.
“진짜인가 보군. 깨워서 일시키고 적당한 곳에 가둬 버려.”
“알겠습니다.”
묵검이 다면선사를 힐끔거리고는 전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복혈고는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복혈고는 암수 한 쌍으로 암놈이나 수놈이 죽으면 다른 한 놈도 따라 죽게 되어 있었다.
물론, 죽을 땐 맹독이 분사되어 숙주인 인간도 사망할 수밖에 없다.
보통 무림에서 누군가를 강제로 복종시킬 때 사용하곤 했다.
[그 귀한 게 갑자기 어디서 생기겠어? 저놈이 먹은 건 그냥 평범한 애벌레야.]
[아……]
[하지만 무림맹 신의가 말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겠지. 목숨을 담보로 모험도 하지 않을 테고.]
묵검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이걸로 유사시에는 가주님으로 돌아오실 수 있게 됐군요.]
[그렇지. 거기에 환라육천골을 사용한다면 아주 감쪽같을지도. 내가 나로 변장해야 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비동 출구로 걸어갔다.
그가 벽에 손을 대고 운기를 하자 곧 승강기가 내려왔다.
* * *
천상원은 순식간에 유명세를 탔다.
중원의 내로라하는 의원들이 모두 장사로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게 모인 의원들은 수준 높은 시험을 치렀고, 그중에서 일부만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한데 지원자가 워낙 많다 보니 천상원 인근은 늘 응시자들로 북적였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에 통과한 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스무 명이 적비연과 면접을 치르게 됐다.
면접은 천상원 일 층에서 아상의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치러졌다. 천상원주가 정해지는 자리인 만큼 한 치의 의혹도 없애기 위함이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자가 없군.’
적비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능력은 뛰어나지만 마음을 확 이끄는 인재가 없다.
이왕이면 자신이 아상의 몸으로 죽더라도 계속해서 천상원을 자신의 입맛대로 잘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지금으로서는 묵검이 최고지만, 의술을 알지도 못하는 묵검을 의원들이 따를 리는 없을 테고.
“다음 조 들어오라 하게.”
적비연의 말에 안내자가 고개를 숙이고는 나갔다.
옆에 선 묵검이 전음을 보내왔다.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시다면 천천히 결정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정 없으면 그래야지. 그나저나 그 여자는 어떻게 됐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여자의 행적으로 추측컨대 여전히 장사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뭐? 장사에?]
[예,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요.]
[그래도 그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럼 곧 찾아낼 수도 있겠네?]
[단 대주를 시켜 알아보라 지시했습니다. 머지않아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러는 사이 안내자가 외쳤다.
“최종심 통과한 마지막 조 들어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면접실로 응시자들이 한 명씩 들어왔다.
적비연이 그들을 보며 묵검에게 물었다.
[만약 그 여자를 보거든 반드시 내 앞으로 데려…… 왔네?]
[예?]
묵검이 움찔거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주군……?’
적비연이 경악한 표정으로 한 사람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묵검이 그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 여자……!
주변의 웅성임이 들려왔다.
“헉! 저기 좀 봐. 저 여인이 최종심 통과자라고?”
“와아, 엄청난 미인이잖아? 태어나서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어.”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도 있다니. 게다가 저렇게 젊은데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단 말이야?”
적비연과 묵검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응시자 중 한 여인에게 향했다.
그녀는 과연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한 사람으로 인해 면접실 전체가 빛나는 느낌이랄까?
화용월태(花容月態), 침어낙안(沈魚落雁), 경국지색(傾國之色) 같은 표현은 그녀 앞에서 그저 진부한 수식어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여인이 최종심을 통과한 응시자라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넋을 놓고 있을 때, 단 한 사람 적비연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틀림없다.
저년이다!
뭔가 더 아름다워진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분명히 저년이다!
이십만 냥을 사기 친 년!
아니, 사기는 아닌가?
어쨌든 자신을 이런 요상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여자!
‘이런 부작용이 있는 거라면 최소한 주의는 줬어야지!’
역시 엄밀히 따져도 사기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내 앞에 나타나?
그럼 내가 두 팔 벌려 환영하면서 읍소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인가?
이 쳐 죽일……!
쾅!
적비연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벌떡 일어났다.
“잘도 내 앞에 나타났구나! 이런 쳐……!”
[주군! 보는 눈이 많습니다!]
순간 다급하게 울리는 묵검의 전음.
가까스로 뒷말을 삼킨 적비연이 어금니를 꽉 깨무는데,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쳐……?”
“쳐…….”
“……?”
“쳐…… 음 보는 응시자들이여. 환, 환영한다. 커험!”
적비연이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 앉자, 응시자들도 머쓱한 표정이 되어서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날 몰라보겠구나.’
하긴 자신이 아상 어르신 몸에 들어와 있다는 걸 어찌 알겠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적가장이 운영하는 천상원에 들어올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혹시 저년이 적가장의 몰락을 노리는 간자인가?
아무튼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 면접에 집중해야 한다.
적비연은 일부러 어려운 질문들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막힘없이 대답하는 사람은 그 여인이 유일했다.
‘저년…… 원래 의원이었던가?’
여인이 대답을 할 때마다 지켜보던 의원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감탄했다.
적비연도 내심 놀라는데 묵검이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천상원주 자리에 앉혀두면 언제든 접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이왕이면 언제든 잠적이 가능한 직책보다는 아예 책임 있는 자리에 임명해서 두고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저 여인도 자신이 적비연이라는 사실을 절대 모를 거라는 것.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최대한 역이용해 보는 거다.
적비연이 여인을 보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은하란(殷河蘭)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의술에 조예가 깊군. 혹시 다른 장점도 있는가?”
“음양술을 기반으로 한 기문둔갑(奇門遁甲)과 연단술(練丹術), 천문(天文)과 역학(曆學)에 자신이 있고, 신술(神術)도 조금 알고 있습니다.”
다시 또 주변이 술렁거렸다.
과연. 그래서였나?
그녀가 말하는 의술은 어딘지 정통에서는 살짝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적비연이 겪고 있는 이상한 상황들 역시 정통 학문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니.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한 은하란이 유일하게 원주가 될 만한 재목이었다.
실력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를 천상원주로 임명한다고 해서 반발할 자들은 없으리라.
“알겠네. 다들 수고했네. 원주 자리를 포함해 각자에게 맞는 직책을 추후 공지하도록 하겠네.”
마침내 모든 면접이 끝나자 의원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곧 어지럽게 섞이며 교류를 시작했다.
응시자들 역시 기존 의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워낙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은하란에게만은 사람들이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에 적비연 은하란에게 다가갔다.
“최종심 합격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천상원주는 정하셨는지요?”
“아직 고민 중일세.”
“고민하실 게 있을까요? 여러 상황으로 봐도 제가 적임자일 것 같은데.”
허! 이런 맹랑한…….
적비연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은하란이 바짝 다가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그 몸은 좀 적응되신 모양이에요. 적. 가. 주.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