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적비연의 두 눈이 퀭해졌다.
방금…… 이년이 뭐라고 했지?
분명히 나보고 적 가주라고 부르지 않았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다.
그 눈빛.
마치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읽는 것만 같은 눈빛만큼은 진짜였다!
게다가 이 몸에 적응된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이년……! 내가 적비연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 말은 결국 모든 부작용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아니, 애초에 그게 부작용이 아니라 원래 일어날 현상이라면?
그 모든 것이 이 여자의 노림수?
대체 왜?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낀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려는데,
“본체도 관리하시려면 역시 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은하란의 목소리가 다시 귓속을 파고들어 온다.
순간 주변이 고요한 침묵에 잠겨들었다.
암흑 같은 공간에 은하란과 자신만 마주 보며 선 기분.
모든 소음이 차단된 상태에서 전신의 신경이 은하란에게만 집중됐다.
뭐지? 이건?
혹시 이게 기문둔갑술인가?
귓가에 속삭이던 은하란이 천천히 멀어진다.
“그럼 고민해 보세요.”
말을 마친 은하란이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의 소음이 쏟아지며 귀를 파고들었다.
주변을 에워싸던 암흑도 물러갔다.
의원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은하란은 그런 의원들 사이로 멀어져갔다.
잠깐, 이렇게 저 여자를 보내면 안 되잖아?
워낙 정신적 충격이 컸기 때문일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있으면 다신 그녀를 못 찾을 것만 같은 불안감마저 든다.
‘그래,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어떻게 다시 찾았는데!’
타앗!
마침내 적비연의 발이 떨어졌다.
튕기듯 달려간 그가 은하란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 과격한 행동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적비연과 은하란을 번갈아보았다.
‘제길! 하필 이런 곳에 나타나서는……!’
차라리 비공개 면접으로 진행할 걸 그랬나?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시죠? 어르신.”
은하란이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상원 일 층에서 그녀의 목소리만 또박또박 들린다.
만인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
“끄음…… 자네…… 천상원주 해볼 생각 없나?”
잠시 적비연을 바라보던 은하란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그러게.”
적비연이 손목을 놓아주고는 물러났다.
잠시 술렁이던 의원들도 곧 납득한다는 표정이 되어서는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기 시작했다.
* * *
“이분은……?”
우벽산이 눈앞에 선 아리따운 여인을 보며 넋을 놓은 듯 물었다.
정말이지 묘한 느낌을 가진 여인이었다.
기녀로 보기에는 어딘지 기품이 있어 보였고, 귀공녀로 보기에는 왠지 모를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거기에 신묘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때문에 어지간히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는 그조차도 아상이 왜 이 여자를 데리고 가주전으로 들어가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상의 입에서 더 놀라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번에 임명된 천상원주라네. 가주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데려왔네.”
‘천상원주……? 이 묘령의 여인이……?’
처음 든 생각은 의원 홍보를 위해서 일부러 이런 젊고 아름다운 미녀를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는 아상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면 이 여인은 정말 천상원주로서 자질을 가진 사람이리라.
멍하니 선 우벽산을 향해 적비연이 버럭 소리쳤다.
“거, 침 떨어지겠구먼! 멀뚱하게 서서 뭐 하는 건가? 들어가? 말아?”
“아, 죄송합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우벽산이 얼른 옆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생각이 복잡한 것도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미모에 빠져 한참이나 넋을 놓았다.
“커험, 따라오게.”
“네, 어르신.”
무뚝뚝하게 말을 뱉은 적비연과 달리 은하란은 연신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우벽산이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가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 많은 빚을 어찌 갚으시려는 거지? 그런데…… 정말 이 일을 가주님이 진행하시는 게 맞긴 한 건가?’
그래, 괜한 기우이리라.
가주님 곁에는 묵검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묵검도 아상과 한배를 탄 거라면……?’
* * *
“정말 대단하군요. 가주전에 이런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가주님이 본체를 어떻게 관리하실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문제없겠는데요?”
은하란이 지하 비동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적비연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은하란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눌러 참았다.
흥분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침착하자.
은하란이 곧 침상에 다소곳이 누워 있는 적비연의 본체로 다가갔다.
묵검이 그곳에 침상을 준비해 적비연의 본체를 옮겨둔 것이었다.
적비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가엾게도 그사이에 많이 홀쭉해졌소. 이게 전부 당신 때문이지.”
“풋.”
은하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적비연은 이마에 핏대가 서는 걸 느끼며 따졌다.
“지금 웃음이 나오시오? 설마 내가 여자는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방심하는 거요?”
“그런 거라면요?”
“안타깝지만 나는 그리 착한 놈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줘야겠지. 나는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한다는 것을.”
말을 마친 적비연의 전신에서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우러나왔다.
“이래도요?”
“……!”
순간 적비연이 흠칫거리고는 은하란을 보았다.
어느새 은하란이 단도를 들고 본체의 목에 바짝 들이민 게 아닌가?
저, 저 미친년이……!
그 순간 진하게 우러나오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적비연이 바짝 긴장해서는 은하란을 쏘아보았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시오.”
“이미 다른 몸에 들어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계시면서도 본체를 향한 애착이 깊으시네요.”
“그걸 말이라고……!”
“지금 화나신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적비연이 난감해하자, 은하란이 가볍게 웃으며 단도를 거둬들였다.
“장난이었어요.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랍니다.”
아니, 충분히 나쁜 년이거든?
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래, 지금은 내 본체에서 저년이 더 가까우니까.
아오, 진짜 저걸 잡아 죽일 수도 없고.
은하란이 적비연의 본체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가주님의 본체는 완전한 박제 상태나 다름없답니다. 모든 기의 흐름도 일정하게 흐르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어요. 지금은 그릇을 비우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돼요. 물론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한부를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박제? 그릇?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보다도…….
‘지금이라면……!’
탓!
순간 적비연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탁! 탁! 탁!
“앗!”
어느새 적비연이 은하란의 마혈을 점했다.
약간의 통증을 느꼈는지 은하란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적비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심하셨군. 마혈을 점했으니 움직이긴 어려울 거야. 물론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을 수 있고.”
은하란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죽는다면…… 가주님이야말로 후회하실 텐데요.”
“물론 바로 죽이진 않아. 당신의 대답에 따라 결정하겠지.”
“뭐가 궁금하시죠?”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가 되어서도 이리 당당한 태도라니.
확실히 보통 여자는 아니다.
궁금한 것이라.
‘한두 가지가 아니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건,
“우선 내가 본체로 돌아갈 수는 있는지 알고 싶군.”
“언제가 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실 수 있어요. 물론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예요.”
일단 다행이다.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말이 돌아 올까 봐 걱정했는데.
“내게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은하란이 짐짓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가주님이 원하셨잖아요? 공위증을 치료하고 싶다고.”
“그야 그렇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제가 아는 한 이 방법 외에는 치료법이 없어요. 그리고 시한부 인생에 비하면 지금이 아쉬울 것도 없지 않나요?”
하아, 말문 막히게 만드네.
“좋아. 일단 넘어가고. 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신술을 기반으로 그 주술을 만든 사람이 저니까요. 저만은 가주님의 비면(秘面)을 볼 수 있답니다.”
“비면……?”
“쉽게 말해 숨겨진 영혼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건 가주님의 진짜 얼굴이죠. 저 본체와 같은.”
“당신…… 정체가 뭐야?”
“말씀드렸다시피 약간의 의술과 신술, 그리고 음양술에 기반한 기문둔갑…….”
“됐고. 내게 접근한 이유는?”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참 동안 얽혔다.
마침내 은하란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책임지려고요.”
“책임……?”
“의원도 그러지 않나요? 한 번 치료를 시작한 환자가 완치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잖아요? 아상 어르신의 몸을 빌렸으니 잘 아실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그건 사실이다.
다른 의원은 몰라도 아상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의 입에서 ‘책임’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은하란이 적비연을 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가주님을 해할 어떠한 음모도, 따로 품은 간계도 없어요. 그저 벼랑 끝에서도 절 믿어주신 만큼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온 거예요.”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신뢰는 강요할 수 없죠. 가주님의 선택입니다.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절 죽이셔도 돼요. 하지만 그럼 본체를 관리하기 어려워지실 거예요.”
“이번엔 협박인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만이 가주님을 도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이지 죽음을 목전에 둔 여인답지 않게 시종 담담한 표정이었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자, 은하란이 딱 부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선택하세요. 이대로 절 죽이실지. 아니면 절 믿으실지.”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참 부딪쳤다.
마침내 적비연이 긴 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팟! 팟! 팟!
적비연이 순식간에 은하란의 몸 몇 군데를 침으로 찔렀다.
은하란이 눈썹을 찡그렸다.
“뭐죠?”
“사활침(死活針). 아상 어르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침술이지. 원래 죽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해 연구한 거지만, 양이 있으면 음이 생기는 법. 거꾸로 시전하면 산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은하란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신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전 이제 죽는 건가요?”
“질문과 달리 별로 걱정하지 않는 표정인데?”
“맞아요. 걱정하지 않아요.”
“어째서?”
“신술로 점을 쳤을 때, 제 운명은 여기까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뭐, 인정하지. 당장은 죽지 않아. 하지만 한 달 간격으로 내게 침을 맞지 않으면 전신의 기혈이 뒤틀려 죽게 될 거야.”
“일종의 구속 장치란 말이군요?”
“아직 당신을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으니까.”
“이해해 드리죠.”
“의외로 시원시원한 성격이군.”
“어차피 당신에게는 제가 필요하고, 전 당신을 배신할 일이 없으니까요.”
“호칭이 가주님에서 당신으로 바뀌었군.”
“뭐, 기분 나쁜 건 나쁜 거니까.”
어딘지 서운한 표정을 짓는 은하란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적비연이 마혈을 풀어주고는 물러났다.
“하나 더 묻지.”
“뭐죠?”
“당신 말이 전부 사실이라 치고…… 왜 그렇게 날 돕겠다는 거야?”
“내가 볼 땐…….”
은하란이 적비연을 보며 싱긋 웃었다.
“당신이 이 강호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