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도대체 뭔 소리야?”
적비연은 지객당 지붕 위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밤하늘의 별무리가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강호를 구할 유일한 사람이라니.
강호가 망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혹시 흑천련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뭐, 그렇다 해도 맹주를 비롯해서 강호절세고수들이 수두룩한데 왜 내가?
사실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다.
공위증만 없다면 자신의 재능은 확실하니까.
“흐흐흐.”
그래,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오긴 한다.
그토록 예쁜 여인이 자신을 강호 영웅으로 생각하는데 기분 나쁠 리가.
“아오, 모르겠다. 일단 머리 좀 식히자.”
적비연은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언젠가 아버지와 이렇게 별무리를 올려다보며 대화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제가 어떤 가주가 되길 바라세요?”
“새삼스레 왜 그런 걸 묻냐?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라. 언제는 이 아비 말을 들었더냐?”
피식.
‘보고 싶네. 우리 아버지.’
종종 핀잔을 던지면서도 자신을 굳게 믿어준 아버지였다.
그 때문에 적비연은 오히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강호 영웅이라 믿는 여인이 나타났다.
왠지 모르지만 그게 진심이라고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자신을 믿어주던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 정말 제 마음대로 해도 되겠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적비연은 마음속으로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래, 언제는 마음대로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새삼스레 이제 와서 망설일 것도 없다.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
이 잔잔한 파동이 결국 거친 파도를 일으킬 거다.
그 파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흐름을 즐기는 거다.
그때 마침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묵검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잘도 찾았네.”
“주군이 계시는 곳은 뻔하지 않습니까?”
“왠지 자존심 상하는 말인데?”
“혹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무림맹 신의가 지붕 위에서 논다고?”
“그렇죠.”
“걱정 마. 이상하게 생각한들 어쩔 거야? 그저 생각보다 독특하다고만 여기겠지.”
“그것도 그렇군요.”
“날 찾은 이유는?”
“맹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복귀하라는 명입니다.”
적비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긴. 오래 나와 있었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궁금하실 테고. 후우, 그 영감탱이 잔소리 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군.”
“영감탱이라면 혹시……?”
“그래, 무림맹주 말이야.”
“그리 말씀하시니 진짜 아상 어르신을 대하는 기분이군요.”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묵검의 기분을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자신도 이렇게 맹주를 ‘영감탱이’라고 부를 줄은 몰랐다.
아무리 안하무인 성격이더라도 최소한의 격식은 차렸으니까.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아상의 습관 같은 말투였다.
아상은 사석에서 이따금씩 맹주를 ‘영감탱이’라고 지칭한 적이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눈치를 살폈지만, 아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맹주도 그런 것을 알고도 웃어넘기는 눈치였다.
확실히 자존감 하나는 하늘을 찌를 것 같단 말이지.
적비연이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읏차.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됐어.”
“호위대를 붙이겠습니다.”
“됐어. 서안(西安)까지 얼마나 된다고.”
“정강산보다도 멀지요. 그리고 호위를 대동하는 게 가문의 체면을 봐서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건 또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난번에 신의가 납치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는데, 홀몸으로 덜렁 보내면?
아마 벽력적가는 모든 정파의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맹주의 눈에 단단히 찍히겠지.
“어쩔 수 없군.”
“뇌검대를 붙이겠습니다.”
“그래, 그나마 단휘가 편하긴 하지.”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우선은 곧바로 영물을 찾아 떠났다가 장사로 올 생각이야.”
“맹에서 달갑게만 여기진 않을 텐데요.”
“어떻게든 구슬려 봐야지. 맹도 맹이지만 내겐 가문이 더 중요하니까.”
적비연의 말에 묵검이 희미하게 웃었다.
“호신위로서 주군의 곁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 앞으로는 호신위보다는 별동대 개념으로 생각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이게 뭡니까?”
적비연이 내민 서신을 보며 묵검이 물었다.
“걱정 마. 연서는 아니니까.”
“다행입니다.”
“만에 하나 나한테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거야. 천상원을 지켜야 하니까.”
“아…… 잘 보관하겠습니다.”
말뜻을 알아들은 묵검이 품에 서신을 챙겨 넣었다.
“그럼 내일 바로 떠날 테니 준비해줘.”
“존명.”
묵검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 * *
다음 날 적비연은 단휘가 이끄는 뇌검대주와 함께 곧바로 서안으로 떠났다.
무림맹 본단이 서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올 때와 달리 마차를 타지 않고 직접 말을 몰았기 때문에 이동속도는 훨씬 빨랐다.
하루는 이동 중에 적비연이 단휘를 불렀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휘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짐짓 근엄한 투로 물었다.
“말해보거라. 때론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해질 때가 있으니. 그리고 인생 선배의 조언이 뜻밖에도 도움 될 때가 많다.”
“저어…… 그저 가주님이 걱정될 뿐이었습니다. 사실 어르신이 오셨으니 가주님이 이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뵐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흐음. 이 녀석이 의외로 내 걱정을 많이 하네.
적비연은 내심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가주님은 충분히 강한 분이시다. 걱정 마라.”
“예, 그렇지요. 다만…… 이렇게 또 가주님 얼굴을 뵙지도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쯤엔 가주님을 뵐 수 있겠지요?”
“글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때가 되면 뵐 날이 올 게다. 그날이 멀지는 않을 거다.”
환라육천골과 인피면구를 활용하면 생각보다 빨리 적 가주로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
“그게 정말입니까?”
단휘가 반색하며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그리 좋으냐?”
“좋지요. 어르신은 연세가 있으시니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아직 한창 나이 아닙니까? 가주님을 뵐 수만 있다면 조만간 홍월루의 기녀도 흐흐흐…….”
따악!
“아앗!”
또 그쪽이었냐!
적비연이 뺨을 씰룩이는데 단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았다.
“아, 왜 또 때리십니까?”
“혈액순환이야. 혈액순환.”
“전 혈액순환 잘된다니까요?”
“아니. 부족해. 이리 와봐.”
“어어? 또 이러신다! 아, 진짜 그만 하시라니까요!”
이번에도 단휘가 말을 몰고 저만치 앞서 달려갔다.
‘저놈은 아마 내가 죽어도 시체 옆에서 기녀 타령할 놈일 거야.’
적비연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말을 몰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적비연은 서안에 도착했다.
무림맹 본단에 다다른 단휘가 입을 척 벌렸다.
“와아, 과연 무림맹은 규모가 어마무시하군요.”
그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와본 곳이었다.
촌티 내지 말고 입 좀 다물어라. 턱이 땅에 닿겠다.
물론 장사가 서안에 비해 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도시의 규모로 보자면 장사가 서안보다 더 발달한 곳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인들에게는 무림맹이 위치한 곳이 수도나 다름없는 법.
게다가 그 화려한 만검세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무림맹 장원.
태어나서 지금까지 호남성을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단휘로서는 충분히 눈이 뒤집힐 만했다.
육중한 정문 앞에 다다르자 수문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멈추시오! 신분을 밝히시오!”
내공이 잔뜩 실린 사자후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허어. 수문장이 사자후를…….”
단휘가 연신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하지만 적비연은 이런 광경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상의 기억 속에서는 지겹도록 드나들던 무림맹 정문이었으니까.
“잠시 떠나 있었다고 그새 내 얼굴도 까먹은 겐가?”
적비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외치자, 수문장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달려 나왔다.
“천기당주님이셨군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장사로 가시는 길에 습격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괜찮으신지요?”
벌써 무림맹 수문장까지 알 정도로 소문이 퍼졌다면, 중원 전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봐야 한다.
이것도 만검세가가 앞장서서 떠벌린 결과겠지.
빌어먹을.
“난 괜찮네. 특히 오는 길에는 적 가주가 각별히 신경을 써줘서 편안한 여행이 되었지.”
“아, 그럼 그쪽은……?”
“처음 뵙겠습니다, 벽력적가 뇌검대주 단휘입니다.”
“어서 오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당주님,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자, 그럼 이제 맹주를 구워삶아 볼까?’
* * *
만검세가의 가주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장엄한 맹주전.
긴 융단 끝에는 어른 키만 한 단상이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위에 권좌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적비연이 맹주전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미 맹주 허위청(許位靑)이 한 달음에 달려와 양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시오. 천기당주. 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시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그나저나 몸은 괜찮소?”
“벽력적가의 극진한 대접으로 별 탈 없이 잘 지내다 왔습니다.”
“벽력적가? 말 잘했소! 도대체 적 가주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뭘 했단 말이오?”
뭘 하긴.
열심히 죽고 있었지.
적비연이 속내를 감추며 빙그레 웃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지요. 저보다는 적가의 피해가 더 큽니다. 분노의 상대는 적 가주가 아니라, 이런 일을 꾸민 놈들이겠지요.”
“그렇잖아도 철저히 조사하라 일렀지만 아직 이렇다 할 증거가 나오지 않았소.”
그럴 수밖에.
만검세가가 손을 쓴 것이라면 이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전부 지우고도 남았으리라.
“이미 지나간 일. 누군지는 몰라도 이번 실패로 다시 섣불리 움직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겠지. 정말이지 만검세가가 아니었더라면 큰일…….”
“만검세가가 아니었어도 별일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절 죽일 목적이 아니라, 납치하려고 했으니까요.”
적비연이 얼른 말을 가로질렀다.
이대로 만검세가에게 공로를 넘길 수는 없다.
적비연이 말을 계속 이었다.
“오히려 만검세가가 좀 더 노련했더라면 증인이 될 만한 강동칠괴를 살려두고 문초를 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여러모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는데 미련하게도 그걸 발로 걷어차 버린 셈이지요. 아주 세차게.”
적비연은 정말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흐음, 듣고 보니…… 또 그것도 그렇군. 처리가 미숙하긴 했어.”
“그렇지요? 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 죽어버렸더라고요. 만검세가도 생각이 있으면 한 놈 정도는 살려뒀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특히 강동칠괴 중 막내인 칠괴는 너무 괴롭게 죽어서 어찌나 아프…… 커험. 아무튼 그렇습니다.”
“일단 아무 일도 없으니 다행이오. 그런데 듣기로는 또 바로 맹을 나설 거라고?”
“예, 제가 적 가주와 함께 작은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사업에 필요한 재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대략 전해 들었소. 영단을 제조하시겠다고?”
“그렇습니다.”
“내 그렇게 구슬릴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허허, 적 가주께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런 저를 단숨에 설득했으니까요.”
허위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 가주가 어찌……?”
“사실 적 가주가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었습니다. 벽력적가의 비전으로 내려오는 영단 제조법을 제게 알려주었지요. 그 정도의 영단이라면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허어! 벽력적가에서 영단 제조법까지 비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단 말이오?”
“예, 제가 보고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림의 대환단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이 될 겁니다.”
“맙소사!”
허위청이 입을 딱 벌리며 주춤 물러났다.
역사상 인간이 제조한 영단의 효능이 소림의 대환단을 능가한 적이 있었던가?
뭐,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공개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비전이 내려오고 있었다니…….”
“저도 이번에 많이 놀랐습니다.”
물론 사실대로 말하자면 모두 아상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거지만.
적비연이 말을 덧붙였다.
“제가 그 비전대로 영단을 제조하면, 적가가 팔 할을, 본 맹이 이 할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적가가 선뜻 그렇게 내어주겠다고 했소?”
“예, 적 가주가 먼저 제안한 것이지요. 맹이 살아야 가문도 산다면서.”
“허, 허허! 허허허!”
물론 정 반대로 생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