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허허허.”
허위청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아상이 영단을 제조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적 가주를 불러 엉덩이라도 토닥이고 싶은 심정이다.
아상을 설득한 것을 넘어 대환단도 뛰어넘을 정도의 영단 제조 비법이라니.
이만하면 앞으로 무림맹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으리라.
그렇잖아도 최근 흑천련의 움직임이 심상찮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확실히 눈에 띄는 점은 없지만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쌓인 감이라고나 할까?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뭐, 별일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무림맹이 좀 더 힘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리라.
허위청이 아상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아 당주! 내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소. 무엇이든 필요하면 내게 말하시오.”
“소림의 대환단을 능가하는 영단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영물을 사냥해야만 합니다. 물론 영물 자체로도 충분히 효험이 있겠으나, 적가에서 내려오는 비전대로 제조한다면 그 효능이 수배가 되고 대량 생산도 가능하니 훨씬 이득이지요.”
“그렇군. 하면 당장 영물 사냥단을 꾸려야겠군. 몇 명 정도면 되겠소? 찾으려는 영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계시오?”
“안내자는 추후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인원은 너무 많아도 통솔이 어려울 수 있으니 넉넉히 삼백이면 될 듯합니다. 참고로 적가장에서 함께 온 뇌검대가 일백이니 나머지 이백 명만 보충한다면 충분할 겁니다.”
“알겠소. 내 당장 사냥단을 꾸리도록 하겠소. 한데 그대가 영물 사냥을 꼭 같이 가야만 하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물을 사냥하고 제때에 해체해서 제독 작업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위험해집니다. 제가 아니면 힘들 겁니다.”
“흐음.”
허위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시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럼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터인데 오늘은 그만 돌아가 푹 쉬시오.”
“그러지요.”
아닌 게 아니라 피로가 쌓이긴 했다.
적비연이 막 걸음을 돌리려는데, 허위청이 뒤늦게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그런데 그 사냥하려는 영물은 무엇이오?”
* * *
“인면지주(人面之蛛)라고?”
만검세가주 하불범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리며 물었다.
하기룡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답했다.
“예,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아상 어르신은 인면지주를 사냥하기 위해 사냥에 나설 거라고 합니다.”
“흐음. 내단을 품고 있는 거미, 인면지주라…… 그런 영물이 흔하지는 않을 터인데? 또한 대단히 위험할 테고.”
“만초단이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만초단이면 아상 어르신을 따른다는 그 약초꾼들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불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적가에서 영단을 만드는 비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니. 과연 명문가는 쓰러져도 재기할 만한 지팡이 하나쯤은 있단 건가?”
하기룡이 하불범의 눈치를 가만히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 적가와 아상 어르신이 영단을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매달 십만 냥은 물론, 원금까지 단번에 갚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운영하는 만강원은 하루아침에 동네 의원으로 전락하겠구나.”
“그 정도면 다행이지요. 문제는 지난번에 장사의 모든 약재를 사들이면서 지출이 컸던 관계로 자칫 심각한 적자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흐음. 룡아, 네 생각에는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가장 좋은 방법은 아상 어르신을 본가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맹으로 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룡아, 혹시 내가 동생을 보내서 서운한 것이냐?”
하불범이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물었다.
하기룡이 멈칫했다.
그랬다.
며칠 전 하천웅은 맹으로 떠났다.
아상 어르신의 행적을 살피고 무림맹의 사정을 파악해 오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았다.
사실 그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기룡은 속내를 숨기고 대답했다.
“아버님이 결정하신 일에 어찌 소자가 감히 반감을 가지겠습니까? 단지 철없는 아우가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일 뿐입니다.”
“괜찮다. 그 아이의 호신위와 철검당주도 함께 있으니.”
그게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지요.
왜 하필 저와 반목 중인 철검당주를 보내신 겁니까?
혹시 아직 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신 겁니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기룡은 그리 가볍게 행동하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을 시험하는 중이라면, 그 시험에 철저하게 응한다.
그래서 정해진 답 이상의 결과를 내는 것.
그것이 하기룡의 방식이었다.
하기룡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은 후 대답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자, 그럼 만강원을 지키고 천상원을 가져올 또 다른 방법은 있겠느냐?”
“있습니다.”
“무엇이냐?”
“적가의 빈틈을 노리는 것입니다.”
“말해보아라.”
“현재 적 가주의 행적이 심히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런 큰 사업을 벌이면서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있습니다. 폐관수련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가진다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린다면 의외로 일은 간단하게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불범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았다. 그것이 바로 네가 할 일이다. 사실 나는 네 동생이 이번에 맹으로 간다고 한들 큰일을 해낼 것 같지는 않다. 너도 알겠지만 그 어르신이 보통 고집 센 게 아니니까. 다만, 네 동생 웅아의 말에 따르면, 어르신과 제법 유대를 쌓은 것 같아서 맡겨보았다. 그리고 오히려 그리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정석으로 접근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불범이 부드럽게 웃었다.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곳 장사에서 일어날 일이다. 하여 적가에 대해서는 네 손에 맡기려고 한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아버님.”
“그래, 너만은 믿는다. 적가의 빈틈을 찾아보아라. 그 틈이 본가의 앞날을 결정지을 중요한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예, 아버님.”
“그럼 날도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그럼, 소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기룡이 물러나자, 하불범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대략 일각이나 흐르고 나서야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영신(魂信).”
“예, 가주님.”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소가주님이야 워낙 뛰어나…….”
영신의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하불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묻는 건 웅아에 대한 것일세. 그 아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하군.”
“…….”
“자네는 부정적인가 보군? 하긴 나도 처음에는 소 뒷걸음질로 쥐를 잡았다고만 생각했지. 한데 어쩌면…….”
“기대하고 계시는군요.”
하불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쥐를 잡았다면 그러려니 했을 걸세. 하나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이건 쥐가 아니라 멧돼지 정도는 되는 것 같단 말이지. 소가 뒷걸음질 쳐서 멧돼지를 잡는다? 그렇다면 평범한 소가 아닌 거겠지.”
“아직 이 공자님을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자식을 포기하는 아비가 어디 있을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법. 내 자식이라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겠지. 내가 장남이 아니었음에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이 공자님이 정말 아상 어르신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지. 다만…… 그 아이의 공력이 크게 늘었더군. 물어보니 아상 어르신이 직접 그 아이에게 보침을 놔주었다고 했네.”
“마차에서 유대를 쌓았다는 것이 사실이었군요.”
하불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가 알기로는 아상 어르신은 함부로 보침을 놔주지 않는다고 들었네. 한데 직접 웅아의 몸에 보침을 놔주었다는 것은…….”
“이 공자님이 아상 어르신을 끌어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셨군요.”
“그래.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네. 다만 웅아가 저지른 일이었던 것만큼 마지막까지 어찌 이어갈지 지켜보고 싶군.”
하불범이 다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읊조렸다.
“장사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어.”
* * *
바람이 마구 부딪쳐 왔다.
하기룡은 경공술을 펼쳐 숲속을 달렸다.
그가 나뭇가지를 박찰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던 그가 미간을 가만히 모았다.
‘아버지가…… 동생에게 기회를 주고 있어.’
동생 하천웅은 늘 천덕꾸러기 취급이었다.
한데 이번에 제대로 사고를 쳤다.
녀석이 던진 돌멩이가 확실히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은 이 파장이 만검세가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척!
마침내 낡은 사당 앞에 멈춘 그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먼저 와서 기다리던 사내가 휙 돌아서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뱉어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요? 내가 그리 한가한 줄 아시오?”
쉬이이잇!
순간 하기룡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상대의 목을 콱 틀어쥐었다.
“커억! 컥! 이 무슨……!”
어둠 속에 얼굴이 가려진 사내가 고통스러운 듯 겨우 말을 뱉었다.
하기룡이 무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으면 바쁠 일도 없이 편해지겠군.”
“미, 미안하오. 그, 그러니 이것 좀…… 컥……!”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한다면 이 정도로 끝내지 않을 거요.”
휙! 쿠당탕!
“커헉! 헉, 헉, 헉!”
어둠 속에 내팽개쳐진 사내가 가까스로 바닥을 짚고는 숨을 헐떡였다.
그런 그를 싸늘한 눈길로 깔아보던 하기룡이 입을 열었다.
“중병에 걸려 다 죽어간다던 적 가주는 갑자기 의욕이 넘쳐서 사업을 벌이고, 무림맹에서 온 아 당주는 그런 적 가주를 돕고 있소. 난 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썩 달갑지 않군.”
“헉, 헉…… 걱정 마시오. 아직 본가의 빚은 해결된 게 하나도 없소. 더욱이 만검세가에는 이번에 큰 빚까지 졌고.”
“물론 그간 당신이 여러모로 애써준 덕분에 적가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기울었지. 인정하오. 하지만…… 적 가주의 마지막 발악이 통하기라도 한다면…….”
“그와 관련된 말인데…….”
어둠 속 사내의 목소리에 하기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보시오.”
“최근 적 가주님의 지시에 의문이 들고 있소.”
“자세히.”
“왠지 이 모든 일을 적 가주님이 아니라, 아상 어르신이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생각이오.”
“그 말은…… 적 가주가 아상 어르신에게 모든 걸 내맡겼다는 거요? 적가장의 일까지?”
한데 어둠 속 사내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 이상이오. 내 생각에 적 가주님은 이미…….”
“……?”
“돌아가신 것 같소.”
“……!”
하기룡이 흠칫거리고는 어둠 속 사내를 빤히 응시했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대단한 정보다.
하면 대체 왜?
아상이 적 가주를 대신해서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인가?
아, 아상과 전대 적가주가 다소 각별한 사이라고 했던가?
어떤 이유든지 적 가주가 실제로 죽은 것이라면 이보다 더 큰 빈틈이 없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소?”
“아직은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소. 그래서 만들 생각이오.”
“무엇을?”
“가주님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약 그 자리에 가주님이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적 가주는 이미 죽은 거군.”
말을 이은 하기룡의 입매가 길게 찢어졌다.
어둠 속 사내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적가장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 될 거요. 그날 소가주도 모시겠소. 직접 와서 확인해 보시오.”
“과연. 이렇게 일을 잘 처리해 주시니 본가에서도 당신을 영입하고 싶은 것 아니겠소? 모든 게 정리되면 섭섭하지 않게 대해 드릴 거요.”
말을 마친 하기룡이 몸을 돌리고는 사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소. 우 총관.”
어둠 속에서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온 우벽산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맡겨두시오. 실망시키지 않겠소.”
* * *
‘이렇게 실망스러울 데가!’
적비연은 탄식과 함께 입을 척 벌렸다.
맹주가 꾸린 영물 사냥단은 정말이지 최악의 조합이었다.
그리고 그 최악의 조합에 한몫을 하는 인물이 지금 적비연 앞에서 포권하며 웃고 있었다.
“아상 어르신, 이렇게 또 뵙습니다! 만검세가 하천웅, 인사드립니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