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2화 (23/301)

22. 진퇴양난(進退兩難)

취선관(取仙館).

무림맹에서 영약 제조를 담당하는 곳이다.

원래는 천기당에서 그 일을 도맡아왔지만, 아상이 천기당주로 추대되면서 취선관이 따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영약을 제조하지 않겠다는 아상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취선관과 아상은 자연히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 어떤 곳보다도 서로간의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한 두 조직이었지만, 아상은 취선관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취선관은 그런 아상에게 깊은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래 사람이란, 지향점이 아예 다른 경우에는 부딪칠 일도 별로 없는 법.

하지만 지향점이 같은데 그 방식이 다를 때는 길을 걷는 내내 부딪칠 수밖에 없다.

천기당과 취선관이 딱 그런 사이였다.

무림맹의 건재를 지향한다는 점은 같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가진 곳.

그러다 보니 취선관주와 아상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런데 하필…….

‘취선관이 함께 가다니.’

적비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생각해 보면 맹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영약 제조를 위해 떠나는 사냥단이 아닌가?

어쩌면 맹주는 이번 기회로 천기당과 취선관이 화해하고 서로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거 정말 놀랐습니다. 아 당주께서 영약 제조를 생각하시다니. 하찮은 영약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분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취선관주 초관응(楚貫鷹).

그가 명백하게 비꼬는 투로 말했다.

이래서야 화해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이.

더구나 아상의 기억을 고스란히 흡수한 적비연으로서도 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 만큼 굳이 말썽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게 말이오. 나도 이렇게 생각이 바뀔 줄 몰랐소. 하지만 적 가주가 알려준 그 비전을 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더이다. 만약 취선관에서 그런 제조법을 발견했더라도 나는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요. 뭐, 당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아, 오해는 마시오. 귀관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진 않소. 사실 소림의 대환단을 능가하는 영단이라는 게 어디 말처럼 쉽겠소? 이는 취선관의 문제라기보다 벽력적가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겠소?”

말을 마친 적비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상황 딱 좋다.

자연스럽게 꼴 보기 싫은 상대를 까면서 본가의 위상을 드높이기.

은근한 힐난을 눈치챈 초관응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곧 활짝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본관이 좀 더 분발을 했어야 할 일인데 전부 부족한 제 잘못이지요.”

“허허, 무슨 그런 겸손의 말씀을.”

“그나저나 아 당주님도 이번 사냥에 같이 가신다니.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지.

내가 가지 않으면 당신이 뭘 얼마나 빼돌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적비연은 그런 속내를 감추고는 씨익 웃었다.

“나만큼 제독을 잘할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자화자찬이 지나치다고 할 터였다.

하지만 아상은 다르다.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래서 초관응은 더욱 짜증이 났다.

‘이 영감탱이. 제 잘난 멋에 산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더 짜증 나는군.’

그가 필사적으로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 그렇지요. 다만 애석하게도 아 당주님은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으셨으니 혹여 다칠까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누가 그럽디까?”

“예?”

적비연이 더욱 안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바짝 다가섰다.

초관응이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났다.

“그러니까 누가 그러냐고 물었소. 내가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았다고.”

“그, 그야…… 맹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니…….”

“허허허. 그렇구려.”

적비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초관응이 더욱 이맛살을 구겼다.

뭐지?

이 영감탱이가 정말 무공을 익히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물론 아상이 자신의 입으로 무공을 한 줌도 익히지 않았다고 말한 적은 없다.

다만 그가 무공을 사용한 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진리처럼 떠도는 소문이었다.

실제로도 아상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고.

다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상 어르신의 몸에 내가 있단 말이지.’

단전에는 내공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뭐, 그렇다고 굳이 그런 사실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 터.

적비연이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소이까?”

“음. 그렇지요.”

말을 마친 적비연은 다른 사냥단을 훑어보았다.

벽력적가에서 함께 온 뇌검대가 일백, 초관응을 필두로 한 백호대(白虎隊)가 일백, 마지막으로 하천웅이 이끌고 온 만검세가의 철검대가 일백이었다.

보아하니 만검세가는 초관응과 친분이 깊은 모양이었다.

‘과연. 장사에서 거둬들인 약재들 중 상등품을 취선관에 뇌물로 제공했을 가능성도 있겠군.’

만검세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뭐, 혹이 좀 붙었지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자신이 바로 앞에서 두 눈 치켜뜨고 있는데 다른 마음을 품지는 못할 테니.

그나저나…….

적비연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한쪽에 선 하천웅을 보았다.

하천웅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거리면서 적비연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어르신, 비밀은 지킬 테니 염려 마십시오.]

찡긋. 찡긋.

하, 저 얼빠진 놈.

꼴에 보침 몇 번 맞고 남다른 친분이라도 생겼다고 착각하는 건가?

뭐, 조금 어울려 주면 나중에 이용해 볼 만한 구석이 있을지도.

적비연이 하천웅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에게나 해준 것이 아니니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하네. 그 일은 우리만의 비밀일세. 그리고 절대 흥분하지 말고.”

‘우, 우리만의 비밀!’

어르신이 ‘우리’라고 하셨다…….

하천웅이 감격에 겨운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아버지, 이미 아상 어르신은 저를 친손자처럼 여기신답니다.

* * *

영물 사냥단은 곧바로 여정에 올라 호남성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천자산(天子山).

무림맹이 위치한 섬서성에서 출발하면 장가계(張家界)에 다다르기 전에 나타나는 산.

산새가 워낙 험해서 범인이라면 굳이 찾아갈 일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장가계 일대가 그렇듯이 천자산 또한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자욱한 운무로 유명한 곳.

그러다 보니 자칫 함부로 들어섰다가는 영원히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면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는 곳.

“그러니…… 각별히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만초단주 곡양기가 더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었다.

몇몇 무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곡양기는 이번 사냥의 안내자였다.

위험한 영물을 사냥하는 만큼 만초단주인 그가 직접 안내를 맡은 것이다.

원래 그의 신조는 ‘지나친 공포가 실수를 부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자산 안으로 들어온 지금, 그가 이토록 부정적인 말만 하는 이유는 사냥단이 다름 아닌 무인들이기 때문이다.

‘무인들은 영 성가시단 말이지.’

대다수의 일반인은 산을 오를 때 겸허한 마음을 가진다.

하지만 무인들은 다르다.

무인들에게 두려운 대상은 늘 자신보다 강한 무인일 뿐이다.

‘대자연을 너무 우습게 본다니까.’

곡양기도 무인 시절 그랬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을 타면서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을 경험했다.

제아무리 하늘을 나는 인간이어도 대자연 앞에서는 미물처럼 작은 존재일 뿐.

곡양기가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절대 흩어져서는 안 됩니다. 뭉쳐서 다녀야 합니다. 천자산은 운무가 짙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무리와 떨어질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거, 알았으니 서둘러 갑시다. 인면지주가 기다리다가 지치겠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몇몇 무인들이 키들거렸다.

곡양기가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보니 하천웅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저런 한심한 인간 같으니.

인면지주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는 건가?

곡양기가 한마디 하려는데,

“그리 서두르다간 인면지주에게 첫 끼 식사로 잡아먹히시겠습니다.”

낭랑하게 툭 튀어나온 목소리.

뇌검대주 단휘였다.

하천웅이 미간을 구기고는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아, 기분 나쁘셨습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전 그저 긴장을 푸시라는 뜻에서 농담을 했을 뿐인데.”

단휘가 방실방실 웃었다.

하천웅이 뺨을 씰룩였다.

“긴장? 누가 긴장했단 말이오?”

“원래 초조하고 긴장한 사람들이 좀 급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서두르시는 것처럼 보여서 바짝 긴장하신 줄 알았지요.”

단휘의 말에 다른 무인들이 툴툴 웃었다.

이쯤 되자 하천웅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겨우 산을 오르는데 긴장할 게 뭐가 있단 말이오?”

“뭐, 아니면 아닌 거죠. 왜 그리 화를 내십니까? 누가 보면 정말 긴장한 줄 알겠습니다? 혹시 벌써 지리신 건 아니죠?”

“뭐, 뭐라……?”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대놓고 시비 거는 건가?

하천웅이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이젠 하다 하다 벽력적가의 대주 따위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

순간 하천웅이 피식 웃었다.

“혹시 그건 귀가의 경험담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휘가 이맛살을 구겼다.

하천웅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벽력적가는 아상 어르신을 마중 나왔다가 전멸하지 않았소이까? 마침 내가 그 흉수들을 제거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상 어르신도 큰일을 당하실 뻔하셨지요. 혹시 벽력적가가 전멸당한 건 그때 너무 긴장해서 그랬던 거냐고 묻는 거요.”

“글쎄요. 이유가 어떻든 그건 확실히 본가의 실수지요. 그런데 공자께서는 본가의 전멸이 마냥 즐거운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애석할 따름이오. 내가 좀 더 일찍 그곳에 나타났더라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하필 그곳으로 사냥을 가셨다가 모든 일이 끝난 직후 극적으로 나타나시다니. 누가 보면 짠 줄 알 정도로 말입니다.”

순간 하천웅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오?”

“별 뜻 없습니다. 그만큼 기막힌 순간에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마치 본가 무인들의 전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천웅이 뺨을 씰룩였다.

“이봐, 단 대주. 말을 삼가시오.”

“아, 기분 상하셨습니까? 혹시 어디 찔리는 부분이라도…….”

“이 새……!”

그 순간 귓가로 날아드는 전음.

[어허! 그리 흥분하지 말라 일렀거늘! 기혈이 뒤엉켜 내력이 폭발해 버릴 걸세! 진정하게!]

하천웅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아상…… 어르신? 전음이라니. 무공을 할 줄 아시는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자네 혈색을 보아하니 이미 흥분해서 기혈이 펄떡이고 있어! 웃게!]

[예?]

[흥분을 가라앉힐 최고의 방법은 소리 내어 웃는 것이야.]

끄응.

이 상황에서 웃으라니.

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막 기혈이 뒤엉키는 걸 느끼던 참이긴 했다.

“으흐, 으흐흐.”

“……?”

단휘가 눈살을 찌푸리자, 하천웅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흐흐흐. 이 새…… 소리가 참 정겨워서. 으흐흐흐.”

‘실성했나?’

단휘가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아무튼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여유를 가지십시다. 정 무서우면 내 옆에 딱 붙어 계시오.”

“뭐? 이 개……!”

[어허!]

젠장, 또 흥분을…….

“으흐흐흐. 개…… 구리 소리도 정겹네? 난 긴장하지 않았다고. 으흐흐.”

하천웅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단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럼 똥…… 마렵소?”

“뭐? 허, 허허! 흐흐흐. 아니. 안 마려워. 그냥 즐거워서 그렇소. 으흐흐흐.”

내뱉는 말과는 달리 하천웅의 낯빛은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알겠소. 그렇다고 칩시다.”

단휘의 말에 하천웅은 눈알이 뒤집히기 직전이었지만, 끝까지 이상한 웃음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단휘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어르신, 이 정도면 될까요?]

[뭐, 그쯤 놀려먹지.]

[하아, 절 왜 이렇게 나쁜 놈으로 만드십니까? 이건 완전히 억지로 시비를 건 거잖아요?]

[그냥. 재미있잖아?]

[예?]

[안 그래도 지루한 산행인데. 넌 만검세가가 밉지도 않으냐?]

[뭐,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나도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래. 아무튼 내 말했듯이 저 녀석은 절대로 네게 못 덤비니 언제든 약 올려도 된다.]

[뭐…… 알겠습니다.]

단휘가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 저 영감님 확실히 이상한 것 같아.’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무리 중 벌써 여섯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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