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진퇴양난(進退兩難)
“점점 안개가 짙어지고 있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또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러게. 이젠 두어 장만 떨어져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야.”
“조심하자고. 확실히 기분 나쁜 숲이야.”
“이런 곳이라면 정말 인면지주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온통 축축해. 기분 나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그렇게 두런거리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모두 멈추십시오!”
어느 순간 곡양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동하던 무인들이 곡양기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가?”
취선관주 초관응이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곡양기가 바닥과 암벽을 번갈아 살피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
“인면지주의 영역입니다.”
“여기부터가 그럼……?”
“정확히 어디부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벌써 들어와 있었던 건지도 모르고, 이제부터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증거가 있는가?”
차앙.
곡양기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천천히 암벽으로 다가가서 단검을 쿡 찔렀다.
다음 순간,
찌이이익……!
단검을 다시 뽑아내자 놀랍게도 하얀 실 같은 것이 늘어지며 단검에 엉겨 붙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암벽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단검에 달라붙어서 늘어나니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도대체……?”
하천웅이 무심코 다가가 만지려는데,
“만지지 마시오! 손을 통째로 잘라내기 싫다면!”
“헛!”
하천웅이 움찔거리고는 얼른 물러났다.
무인들이 웅성거리며 곡양기를 보았다.
“인면지주의 거미줄입니다. 보시다시피 사물에 달라붙어 있으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허공에 떨어졌을 때는 하얀 실 같은 것이 보이지요. 그리고 거미줄 자체에 독이 묻어 있습니다. 절대로 맨손으로 만지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합니다.”
말을 마친 곡양기가 거미줄이 달라붙은 단검을 놓았다.
쉬이이익, 푹!
팽팽하게 당겨졌던 거미줄을 따라 단검이 그대로 날아가면서 절벽에 박혔다.
“어차피 저 단검은 버려야 합니다. 검기를 사용하면 거미줄을 자를 수 있겠지만.”
그만한 능력이 안 될뿐더러 고작 단검 하나를 되찾자고 검기를 사용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곡양기가 품에서 단검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이동합니다. 최대한 조심해야 합니다. 인면지주를 사냥하려면 안개가 없는 곳으로 가는 게 유리합니다. 따라오시지요.”
무인들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인면지주 영역으로 들어오자 누구도 긴장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건 나도 좀 긴장되네.’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상의 지식을 이용해서 영단을 만들려면 인면지주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면지주를 직접 본 기억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단지 웬만한 인면지주가 어른보다 큰 덩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앞장 선 곡양기를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눅눅한 공기, 퀴퀴한 냄새, 사방에서 들려오는 잡음, 무인들의 호흡 소리,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개.
시간이 흐를수록 무인들의 신경은 칼로 다듬은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이윽고,
“도대체 얼마나 더 이동해야 하는 거요? 안개가 없는 곳이 나타나기나 하는 거요?”
참다못한 하천웅이 버럭 소리쳤다.
“이런! 조용히 하십시오!”
곡양기가 질색하며 주의를 주었지만 하천웅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어갔다.
“아니, 지금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도는 것 같은데, 길은 제대로 알고나 가는……!”
그때,
“우아악!”
차아앙!
“크악!”
느닷없이 울린 비명 소리.
순간 무인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며 사방을 경계했다.
“엇! 뭐야?”
“방금 무슨 소리지?”
무인들이 우왕좌왕할 때, 곡양기가 재빨리 소리쳤다.
“인면지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원확 인 부탁드립니다!”
안갯속에서 곧바로 보고가 이어졌다.
“뇌검대, 네 명 실종!”
“백호대, 아홉 명 실종!”
“철검대, 여섯 명 실종!”
보고 끝에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뭐, 뭐야? 왜 이렇게 실종자가 많은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젠장! 뭐라도 보여야 말이지!”
상황이 심상치 않자 적비연이 얼른 곡양기에게 다가갔다.
“안개가 없는 곳까지 가려면?”
“백여 장은 더 이동해야 합니다.”
“그럼 서두르세.”
“예, 어르신!”
대답과 동시에 곡양기가 걸음을 막 떼려고 할 때였다.
“엇! 이쪽이다! 여기에 놈이……! 히이익! 으아아아악!”
고함 소리에 이어 비명이 치솟았다.
적비연이 단숨에 경공을 펼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있었을 그곳에 혈흔이 가득 번져 있었다.
출혈량으로 보아서는 비명을 지른 무인이 벌써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빌어먹을……!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이 사냥당하고 있다!
적비연이 미간을 팍 구기는데, 하천웅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이봐! 곡 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따위로 안내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우리 전부 여기서 죽일 셈이냐? 이게 다 네놈이 엉터리로 안내를 하기 때문이잖아!”
저 한심한 놈……!
적비연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소리쳤다.
“조용! 자네는 여기에 왜 온 건가?”
“예? 어르신?”
“우리는 인면지주를 사냥하러 왔다! 안내자의 임무는 인면지주가 서식하는 곳까지 알려주는 것! 그는 임무를 다했다. 여기서부터는 무인의 역할이야!”
적비연의 호통에 하천웅이 기가 죽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심한 놈.’
그 순간,
쉬이이이잇!
어디선가 섬광 한 줄기가 날아들었다.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몸을 눕히며 그것을 쳐냈다.
파앙!
푹!
튕겨 나간 검이 그대로 바닥에 박힌 채 부르르 떨었다.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건……?”
“사라진 자의 검이다!”
무인들이 저마다 바짝 긴장한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적비연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냐? 나와라!’
찰나,
“어엇!”
무인 하나가 칼부림을 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츄아아아앗!
“크아아아악!”
하얀 실 같은 것에 친친 감긴 그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헉!”
“한 명이 또 당했어!”
공포에 질린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들은 이 순간 깨달았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강한 무인 이외에도 무서운 것이 또 있다는 것을.
쉬이이익, 푹!
하늘에서 안개를 뚫고 떨어져 내린 검자루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땅바닥에 거꾸로 박힌 두 자루의 검이 마치 죽은 자의 비석처럼 보였다.
취리리릿!
섬뜩한 소리에 이어 동쪽에서 하얀 실 같은 것이 그물처럼 날아들었다.
“어엇!”
무인들이 우왕좌왕거릴 때, 적비연이 바닥을 박차며 일장을 뻗었다.
“물러나라!”
퍼퍼펑!
손바닥에서 장력이 격발하면서 날아들던 거미줄이 튕겨 날아갔다.
“아, 아상 어르신!”
겨우 거미줄을 피한 무인 하나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적비연이 콧잔등을 팍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뭘, 멍하니 쳐다보고 있어! 어서 일어나서 달……!”
“히이익! 크아아악!”
콰직!
하늘에서 강철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그대로 내려오더니 무인의 몸통을 정확히 관통해 버렸다.
“……!”
그 모습을 본 무인들이 경악했다.
“헉! 괴, 괴물이다!”
“저, 저게 인면지주……? 뭐가 저렇게 커?”
확실히 안개를 뚫고 나타난 인면지주의 다리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다리 하나가 그 정도면 몸 전체의 크기는…….
‘웬만한 삼사 층짜리 전각만 하겠어.’
적비연이 혀를 차는 사이, 다리에 찍힌 무인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허공에서 피가 비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으어어……!”
“이건 아니잖아……?”
생전 처음 상대하는 괴생명체에 무인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들의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말, 말도 안 돼!”
“저렇게 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저, 저런 걸 어떻게 잡아?”
절망에 빠진 외침이 이어지는 중,
“멍청하게 서 있지 마라!”
적비연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무인 하나를 손으로 떠밀었다.
팍!
쉬이이이잇!
콰가가각!
마침 그 자리에 송곳처럼 생긴 거대한 거미 다리가 내려 꽂혔다.
그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비튼 적비연의 앞섶이 찢어지면서 탄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초관응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영감…… 정말로 무공을 익히고 있던 건가?’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
“달려라! 안개가 없는 곳까지!”
적비연의 외침에 무인들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이렇게 짙은 안갯속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인면지주에게 유리한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야만 승산이 있다.
촤촤촤아아악!
다시 뭔가가 뿜어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하얀 그물 같은 것이 날아들었다.
“어딜!”
적비연이 돌아서면서 쌍장을 거침없이 뻗어냈다.
퍼퍼퍼펑!
장풍에 튕겨나간 거미줄이 후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퀴아아아앙!
인면지주의 울음소리인가?
쿵! 쿵! 쿵! 쿵!
인면지주의 거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어댔다.
이쯤 되자 무인들은 그저 쫓기듯이 경공을 펼쳐 발 닿는 대로 내달리기만 했다.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곡양기는 단휘의 등에 업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는데 앞선 무인이 절망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큰, 큰일이다! 길이 없다!”
“무슨 소리야?”
“헉! 암벽이……!”
적비연이 얼른 달려갔다.
‘이런 젠장!’
하필 까마득히 높은 암벽으로 막혀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중에도 뒤쪽에서는 인면지주의 발걸음 소리가 거칠게 울려오고 있었다.
쿵. 쿵. 쿵……!
그때 저쪽 안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에 동혈이 있다! 빛이 흘러나와!”
하필 동혈이?
안개가 없는 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인면지주를 피해 무작정 달리다 보니 엉뚱한 곳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안개가 없고 빛이 있다면 싸워볼 만하지 않을까?
“모두 동혈 안으로 들어간다!”
하천웅과 함께 온 철검당주 만대균이 소리쳤다.
적비연을 비롯한 다른 무인들도 일단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넓고 컸다.
과연 통로 끝에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른 출구로 이어진 건가?’
그렇다면 암벽을 관통하는 짧은 통로이리라.
그리고 저만한 빛이라면 분명 안개도 이곳보다는 덜할 터.
‘좋아. 일단 가보자!’
적비연이 막 통로를 벗어나는데,
“엇? 여, 여긴……?”
“맙소사, 이게 다 뭐야?”
놀랍게도 그들이 다다른 곳은 드넓은 공동이었다.
사방으로 이어진 또 다른 통로들이 보였고, 주위에는 푸른빛을 뿜어내는 발광체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이, 이것들 전부 보석인가?”
“아냐. 저건 야명주(夜明珠)라고. 그것도 엄청 고품질이잖아?”
“맞아. 이것만 다 캐더라도 수십만 냥은 하겠는데?”
인간의 간사함이란 이런 것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공포에서 떨던 무인들이 주변에 가득 박힌 야명주를 보자 욕심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단휘의 등에서 내린 곡양기는 천장을 보며 사색이 되고 말았다.
“여, 여긴……!”
단휘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헉!”
단휘의 시야에 가득 들어온 것은 천장에 어지럽게 쳐진 거미줄이었다.
그리고 높은 허공 곳곳에 실타래처럼 뭉친 하얀 덩어리들이 빽빽하게 매달려 있었다.
곡양기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인면지주의…… 집. 여긴 인면지주의 집입니다!”
순간 무인들이 경악했다.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우리가 놈을 피해 도망친 게 아니라, 그놈이 우리를 여기로 몰아넣었다는 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