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다 망쳤어
“이, 이럴 수가……!”
만대균이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공동에 갇힌 모든 무인들이 입을 딱 벌리고는 충격에 빠졌다.
“아, 아상 어르신이……!”
“돌, 돌아가시다니……!”
“이젠…… 다 끝났어! 제길, 다 끝났다고!”
전의를 잃은 무인들이 허망한 표정으로 절규했다.
단휘 역시 입술을 쿡 씹고는 검 손잡이를 세게 그러쥐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저리 한순간에 허망하게 갈 수가 있나?
게다가 아상은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무공 수위로 따지면 만대균이 가장 강했지만, 영물 사냥단을 이끄는 정신적인 수장은 아상이었다.
‘무림맹 신의’라는 이름값만으로도 의지가 될뿐더러, 실제로 아상은 매사에 침착했고 빠른 판단을 내려 영물 사냥단이 지금껏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저리도 허망하게 가시다니……!’
단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상과 지내면서 여러모로 좋은 기억이 남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상과 대화를 할 때면, 적비연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만큼 아상이 편했기 때문이리라.
그가 뭇 어른들과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 성격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특이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상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급소를 정확히 노리긴 했지만 녀석의 독주머니였을 뿐, 목숨을 위협할 만한 약점은 아니었다.
“젠장!”
자신이 공격했어야 했다.
자신이라고 해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상이 죽는 것보단 나았다.
그의 존재는 영물 사냥단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그리 돌아가시다니……!
이제 자신이 살아서 돌아간다고 한들 고개 들고 가주님을 뵐 수나 있겠나?
영단을 제조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번 사냥은 완벽한 실패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서 살아나갈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한편 하천웅은 한쪽 구석에 서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
모처럼 아버지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아상은 자신을 각별히 여겨주었다.
보침까지 놔주시지 않았던가?
한데 아상이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이 지옥 같은 공동에서 살아나갈 수나 있을까?
‘아버지…… 소자 여기서 죽게 생겼습니다!’
눈물이 찔끔 나온다.
지나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열심히 무공도 익히고 멋있게 살아볼 걸 그랬다.
자신의 인생이 여기까지일 줄 누가 알았을까?
-퀴아아아아아!
마침 인면지주가 포효를 내질렀다.
“크읏!”
“저, 저놈……!”
무인들이 저마다 귀를 틀어막으며 비틀거렸다.
몇몇 무인들은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기도 했다.
쾅! 콰앙! 콰직! 콰장!
인면지주가 여덟 개의 다리를 마구 내려찍어대자, 근방의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쓰러져갔다.
“크악!”
“아아악!”
비명이 솟구쳤다.
초관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뭐, 뭣들 하는가! 저 녀석을 어떻게든 제압하란 말이야! 죽여! 죽여 버리라고!”
“시끄럽소! 누군 그러면 되는 걸 몰라서 이러고 있소?”
만대균이 까칠한 목소리로 외쳤다.
평소라면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초관응에게 굽실거렸을 그였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형식적인 예의는 필요 없어졌다.
당장 이곳에서 살아나갈지가 미지수.
싸움에 집중만 해도 모자랄 판에 옆에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니 분노가 치밀었다.
공동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히이익! 우린 여기서 다 죽을 거야! 어어엇! 크아아악!”
“우아아악! 살, 살려……. 크악!”
몇몇 무인들은 거대한 송곳 같은 발톱에 몸이 관통당해 죽었고, 어떤 이는 거미줄에 친친 감겨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또 독무를 들이켜 독상을 입고 쓰러지는 무인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까아앙!
마침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인면지주의 발톱을 검기로 쳐낸 단휘가 입술을 콱 씹었다.
주르륵.
입가를 따라 선혈이 흘러내렸다.
독상도 입은 데다 거대한 다리를 막아내면서 그 충격으로 내상까지 더해졌다.
그의 발이 한 뼘 가까이 땅바닥에 파묻혔다.
-퀴아아아아!
화가 난 인면지주가 다시 한 번 포효했다.
녀석은 독주머니가 터지고 난 후부터 완전히 폭주하고 있었다.
“조금만 버텨보게!”
고함을 터뜨린 만대균이 경공을 펼쳐 단숨에 인면지주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딱히 단휘를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존 본능에 따라 단휘를 돕는 것이었다.
허공의 정점에 멈춘 그가 검을 거꾸로 세워 모든 체중을 실으며 떨어져 내렸다.
‘이것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유성천검(流星千劍)!
만검세가의 독문 검초 중 하나로, 천 개의 검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효과를 준다.
적어도 만대균이 익힌 검초 중에서는 가장 파괴력이 강했다.
오죽하면 유성이 떨어지는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다고 할까?
마침내 만대균의 검봉이 인면지주의 정수리를 정확히 가격했다.
쩌어엉!
금속성이 공동에 쩌렁쩌렁 울렸다.
쩌적……!
인면지주의 단단한 정수리에 실금이 새겨졌다.
‘통했나?’
만대균의 눈동자가 빛을 품었다.
하지만,
-퀴아아아아아!
인면지주가 다리 하나를 여전히 단휘에게 찍은 채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거칠게 포효했다.
“커헉!”
“크아악!”
몇몇 무인들이 다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크웃!”
만대균 역시 내공을 끌어올리며 물러났다.
‘제길! 유성천검마저……!’
그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유성천검초로 정수리에 상처를 주긴 했지만 미미한 수준.
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다.
도저히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대로 목을 내놓고 죽을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엔.
만대균의 일격에 희망을 걸었던 무인들은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슈아아아악!
인면지주가 자신의 발톱을 막으며 아직도 버티는 단휘에게 다른 다리를 휘둘렀다.
단휘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죽는다……!’
거대한 송곳 같은 것이 단휘의 몸통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마침내 단휘가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일까?
단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찍어 누르는 발톱 역시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었다.
‘어라……?’
다음 순간,
-끼야아아아아!
인면지주의 아랫배에 달린 수백 개의 얼굴들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몸을 마구 뒤틀던 인면지주가 어느 순간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곧이어,
츄아아아악!
아랫배 쪽에 세로로 기다란 검상이 새겨지더니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진득한 액체를 흠뻑 덮어쓴 채로 인면지주의 아랫배를 가르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하천웅의 호신위인 운귀였다.
“우, 운귀……!”
하천웅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그러는 사이 인면지주의 배에 드러난 수백 개의 얼굴은 저마다 거품을 물더니 이내 ‘쿠웅!’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공동이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꼼짝없이 모두가 전멸할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 기적처럼 한 사내가 인면지주의 배를 가르고 나타난 것이다.
“이, 이건……!”
“인면지주가…… 쓰러졌다……!”
“인면지주가 죽었다! 우리가 이겼다!”
“우와아아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자 무인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편 하천웅이 얼른 운귀에게 달려갔다.
“운귀! 무사했구나! 너…… 어떻게 저 녀석을 처치한 거냐?”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하지만 운귀의 모습을 한 적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똥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할 수는 없지.’
대신 특유의 차가운 눈초리로 주변을 훑어보며 차분하게 일렀다.
“우선 산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이동하지요.”
“아, 그, 그래! 그래야지!”
하천웅은 자신의 호신위가 저 괴물을 처리했다는 자부심 때문에 득의양양해져서 외쳤다.
“여러분! 인면지주가 쓰러졌소! 우선 밖으로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십시다!”
“살, 살았어!”
“우린 살았다! 정말 살았다!”
생존자들이 얼른 통로를 따라서 동혈 밖으로 나왔다.
생존자 이백십일 명.
영물 사냥단의 삼분지 일이 사망해버렸다.
뼈아픈 결과였다.
그나마 의술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초관응이 부상자들을 보살펴주었다.
그 모습을 본 적비연은 손이 근질근질했다.
‘저, 저, 저기에 침을 놓으면 안 되지! 당장은 통증이 줄어들지 몰라도 저러면 내성이 생겨 치료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여전히 아상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적비연이었기에 초관응의 침술이 영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갑자기 나서서 침술을 펼치기도 애매한 상황.
하천웅의 호신위가 신의와 같은 수준으로 침술을 보인다면 아무래도 수상하게 여기리라.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봤지? 그 공동에 박힌 야명주들!”
“하하, 그것들만 전부 수집해도 엄청난 돈이 될 거야.”
“게다가 그렇게 큰 인면지주라니. 해체를 잘 해서 내단만 잘 챙긴다면 어마어마한 영단이 만들어지겠어!”
“이렇게 지옥에서 살아서 돌아올 줄이야.”
하지만 지옥을 헤쳐 나오면 다시 욕심이 자라는 법.
“신의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저 영물의 내단은 우리 취선관이 가져가도록 하겠소.”
초관응이었다.
순간 적비연은 욕을 바가지로 퍼부을 뻔했다.
저 미친 영감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하지만 지금의 신분은 하천웅의 호신위.
섣불리 나서기 전에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역시나 만대균이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쉽게 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영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본가의 제조법이 필요합니다. 인면지주의 내단은 예정대로 본가로 가져가야 합니다.”
단휘가 얼른 끼어들었다.
하지만 만대균은 그마저도 거부했다.
“벽력적가가 영단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나? 우리가 보지도 못한 제조법을 믿어야 할 근거는?”
“하지만 아상 어르신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바로 그게 문제라네. 우린 신의를 믿은 거지, 벽력적가를 믿은 게 아니란 말일세. 하지만 신의께서 사망하셨으니, 우리가 믿을 근거는 사라진 셈이야. 설령, 벽력적가가 진짜 제조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신의가 아니라면 그걸 만들 수 있는 자가 사라진 셈이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 취선관이 가져가겠다는 뜻이오! 신의께서 돌아가신 지금, 우리 취선관보다 영단을 잘 제조할 수 있는 곳은 없지 않소?”
초관응의 시선이 만대균에게 똑바로 향했다.
아상이 죽은 지금 무리에서 그에게 가장 강하게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만대균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적비연은 그런 초관응을 보면서 내심 이를 갈았다.
아, 저 새끼 괜히 살려줬네.
그냥 그때 콱 뒈지도록 내버려 뒀어야 하는 건데.
그때 하천웅이 슬그머니 나섰다.
“여러분! 우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옥에 있었습니다! 솔직히 모두 전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실제로 살아나갈 희망을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린 지금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살고 보니 욕심이 생길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만약 우리가 저 공동에서 전멸했다면 영물의 내단 따위는 구경도 못한 채 끝났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입니까?”
“그렇지. 그건 모두 운귀 덕분이지.”
만대균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하천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만약 제 호신위인 운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저 괴물에게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운귀가 저 괴물을 죽였습니다. 고로, 저 괴물의 내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것은 제 호신위인 운귀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봅니다!”
“끄응.”
초관응이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전부 맞는 말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만대균이 여세를 몰아 모두에게 물었다.
“나 또한 공자님 뜻에 찬성이오. 반대하시는 분 계시오?”
아무도 대답이 없다.
적비연은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살짝 감동한 표정으로 하천웅을 보았다.
‘너…… 이 새끼, 가끔은 맘에 드는 짓도 하는 놈이구나.’
만대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대충 의견이 모아진 것 같군. 자네는 그럼 저 내단을 어찌하면 좋겠나?”
만대균과 하천웅의 마음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당연히 본가로 가져가겠지. 후후!’
두 사람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특히 하천웅은 희열을 느꼈다.
비록 아버지의 뜻대로 아상을 끌어들이지 못했지만, 영물의 내단을 가져갈 수 있다면 더 없이 만족해하시리라.
한데…….
믿었던 운귀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처음 계획대로 벽력적가로 가져가야 한다고 봅니다.”
“뭐라?”
“뭐?”
만대균과 하천웅이 동시에 경악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정대로 벽력적가로 가져가야 한다고 봅니다.”
마침내 하천웅의 표정이 완전히 울상으로 변해 버렸다.
‘아빠, 이 새끼가 다 망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