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다 망쳤어
만대균과 하천웅은 입을 척 벌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병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죽 쒀서 개 준다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기는 단휘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당연히 만검세가가 내단을 가로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하천웅의 호신위가 저렇게 나올 줄이야.
오히려 무슨 꿍꿍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천웅이 뺨을 씰룩이며 적비연에게 다가갔다.
“운귀, 지금 내 질문을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아! 그렇지! 넌 아상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그래,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지. 지금 말이다. 아상 어르신은 안타깝게도…….”
알고 있다, 이놈아.
내가 그 아상이었으니까.
적비연은 속내를 숨기고는 하천웅이 주절주절 말하는 걸 일단은 들어주었다.
“자, 이렇게 된 거다. 그래서 우리는 너에게 의견을 묻는 거다. 저 영물의 내단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말이야.”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처음의 계획대로 벽력적가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단은 단 대주가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아니, 도대체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너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미친 거냐?”
결국 하천웅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적비연은 그런 하천웅을 보면서 손이 근질거리는 걸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하천웅의 모가지를 썰어버리고 싶었다.
철천지원수.
그 원수가 지금 자신 앞에서 무방비로 서 있었다.
이렇게 죽이기 쉬운 상황이 또 어디에 있을까?
적비연은 이번에 운귀의 몸으로 환생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몇 가지 알아냈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강동칠괴 사건.
그것이 바로 하천웅의 음모였다는 것.
이미 짐작은 한 바였지만, 운귀의 기억을 흡수하면서 전후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한 것이다.
‘이 개만도 못한 녀석 때문에 본가의 무인들이 억울하게 죽었단 말이지.’
정말이지 되새길수록 살기가 절로 피어오른다.
하지만 서두를 건 없다.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됐으니 복수는 언제든 할 수 있다.
우선 지금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제가 인면지주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아상 어르신의 응급처치 덕분입니다. 그러니 아상 어르신의 본뜻을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하천웅이 핼쑥한 표정으로 입을 척 벌렸다.
짜증 나서 죽겠지? 이놈아.
적비연은 내심 이 상황을 즐겼다.
상황이 뜻밖으로 흐르자 초관응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뭐, 그쪽의 뜻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구려. 그럼 내단은 벽력적가가 가져가는 것으로 합시다.”
혹시나 마음이 바뀔세라 단휘가 얼른 대답했다.
“여러분들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본가가 마지막까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자 무인들 대다수가 적비연의 말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만대균이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불쑥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야명주에 대해 논의해 봅시다. 나는 야명주만큼은 본가에서 팔 할 이상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하천웅도 얼른 거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초관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자님의 호신위 덕분 아니오? 그러니 이번 경우도 공자님 호신위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오.”
이제 다시 모두의 시선이 적비연에게 향했다.
이쯤 되자 하천웅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운귀가 이번에는 또 어떤 실언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또 헛소리는 하지 않겠지?’
하천웅과 만대균은 불안한 눈빛으로 운귀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적비연은 내심 조소를 머금으며 꿋꿋하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제 생각에는 정확히 삼등분해서 맹과 적가, 그리고 본가가 나눠가지는 게 옳다고 봅니다.”
“야이, 개새끼야!”
결국 참다못한 하천웅이 와락 달려들어 적비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하천웅이 흠칫거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젠장! 내력이 뒤엉키고 있어!’
아상은 생전에 자신보고 흥분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것이다.
한편 적비연은 세상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너, 너,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엉? 죽다 살아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거지? 어엉?”
“뭐가 문제인지…….”
적비연이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하천웅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내력이 요동치는 일만 없었어도 당장 귀싸대기를 후려쳤으리라.
초관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올바른 말만 하는구려. 그럼 정확히 삼등분 하도록 합시다.”
그로서는 이 많은 야명주를 만검세가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균등 분할하는 게 나았다.
한편 만대균은 멍한 표정으로 운귀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내가 아는 한 운귀는 저리 가볍게 행동할 자가 아닐 진데. 다른 속내라도 있는 건가?’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렇구나! 운귀는 맹주와 본가의 관계를 생각해서 당장의 욕심을 절제한 것이로구나!’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자신도 영물의 내단을 앞에 두고 흥분한 것이다.
하지만 무림맹과 본가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그렇게 드러내놓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단단히 착각한 만대균이 적비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자네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았네. 맹과 본가의 관계를 고려한 조치였다는 것을. 이번엔 내가 눈치가 없었군.]
응, 아니야. 그런 거.
적비연은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삼키고는 전음으로 답했다.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내가 부끄럽군. 어쨌든 이번 기회로 본가는 특등급 야명주를 상당량 취할 수 있었으니 손해 본 건 없지. 도의도 확실히 지키고 말이야.]
적비연은 희미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래, 그 특등급 야명주도 결국 본가가 취하게 될 거다.’
초관응이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자, 그럼 작업을 시작합시다!”
그렇게 몇몇 부상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시 동혈로 걸어들어 갔다.
적비연은 한쪽에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는 곡양기를 보았다.
그는 은인이었던 아상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듯 퀭한 얼굴이었다.
적비연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눈이 마주친 곡양기가 형식적으로 목례를 해보였다.
적비연도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었다.
“달아난 새끼 인면지주가 다시 몰려올 가능성은 없겠소?”
곡양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그토록 강한 어미가 죽었으니, 새끼들은 지금쯤 흩어져서 제 살 길을 찾아 떠났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군.”
적비연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하고는 돌아보았다.
“좋은 분이셨소. 그리고 그런 분이 적 가주님과 뜻을 같이했소. 진심으로 그분을 존경했다면 마지막 날까지 그분의 유지를 잇도록 하시오.”
곡양기가 멍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째서 만검세가 무인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별것도 아닌 그 말이 곡양기에게는 작은 울림을 주었다.
어쩌면 그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귀도 결국 아상 어르신의 의술로 살아난 자가 아닌가?
그래서일까?
확실히 그의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마치 아상 어르신이 그의 몸을 빌려 직접 말을 건네는 것처럼.
적비연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천상원이 그분의 유산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다행한 일 아니겠소?”
곡양기가 희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덕분에 한결 마음이 나아졌소.”
“그럼 다행이고.”
무뚝뚝하게 말을 뱉은 적비연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저만치 앞서가는 하천웅을 쫓아갔다.
뭐, 이걸로 만초단이 천상원을 떠나진 않겠지?
그나저나 저놈을 졸졸 따라다녀야 하다니.
저놈 뒤통수를 볼 때마다 살심이 무럭무럭 피어나서 괴롭네.
적비연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하천웅을 따라갔다.
* * *
“그, 그럼 가주님이 이미 돌아가신 것 같단 말이오?”
섬검당주(閃劍堂主) 맹사천(孟査天)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벽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그런 듯합니다.”
“허어! 그럼 그 아상 어르신과 묵검이 한배를 탔다는 거고?”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런……!”
쾅!
맹사천이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기울어져 가는 가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보다 먼저 꿀꺽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맹사천의 눈빛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옆에 있던 천우각주(天雨閣主) 구자헌(邱子軒)이 침음을 흘렸다.
“흐음, 하면 앞으로 우 총관께서는 어쩔 생각이오?”
“지금으로서는 합리적인 의심을 키워야 합니다. 그 의심이 빈틈을 만들 것이고, 틈이 벌어지면 벽력적가는 무너질 겁니다. 기회는 그때 생기겠지요.”
“해서 합리적인 의심을 키울 방법은?”
“연회를 열 생각입니다.”
“연회를?”
“예, 조만간 영물 사냥단으로 합류했던 뇌검대가 돌아오면 환영식 겸 연회를 열 생각입니다. 물론 타 문파도 초청해서요.”
그러자 맹사천이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그럼 그 자리에서 가주님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몰아야겠군.”
“역시 이해하셨군요. 바로 그겁니다. 만약 그때마저도 가주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가주님의 생존 여부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군요.”
구자헌이 우벽산의 말끝을 이었다.
우벽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분위기 조성이지요. 우선 가장 내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어 있어야 할 겁니다. 가주님의 생존에 대한 불안감.”
한마디로 불안감을 조성해서 가주가 직접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
현재 벽력적가는 삼당사각(三堂四閣)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한창 전성기 때에는 오당팔각(五堂八閣)까지 이루어진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실 삼당사각도 버거운 실정이다.
어쨌거나 그중 섬검당주 맹사천과 천우각주 구자헌은 우벽산과 뜻을 함께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삼당사각을 휘젓고 다니면서 불안감을 조성한다면 삼당사각의 주인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원래 불안감이란 무엇보다도 전염력이 강한 것이기에.
우벽산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었다.
‘가주님, 이번에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살아 계셔야겠지만.’
만약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면?
다 쓰러져 가는 가주가 나타나 봐야 가문은 더 흔들릴 수밖에 없으리라.
‘기대되는군요. 과연 어떻게 나오실지.’
* * *
‘내 기대를 저버리다니.’
적비연은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운귀의 기억을 흡수하면서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만검세가의 비열한 음모와 가문의 배신자들.
특히…….
‘우벽산,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어떻게 요리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