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다 망쳤어
‘흐음. 생각보다 공력이 많이 늘진 않았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운기를 마친 적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운귀의 몸으로 환생하면서 은근히 기대를 품었다.
운귀는 절정 칠 단(七段)의 고수였다.
인면지주의 배에 깔려 죽기 전, 적비연은 절정 삼 단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최소한 절정 구 단 이상으로 올라설 줄 알았다.
한데…….
‘절정 칠 단(六段).’
내공도 많이 늘긴 했지만 정확히 더해진 만큼 늘진 않았다.
‘무조건 더해지는 만큼 차곡차곡 쌓이는 건 아니라는 건가?’
뭐, 그렇다 해도 나쁘진 않다.
이미 내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늘고 있다.
다만 늘어난 내공만큼 무공 수위도 정확히 비례해서 향상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성과다.
절정고수가 한 단을 올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수 년.
하지만 며칠 만에 절정 삼 단에서 네 단계를 건너뛰지 않았나?
게다가 모르긴 해도 느낌상 절정 팔 단이 멀지 않은 듯하다.
‘일단 조건도 훨씬 나아지긴 했고.’
사실 아상의 몸으로 살아갈 때는 불편한 점이 제법 많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무엇보다 아상이 너무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이의 관심 대상이 되곤 했다.
특히 맹주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으니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뭐, 저놈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를 제외한다면 나쁠 게 없는 조건이야.’
적비연의 시선이 저만치 아래에 있는 하천웅에게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살수를 뻗어 하천웅의 목을 따버리고 싶지만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대의를 망칠 수는 없는 법.
사실 하천웅을 지켜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누군가 나타나서 하천웅의 목을 따준다면야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판이니.
다만 저런 놈에게 존대하며 주군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을 뿐.
그래도 고도의 은신술을 익히게 된 건 제법 유용하다.
호신위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운귀 역시 은신술의 대가였다.
지금도 적비연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덕분에 마음 놓고 운기행공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은신술은 앞으로 활동하는 동안 큰 도움이 되리라.
‘흐음. 일단 해체 작업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루가 꼬박 지났다.
다행히 초관응의 지휘로 무인들은 큰 어려움 없이 인면지주의 내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혹시나 제독 작업을 하다가 실수를 할까 봐 눈여겨보았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괜히 취선관주가 아니라는 건가?’
하긴 무림맹에서 영단을 제조하는 조직의 수장이 그 정도도 못한다면 체면이 안 설 테니까.
일단 저 정도의 양이면 천상단을 서른 개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른 개 모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느 정도 운에 맡겨야 하는 부분도 있다.
제조법에 따라 모든 비율을 정확하게 맞춘다면 성공할 확률은 팔 할 이상이다.
하지만 먼지만큼의 차이라도 발생하면 천상단이 만들어질 확률은 이 할대로 확 떨어진다.
기적이 일어나서 서른 개를 모두 성공한다면…….
‘천상단을 소림의 대환단 수준으로 판매한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한 알에 십만 냥은 거뜬히 받을 테니 총 삼백만 냥인가?’
그중에서 여섯 개는 무림맹에게 줘야겠지만…….
‘뭐, 굳이 만들어줄 필요는 없는 거잖아?’
무림맹 신의가 죽었다.
결국 표면상으로 보자면 영단 제조법만 있을 뿐,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자는 사라진 셈이다.
그러니 취선관에서도 인면지주의 내단을 욕심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영단을 만들어줄 필요도 없다.
‘선택을 하도록 해야지.’
인면지주의 내단을 이 할 정도 가져갈 것인지, 실패할 수도 있는 영단을 가져갈 것인지.
당연히 내단을 가져가려고 하겠지.
대신 영단 제조법을 알려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뭐, 그 정도는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다.
그게 정말로 가문의 비기도 아니니까.
게다가 다 같은 제조법이라고 할지라도 만드는 자의 기술력에 따라 그 효능은 천차만별이 될 수 있기에.
아니, 한 명이 만들어도 결과물이 다를 수 있다.
요리와 비슷한 이치다.
다 같은 조리법이라도 숙수의 솜씨에 따라 그 맛이 다른 것처럼.
또한 만들 때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듯이.
거기에 운도 필요하다.
‘천상단만큼은 나보다 더 잘 만들지는 못할 테지.’
그렇다면 역시 희소성을 생각해서라도 무림맹에는 내단 그 자체로 넘기는 게 여러모로 낫다.
‘그럼 대략 천상단 스무 개 정도는 성공할 수 있으려나? 뭐, 그중에서 한 알은 내가 먹고, 마음에 드는 몇 놈에게 나눠주고, 또 몇 개는 비축한다면……’
그래도 최소한 열 알은 팔 수 있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최소 백만 냥.
‘하지만 그렇게 헐값에 팔수는 없지.’
무조건 더 비싸게 받아낸다.
“그나저나…… 지금쯤 아상의 죽음이 장사에도 알려졌을 것 같은데…….”
* * *
“지금 뭐라고 하셨소?”
제원중이 퀭한 눈으로 우벽산을 보았다.
그의 뒤에 선 다른 의원들 역시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떤 이는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바람에 옆 사람이 얼른 부축해 주기도 했다.
우벽산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이…….”
“지금 뭐라고 했냐고 묻지 않소!”
제원중이 버럭 소리쳤다.
그는 확실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정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우벽산이 갑자기 천상원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우벽산이 전한 소식을 듣는 순간 모든 감정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잘못 들은 것이리라.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우벽산이 질 나쁜 농담을 했거나, 자신의 귀가 이상한 것이거나.
그러나…….
“아상 어르신께서 인면지주를 사냥하시던 중 돌아가셨다는 소식입니다.”
“다시…… 말해주시오. 지금 뭐라고…….”
“죄송합니다. 좋은 소식을 들고 오지 못해서…….”
“아니. 그게 아니잖아. 다시 말하란 말이야. 지금 무슨 말을 했냐고! 내 말을 이해 못 하겠어? 다시 말해달라고! 지금 무슨 말을 한……!”
제원중이 우벽산의 멱살을 쥐며 소리치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흠칫거린 제원중이 돌아보자, 천상원주 은하란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들어도 잔혹한 현실만 깨달을 뿐이에요. 여기 있는 모두가 똑바로 들었으니까.”
“당신이 뭔데…….”
“천상원주죠. 당신의 직속상관이기도 하고.”
탁!
제원중이 은하란의 손길을 걷어치웠다.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제원중이 차가운 표정으로 일렀다.
“직속상관? 이제부터는 아니오. 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제원중이 머리에 쓴 두건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천상원의 의원을 상징하는 두건이었기에 그의 행동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그러자 다른 의원들도 수군거리더니 하나둘 두건을 벗기 시작했다.
제원중이 몸을 돌렸다.
“이제 우리는 이곳을 떠나겠소.”
그때 묵검의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그분이 남긴 뜻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소?”
“……!”
제원중이 묵검을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오?”
“여기.”
묵검이 서신을 건네주었다.
제원중이 그것을 받아 들고 펼쳐보자 아상의 필체가 서신 가득 남겨져 있었다.
내용인즉슨, 만에 하나 자신이 잘못되었을 경우 반드시 천상원을 지켜 강호 최대의 종합의원으로 명맥을 이어가라는 유언이었다.
……끝으로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적을 수 있는 것도 벽력적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희들에게는 내가 사부이자 은인이듯, 내게는 벽력적가가 생명의 은인이다. 그러니 행여 이 글을 보는 날이 오거든, 너희들은 적 가주님을 대할 때 나를 대하듯 하라.
적 가주님에게는 너희들에 대해 시간 날 때마다 말씀을 드렸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적 가주님은 강호의 숨은 인재다.
워낙 총명하신 분이니 너희들이 온 마음을 다해 따르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분은 의술에 대해서도 매우 조예가 깊으셔서 나와 깊은 대화가 가능할 정도다.
내가 종종 벽력적가를 방문해 온 것에는 바로 그러한 이유도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사부를 잃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적 가주님을 모시도록 하라.
서신을 마지막까지 읽은 제원중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는 오열했다.
“사부님, 어찌 제자들을 이리 두고 가셨습니까?”
그가 통곡하자, 다른 이들도 그 자리에 엎드려 땅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천상원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됐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제원중이 몸을 일으키고는 은하란에게 다가갔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원주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가 저지른 실수까지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냉담하진 않답니다. 오늘만큼은 그 슬픔에 젖으세요. 대신 내일부터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시길 바랍니다.”
“원주님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한편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우벽산은 날카로운 눈으로 묵검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상 어르신의 유언장을 묵검이? 이것들 봐라……’
확실히 갈수록 이상하다.
저 유언장이 진짜인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잘됐다.
갑작스러운 아상의 사망 소식은 그로서도 당황스러웠다.
자칫 이대로 천상원이 무너지면 벽력적가는 그대로 만검세가의 손에 넘어갔을 테니.
그때는 자신의 공로가 그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마지막까지 자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어떻게든 가주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려야 한다.
‘곧 뇌검대가 귀환하면 모든 것이 밝혀질 터. 나는 나대로 준비하면 되겠지.’
이미 맹사천과 구자헌이 삼당사각을 돌아다니며 온갖 불안감을 조성해 놓았다.
적 가주의 안위를 확인해야만 한다는 여론이 가장 내에서도 팽배한 상황.
‘이제 벽력적가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 * *
금의환향이라 할 만했다.
비록 아상이 명을 달리했지만, 벽력적가의 입장에서는 인면지주를 죽이고 내단을 확보했으며, 특등품 야명주까지 취했다.
연회를 베풀기에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게다가 삼당사각이 만장일치로 연회를 여는 것에 동의했다.
연회는 죽은 자들에 대한 추모식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묵검은 이를 막을 명분도, 힘도 없었다.
결국 영물 사냥단이 귀환하는 당일, 연회는 성대하게 열렸고, 장사의 모든 문파가 적가장으로 모여들었다.
물론 만검세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검세가에서는 소가주인 하기룡과 영물 사냥단으로 참가했던 하천웅이 참여했다.
무림맹에서도 초관응은 서안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적가장으로 왔다.
무림맹에 할당된 몫을 챙겨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참석자들은 본격적인 연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짤막한 추도식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악기 연주와 함께 떠들썩한 연회가 이어졌다.
초반의 무거웠던 분위기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흥겨워졌고, 영물 사냥단의 무용담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허풍과 과장이 섞인 무용담에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하기룡이 은밀히 우벽산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벽력적가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옳소!”
“맞습니다! 장사에 적가장이 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무인들이 너도나도 소리치며 동의했다.
평소 같았으면 불쾌했을 그 소리가 오늘 만큼은 하기룡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하기룡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 또한 이번 일로 벽력적가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이런 자리가 가능하도록 애써주신 적 가주님을 위해 건배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얼마든지 하지요!”
“잔이 부서질 때까지 합시다!”
“하하하!”
하기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적 가주님을 위하여!”
“위하여!”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잔을 들어 올렸다.
하기룡은 단숨에 술을 털어 넣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술렁임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그가 예정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 좋은 자리에 어째서 적 가주님은 보이지 않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