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다 망쳤어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적 가주님도 함께 계시면 좋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적 가주님을 뵌 지도 오래됐군요!”
“저도 모처럼 적 가주님을 뵙고 축하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인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기룡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다.
분위기를 타자 삼당사각의 주인들마저 가세했다.
“우 총관, 손님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가주님이 이 자리에 계셔야 할 것 같으니 어서 가주님을 모셔오시오.”
맹사천이었다.
그러자 벽운당주(碧雲堂主) 염백(鹽白)도 나섰다.
“나 또한 맹 당주와 같은 생각이오. 우 총관은 어서 가주님을 모셔오시오.”
사실 염백은 가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였다.
하지만 최근 불길한 소문이 나도는 만큼 이 기회에 가주의 안위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더불어 적가장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일이 없게끔 이 자리에서 단단히 도장을 찍고 싶었던 것이다.
적가의 수뇌인사들마저 이렇게 나오니 손님으로 찾아온 무인들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옳소! 진정한 주인공이 빠져서야 되겠소? 어서 적 가주님을 모셔오시오! 우리는 적 가주님에게 인사를 드려야겠소!”
연회장이 들썩이자 우벽산이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 진정해 주십시오. 현재 가주님은 사정이 있어서 이 자리에 나오실 수가 없습니다. 모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그의 표정에는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좀 더 부채질을 해라. 나도 궁금해 죽겠다고! 가주의 시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하천웅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 사정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오? 설마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 건 아니겠지요?”
“떠도는 소문이라면…….”
“우 총관께서도 귀가 있다면 들어본 적이 있을 터. 지금 장사에는 적 가주님이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소!”
그러자 좌중이 다시 한 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기룡이 미간을 좁히며 준엄한 투로 타일렀다.
“어허, 웅아. 말이 지나치다.”
“형님, 이건 제대로 짚어야 할 문제입니다. 본가는 적가에 거금을 빌려주었습니다. 한데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자금을 회수해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본가의 재정상태가 위험해집니다.”
“흐음.”
하기룡이 침음을 흘리고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박을 하지 않았다.
모처럼 하천웅이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다.
이쯤 되자 지켜만 보던 낭금상회(浪金商會) 회주 진청양(眞淸梁)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듣기에도 이 부분은 확실히 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본회도 적가에 빌려드린 자금이 적지 않습니다. 한데 적 가주님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본회 입장도 곤란해집니다.”
“적가장은 이번에 천상원을 세워 영단을 만들려고 했지요. 한데 아상 어르신이 돌아가신 지금, 그 천상단이라는 것을 만드는 게 가능한 겁니까?”
하천웅이 정곡을 찌르자 우벽산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물론, 이 당혹감은 철저한 연기였다.
“가, 가능할 겁니다. 아, 아마도…….”
“아마도……?”
하천웅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우벽산은 더욱 당황스러운 척했다.
“저도 가주님을 뵌 지가 오래되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잠깐! 지금 뭐라고 했소? 가주님을 뵌 지가 오래 됐다고?”
“엇!”
우벽산이 뒤늦게 실수를 알아차린 척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켜보던 하기룡이 나섰다.
“우 총관. 솔직히 말해주시오. 가주님을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요?”
“저, 저는…….”
“설마 이렇게 큰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주님이 총관과 일절 상의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그, 그건…….”
우벽산이 허둥거리자 사람들이 더욱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충성심 강한 염백이 탁자를 쾅 치며 일어났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거요?”
“중요하지요.”
하기룡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현재 적가장 내에서도 적 가주님을 최근까지 본 자가 없다면, 대체 누가 이 사업을 주도했단 말입니까? 아상 어르신이? 그렇다면 아상 어르신이 돌아가신 지금 이 사업에 책임을 질 사람은 누굽니까?”
“그야 당연히 우리 가주님이……!”
“그러니까 그 가주님이 모습을 드러내셔야지요!”
하기룡이 호통치자, 장내가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염백은 주먹을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분하지만 맞는 말이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며 우벽산을 돌아보았다.
“우 총관! 뭐 하고 계시오! 어서 가주님께 이 상황을 낱낱이 보고해 주시오! 그럼 가주님이 친히 나오실 것이니!”
그는 적비연이 건재하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적비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서 만검세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우벽산은 안절부절못하며 겨우 대답했다.
“그것이…… 최근엔 제가 가주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처지라…….”
“허어! 그럼 대체 누가 가주님의 명을 받는단 말이오?”
우벽산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한쪽 옆에 선 묵검을 보았다.
됐다.
여기까지다.
연회장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만검세가가 판을 벌였고, 삼당사각이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충신 염백이 무덤을 팠다.
‘나는 그저 거들 뿐.’
우벽산의 시선을 받은 묵검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묵검, 이제 어떻게 할 텐가? 가주님의 시체를 보일 텐가?’
마침내 묵검이 입을 열었다.
“모두 걱정 마십시오. 가주님은 매우 건강하십니다. 만검가는 더 이상 괜한 이야기로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지금 본가가 일부러 분란을 조장한다는 거요?”
하기룡의 표정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아닙니까?”
묵검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자 하천웅이 불쑥 나섰다.
“이보시오, 호위! 이건 불필요한 분란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가 알아야 할 권리요! 본가에서 내어준 오십만 냥이 뉘 집 똥개 이름인 줄 아시오?”
“본가가 돈을 갚지 않겠다고 했습니까?”
“뭣?”
“아직 이자 납입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그 어떠한 문제도 없을 텐데요.”
“소가 달아난 뒤에 외양간을 뒤적인들 무슨 소용이겠소! 우린 그전에 제대로 확인해 보겠다는 거요!”
“믿고 기다리십시오. 가주님은 잘 계십니다.”
“그럼 도대체 왜 나타나지 않는 거요? 혹시 수저 들 힘도 없는 것 아니오?”
하천웅이 비꼬듯 말하자, 묵검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가주님은 아주 강건하십니다. 당장 공자님과 비무를 겨뤄도 될 정도로.”
“호오, 그렇소? 말 잘했소! 그럼 이러면 되겠군! 나, 하천웅이 벽력적가주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는 바요! 정식 비무 요청이니 거절하진 않으시겠지!”
다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묵검이 여전히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하천웅을 응시했다.
“정녕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가주님은 현재 아상 어르신의 소식으로 슬픔에 잠겨 계십니다. 비무를 하실 만한 상황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연회장에 주인이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제 의심이 점점 확신이 되고 있소! 솔직히 말해보시오! 이미 적 가주님은 돌아가시고, 누군가 대신 권력을 장악해서 이런 엄청난 일을 꾸민 건 아니오?”
장내가 더욱 술렁거렸다.
이제 참석자 대다수는 의심이 확신으로, 확신은 모종의 배신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확실히 만검세가의 주장도 일리는 있어.”
“그러게 말일세. 적 가주님이 강녕하시다면 모습을 드러내면 될 일이 아닌가?”
“만약 비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신다면 더 이상 헛소문은 나지 않겠지. 그런데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정말 돌아가신 걸지도…….”
우벽산은 어수선한 상황을 지켜보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완벽한 성공이다!’
하천웅이 여세를 몰아 성큼 걸음을 옮겼다.
“정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주전으로 가서 사정해 보겠소!”
“지금 어딜 들어가시겠다는 겁니까?”
묵검이 매서운 표정으로 그 앞을 막아섰다.
하천웅이 입매를 이죽거렸다.
“앞을 막는 걸 보니 정말 뭔가 숨기는 게 있나 보군. 비키시오.”
묵검이 다시 제지하려는데,
“커험! 물러나게!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맹사천이 날카롭게 일렀다.
그 역시 묵검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가주전 입구까지 다가간 하천웅이 포권을 하며 소리쳤다.
“적 가주! 나, 만검세가 하천웅이오! 적 가주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는 바이오!”
“…….”
모두가 숨죽인 상황.
하지만 가주전 안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흥! 대답할 리가 없겠지. 아마도 다 쓰러져 가는 시체 모습을 하고 있거나, 정말 시체거나.’
하천웅이 내심 조소를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소!”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하천웅이 막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콰다앙!
슈우우우욱! 쿠당탕!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하천웅의 신형이 튕겨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눈 깜빡할 사이에 저만치 날아간 하천웅이 탁자를 부수며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고 그 모습을 보는데, 마침 가주전에서 한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응? 문 앞에 뭐가 있었나?”
뒤통수를 긁적이며 모습을 드러낸 남자.
놀랍게도 그는 벽력가주 적비연이었다.
장내의 무인들이 저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살, 살아 있잖아?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우벽산이었다.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을 줄이야!
하면 정말로 지금까지 충신을 가리기 위한 암계였단 말인가?
게다가 가문의 비기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영단제조법도 사실이고?
‘아…… 그럼 엿 된 건데.’
우벽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한편 하기룡은 매서운 눈초리로 우벽산을 노려보았다.
[우 총관!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저, 저도 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가주의 몸이 정상은 아닐 겁니다.]
[어쨌든 오늘 일은 나중에 반드시 따지겠소!]
하기룡이 표정을 싹 바꾸고는 돌아섰다.
“적 가주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적비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기룡이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는데,
“안에서 듣자 하니 나하고 한판 뜨자는 분이 있는 것 같던데. 뉘신지?”
“…….”
“참고로 난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소. 내 호위가 거듭 양해를 구했을 거라고 생각하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비무를 요청했으니 일단은 응해드릴 생각이오. 누구요?”
그러자 하천웅이 몸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나요. 적 가주님께서 건재하다는 걸 만인에게 알리고 헛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소!”
“한마디로 날 시험해 보고 싶다?”
“뭘, 또 그렇게까지…….”
“뭐, 좋소. 정 원한다면 확인해 보시오. 내가 오늘내일 죽을 사람인지. 아니면 그 반대가 될지.”
적비연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 순간 하천웅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저 새끼…… 정말 아픈 거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