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다 망쳤어
연무장에 마주 선 두 사람.
후우웅.
밤바람이 불어왔다.
연회장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이제 모두 연무장으로 이동해 두 사람의 비무가 시작되기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적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마주 선 하천웅을 빤히 응시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저 녀석을 마음껏 두드려 팰 수 있는 시간을 말이다.
어디 보자.
구경꾼은 충분히 모아진 것 같고.
아마 오늘 비무로 인해 장사에서 떠도는 소문은 완전히 정리가 될 터.
하지만 하천웅만은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적 가주, 그깟 자존심 때문에 제 무덤을 파는구나. 네놈 몸이 멀쩡했더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 필시 몸이 정상은 아닐 터. 이번 기회에 네놈을 아주 자근자근 밟아주마.’
하천웅은 몸이 근질거렸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흥분하면 안 된다.
자신을 특별히 예뻐해 준 아상 어르신이 보침을 놔주며 흥분은 금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자칫 내공이 뒤엉킬 수 있을 테니까.
‘아상 어르신, 감사합니다. 갑자기 보고 싶군요.’
잠시 묵념을.
하지만 하천웅은 모르고 있었다.
그 아상 어르신이 눈앞에서 자신을 신나게 두드려 팰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쨌든 하천웅은 평정심을 가지고 냉정하게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다.
중병을 앓는 적비연이 정상적으로 비무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만약 비무 중에 각혈이라도 한다면?
장사에 떠도는 소문은 더 살이 붙을 거다.
그럼 벽력적가가 폭삭 주저앉는 건 시간문제가 될 터!
지금까지 우벽산에게 들은 정보에 의하면 적비연은 절대로 정상 몸이 아니다.
온갖 귀한 영약을 끌어 모아 복용했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지 않던가?
뭐, 생각보다 멀쩡히 걸어 나와서 좀 놀라긴 했지만.
‘어쩌면 지금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지도 모르지.’
좋아, 오늘 이 연무장에서 적비연을 때려눕히는 거다.
손속에 사정은 두지 않으리라.
마침 적비연이 포권을 하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같은 날은 진검을 사용하기 보다는 목검이 어떻소?”
역시!
하천웅은 내심 조소를 머금었다.
적비연이 진검을 거부한다.
‘어지간히도 몸이 성치 않은 모양이구나!’
뭐, 목검도 상관없다.
어차피 생사결이 아닌 이상 이 자리에서 적비연을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하천웅이 포권하며 대꾸했다.
“뭐, 좋습니다. 적 가주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배려해 드리지요.”
하천웅이 일부러 ‘배려’라는 단어를 써서 은근히 도발했다.
하지만 적비연은 여유 있게 웃으며 답했다.
“배려 고맙소. 그럼 시작합시다.”
적비연으로서는 목검을 선택한 이유가 단 하나였다.
‘자칫 내가 널 죽여 버리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목검이라면 정말 마음 놓고 두드려 팰 수 있지 않겠나?
아, 이 얼마나 즐거운 시간인가?
적비연이 연무장 한쪽에 세워진 목검 두 자루를 뽑았다.
하천웅이 목검 하나를 받아 들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시오? 비무하지 않을 거요?”
자신과 달리 적비연은 멀뚱하게 선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긴장해서 얼어버렸나?
하지만 적비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시작하시오. 난 준비됐으니.”
‘기수식도 취하지 않고? 나를 도발하는 건가?’
아니, 어쩌면 도발이 아니라 기수식을 취할 힘조차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긴.
중병을 앓아 다 죽어간다는 자가 목검 들 힘은 있겠나?
잠깐 가여운 생각도 들었지만, 하천웅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밟아준다!
각오를 굳힌 그가 버럭 소리치며 튕기듯 날아갔다.
“선공을 하지 않겠다면 먼저 가겠소!”
팟!
확실히 아상에게 보침을 맞은 후 내공이 상승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쇄도한 하천웅이 강하게 일검을 내질렀다.
“하앗!”
만검세가의 독문검초 중 초풍일검(初風一劍)!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단순한 공격이지만, 그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다.
검봉이 명치 가까이 닿는 순간까지도 적비연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천웅의 입매가 비틀렸다.
‘끝이구나. 단 일초에 결과가 나오다니.’
초풍일검이 명치에 꽂히는 순간, 적비연은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리라.
그 고통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테니.
‘아마 피를 토하겠지. 네놈의 그 허세가 무덤을 판…… 응?’
순간 하천웅이 눈을 치뜨고는 옆에서 날아드는 목검을 보았다.
‘어, 어느새……!’
빠악!
“크아아악!”
순식간에 날아든 목검이 하천웅의 얼굴을 때렸고, 그는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해서 입을 딱 벌렸다.
“방,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맙소사……! 하 대협이 단 일 검에 당하다니!”
한편 바닥을 한참이나 구른 하천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길!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부풀어 오른 뺨을 감싸 쥐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통증보다 황당한 마음이 더 컸다.
분명히 검봉이 명치를 찌를 찰나였다.
한데 어째서 적비연의 목검이 더 빨리 자신의 얼굴을 때릴 수 있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적비연이 환자가 아니라고 쳐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괜찮소?”
적비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저 때려죽일……!’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솟았지만 하천웅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서라. 흥분하지 말자.
흥분하면 또 내력이 뒤엉켜 고생할 것이다.
운일 뿐이다.
그래, 절대로 운이다!
하천웅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제부터는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한편 적비연은 내심 조소를 머금고는 하천웅을 보았다.
‘운이라고 생각하겠지.’
물론 운일 리가 없다.
만검세가의 초풍일검?
그건 이미 적비연이 수천, 수만 번을 휘둘러 본 검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운귀의 기억으로 그렇다.
그러니 적비연은 초풍일검을 어떻게 회피해야 할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초풍일검의 약점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하천웅은 겨우 절정 일 단에 오른 수준.
지금 적비연에 비한다면 여섯 단이나 아래다.
그런 데다 하천웅이 방심까지 했으니 적수가 될 리 없다.
하천웅이 다시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이번에야말로 방심하지 않는다. 저놈이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마음을 다잡은 하천웅이 다시 한 번 기합성을 터뜨리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하앗!”
파바밧!
순간 그의 신형이 어지럽게 흩날리는가 싶더니, 수십 자루의 검이 쏟아지는 듯했다.
내지르는 검봉에서는 붉은 기운이 폭발하면서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오오! 만검세가의 백검혈화(百劍血花)다!”
확실히 만검세가가 자랑하는 절초라 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적비연은…….
“대단해! 저 절초를 완전히 피하고 있다니!”
“적 가주님의 무위가 상상 이상이야!”
“예전보다 오히려 무공 수위가 상승한 것 같은데?”
구경꾼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적비연은 마치 혈화 사이를 누비는 한 마리의 꿀벌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천웅은 쉴 새 없이 검공을 퍼부으면서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놀랍게도 적비연은 모든 검격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하고 있었다.
찌르고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그러던 찰나,
쉬이이잇!
혈화 사이를 비집고 날아든 검봉이 그대로 하천웅의 어깨를 내질렀다.
퍽!
“크억!”
자칫하면 검을 놓칠 뻔한 하천웅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적비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검을 휘둘렀다.
쉬이이잇!
“헉!”
급한 대로 하천웅이 얼른 검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그 순간 검로가 휘청 굽는가 싶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옆구리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퍼억!
“커억!”
옆구리가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이런…… 개……!”
울분을 터뜨릴 새도 없이,
따악!
“아악!”
퍼억!
“크억!”
빠악!
“크악!”
목검이 마구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복날 개 패듯 날아드는 목검 자루에 하천웅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 저건……!”
“심하군…….”
구경꾼들이 저마다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검초고 나발이고 없었다.
적비연은 목검을 마치 몽둥이처럼 휘둘러 댔고, 하천웅은 매 맞는 어린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달아나기 바빴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매를 단 한 대도 피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이런 수모를……!’
하천웅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방심을 한 것도 아닌데 적비연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가 없다니.
빈틈이 보여 공략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다른 곳에서 한 박자 빠른 공격이 쏟아져 들어온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마치 만검세가의 모든 검초를 한눈에 꿰는 듯한 움직임이지 않나?
게다가 무공 수위가 자신보다 다섯 단계 이상 앞선 느낌이다.
‘젠장! 죽여 버리고 싶다!’
하천웅이 입술을 콱 깨무는데,
“헛!”
순간 기혈이 뒤틀렸다.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건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울분이 치민 것이다.
퍼억!
“크억!”
마침내 명치까지 찔린 하천웅이 입을 딱 벌리고는 그 자리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 대협이 쓰러졌어!”
“적 가주님의 무공이 대단하군.”
“하 대협이 전혀 상대가 안 되는 느낌이야.”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젠장! 젠장! 뭘 수군거리는 거냐? 이 개새끼들아!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다! 전부 다!’
그 순간 명치가 극심하게 부풀어 올랐다.
“크읍!”
큰일이다.
흥분했더니 기혈이 뒤엉키면서 내력이 폭발하려고 한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하천웅에게 날아드는 한마디.
“괜찮소? 많이 아파 보이는데?”
‘저 개색……! 크읍!’
마침내 부풀어 오른 명치가 터졌다.
퍼엉!
물론 체내의 폭발이었기에 장삼에 가려져 다른 사람은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크아악! 쿠웨에엑!”
하천웅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그러자 적비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런! 정말 괜찮소? 혹시 병세가 있으시면 말해주시오. 내 손속에 사정을 두리다.”
“뭐, 뭣이? 이런…… 크읍!”
다시 기혈이 뒤틀린다.
하천웅은 얼른 아상의 충고를 떠올렸다.
그래, 웃자.
하천웅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걱정 마시오. 적 가주가 병중이 아닌가 싶어 손속에 사정을 두었을 뿐이오. 이제 보니 내가 최선을 다해도 되겠군.”
“물론이오. 내 호위가 말했다시피 나는 아주 건강하오.”
“그런 것 같군! 어디 그럼!”
파밧!
이번에는 예고도 하지 않고 튀어나갔다.
하지만,
퍼억!
목검에 얻어맞은 하천웅이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구경하던 자들의 시선이 하늘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
콰당!
종잇장처럼 구겨진 하천웅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으하하하! 과연 좋은 한 수…….”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천웅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적비연의 목검이 하천웅의 몸을 마구 두드려 댔다.
퍽! 퍽!
“크악! 으하하하!”
퍽! 퍽! 퍼퍽!
“아악! 으하하하! 크아악! 흐헤헤! 아아악! 그, 그만……! 크히히히!”
매질이 계속됐다.
하천웅은 연신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차마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든 광경.
마침내 적비연이 목검을 치켜들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잠, 잠까안! 그만! 으흐흐! 그만합시다. 이제…… 으흐흐. 제발……! 흐흐흐흐!”
적비연의 바짓단을 붙든 하천웅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애원했다.
매질을 멈춘 적비연이 마침내 목검을 한쪽에 던졌다.
뎅그렁.
적비연이 포권했다.
“하 대협의 가르침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소. 감사드리오.”
쥐 죽은 듯 고요한 연무장에 적비연의 담담한 목소리만 울렸다.
한편 무리에 섞여 비무를 지켜보던 하기룡은 입술을 콱 씹고는 돌아섰다.
‘빌어먹을!’
뭐? 중병에 걸려?
어딜 봐서 저 모습이 중병에 걸린 환자인가?
오히려 자신이 상대해도 버거울 만큼 강하지 않은가?
‘우 총관, 이 개자식을……!’
몇 걸음 옮기던 그가 멈칫하고는 연무장에 주저앉은 하천웅을 보았다.
순간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데…… 운귀는 어디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