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것들이 자꾸 선을 넘네?
“오늘 연회에 참석해 주신 귀빈들께 감사드립니다. 실은 제가 아상 어르신과 각별한 사이로 지내다 보니 상심이 무척 컸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손님들을 모시고 이제야 인사드린 점은 저의 과오입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적비연이 인사를 하자, 무인들이 저마다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상 어르신의 소식은 저희들로서도 충격이었으니까요.”
“여러모로 심란하실 텐데 이렇게 나서주셔서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적비연은 내심 차갑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비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던 자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언제 의심이라도 했었냐는 듯 입장을 싹 바꾼다.
만약 자신이 병색이 완연한 상태로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더 수군거렸을 테지.
대번 적가를 대하는 시선부터 달라졌으리라.
거기에 비무에서 졌다면?
당장 내일부터 빚 독촉에 시달릴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주님을 이렇게 뵈니 기쁘군요. 추진하시는 사업이 번창하시길 기원합니다.”
낭금회주 진청양이 읍소까지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빚쟁이도 울고 갈 정도로 딱딱하게 굴던 그였다.
‘결국 중요한 건 힘이다.’
적비연은 속내를 갈무리하며 웃음으로 답했다.
“고맙소. 모두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만 조용히 쉬고 싶군요.”
“암요.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하실 텐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적 가주님을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벽력적가는 장사의 자랑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외치는 소리에 적비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가주전 안으로 들어선 적비연은 문을 닫자마자 얼굴에 덮어쓴 얇은 가죽을 벗겨냈다.
동시에 그의 관절이 기이하게 꺾이는가 싶더니 체형이 조금씩 변해갔다.
우드득……! 꾸득……!
강동칠괴의 독자무공인 환라육천골이었다.
이 환라육천골 덕분에 목의 근육을 변조해 목소리도 원래 적비연과 흡사하게 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운귀의 모습으로 돌아온 적비연이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이제야 좀 화가 풀리네.’
바짓단을 붙들고 애원하던 하천웅의 모습을 떠올리니 속이 다 후련하다.
적비연이 옷을 벗어 던지자, 그 안에 시커먼 무복이 나타났다.
‘그럼 이제 다시 돌아가 볼까?’
곧 적비연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스르르 묻혀갔다.
한편 연무장에 쓰러져 있던 하천웅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탁 뱉어내고는 연신 씨근거렸다.
‘제길! 이 치욕을 내 언젠간……! 크웁!’
순간적으로 기혈이 뒤엉키는 것을 느낀 그가 다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댔다.
“흐헤헤헤. 언젠간…… 이 빚을 갚아주지. 으흐흐흐.”
흐느낌에 가까운 웃음소리.
마침 그의 앞에 나타난 하기룡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몇 대 맞더니 실성이라도 한 것이냐?”
“형, 형님…….”
하천웅이 주눅 든 표정으로 하기룡을 올려다보았다.
하기룡은 전에 없이 싸늘한 표정이었다.
하천웅이 내심 이를 갈았다.
‘제길, 잘난 척하지 말라고!’
형은 자신에게 있어서 언제나 벽 같은 존재였다.
넘고 싶지만 넘을 수 없는 벽.
결코 넘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했을 때,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넘을 수 없다면 언젠간 부수겠다고!
하지만 오늘은 그 벽이 더욱 단단하고 높아 보였다.
하기룡이 싸늘하게 일렀다.
“추하다. 일어나라.”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하천웅이 속내를 숨기고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정말이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적 가주……! 이 빌어먹을 놈……!’
하기룡은 그런 하천웅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운귀는?”
“운귀는 왜 찾는 겁니까?”
“운귀는 어디에 있나?”
하기룡이 대답 대신 같은 질문을 던졌다.
별로 길게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 듯했다.
하천웅도 눈치가 있는지라 더는 따지지 않고 허공을 향해 불렀다.
“운귀!”
“…….”
대답이 없다?
하천웅이 하기룡과 눈길을 마주치고는 다시 한 번 불렀다.
“운귀!”
“…….”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이놈, 어딜 간 거야?’
하천웅이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기룡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훑었다.
하천웅이 다시 목청을 높이는데,
“운……!”
순간 바로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하천웅과 하기룡이 동시에 돌아보니, 시커먼 옷을 입은 운귀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천웅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하기룡을 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하시죠.”
하기룡이 천천히 다가와 운귀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편 운귀의 모습을 한 적비연은 그 시선을 담담히 받으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그 낯짝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곤란할 뻔했군.’
하기룡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주인이 쓰러졌는데 부축도 하지 않나?”
“소가주님은 공자님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뭐라?”
“주군은 쓰러졌을 때 부축받는 걸 싫어하십니다. 모르셨습니까?”
어딘지 도발에 가까운 말투.
하기룡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적비연은 그런 하기룡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 보면 몹시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실제로 운귀는 하기룡과 썩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당연했다.
만검세가에서 후계 자리를 놓고 두 형제가 다투는 상황이었으니.
하천웅을 호위하는 운귀의 입장에서는 하기룡이 영 껄끄러울 수밖에.
하기룡이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지금껏 어디에 있었나?”
“줄곧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제가 은신이 좀 뛰어난 편입니다.”
“아까는 불러도 바로 나오지도 않고?”
“저는 주군의 부름에만 응답할 뿐입니다. 주군이 정말로 절 필요해서 부른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기룡이 뺨을 씰룩였다.
소가주인 자신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아직 나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웅아가 후계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같잖군!’
기르는 개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재수 없는 것마저 동생을 꼭 닮았다.
적비연이 하기룡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없다. 임무에 충실하도록.”
“걱정 마십시오.”
하기룡은 어금니를 꾹 깨물더니 이내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말이지 오늘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든다.
제대로 되는 것도 없는 날이다.
한편 하천웅은 굳은 표정으로 적비연에게 다가왔다.
“운귀. 형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죄송합니다.”
“아니, 아주 잘했다. 역시 넌 든든한 내 호위다.”
“……감사합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숙였다.
‘콩가루 집안이라 참 다행이야.’
* * *
“한심한…….”
하불범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얼굴이 퉁퉁 부은 하천웅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쯧쯧. 어쩐지 일이 수월하게 돌아간다 싶었지.”
“면목 없습니다.”
“친분을 쌓으려던 아 당주는 죽어버렸고, 병치레 중이라는 적 가주에게는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지고 돌아와? 대체 네놈이 제대로 하는 게 무엇이냐?”
하천웅이 고개를 푹 숙이자, 하기룡이 넌지시 나섰다.
“아버님, 제가 생각할 때는 적 가주가 함정을 판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불범이 눈을 치뜨고 묻자, 하기룡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적 가주는 병치레 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적 가주가 병치레를 한다는 소문도 일부러 적가장에서 퍼뜨린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오늘처럼 본가에 망신을 주기 위해서?”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 가주의 몸 상태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비무를 했더라도 승부가 어찌 되었을지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하불범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그 정도였단 말이냐?”
“예, 최소 절정 상단에 올라선 모습이었습니다.”
“하면 그동안 정말 폐관수련을 했다는 건가?”
“뿐만 아니라 본가의 무공을 치밀하게 연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웅아의 검초를 마치 다 알고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흐음, 하면 벽력적가가 본격적으로 본가의 몰락을 노린다는 말인가?”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은 산에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과연. 적 가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본가를 무너뜨리려고 먼저 칼을 뽑아?”
하불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한편 하천웅 뒤에서 은신한 채로 이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적비연은 기가 찼다.
‘시비는 네놈들이 먼저 걸어놓고 산속 호랑이 타령을 해? 뭐? 내가 먼저 칼을 뽑아? 누가 보면 내가 가해자인줄 알겠군.’
의식의 흐름이 저렇게도 진행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짧은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연스럽게 바뀌다니.
‘이게 바로 악당의 논리인가?’
하기룡이 한 술 더 떴다.
“아버지, 적 가주가 이렇게 나온 이상 본가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봐, 너희들은 원래 가만히 안 있었다고. 오히려 가만히 있었던 건 우리 쪽이라니까?
‘심지어 비열한 음모까지 꾸몄지.’
다시 생각해도 강동칠괴 사건은 이가 갈린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지금은 철저하게 하천웅의 호신위로 지내야 한다.
언젠가는 이놈의 집구석을 풍비박산 낼 기회가 있을 터.
‘그나저나 이렇게 적진 복판에 들어와서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네. 조금 부아가 치밀긴 하지만.’
하불범이 하기룡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혹시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느냐?”
“예, 소자가 생각한 것이 있긴 합니다.”
하기룡이 하천웅을 힐끔거리고는 대답했다.
하불범이 대략 눈치를 채고는 말했다.
“웅아는 그만 물러가라.”
“예?”
“네 형과 긴히 할 얘기가 있다.”
“하지만 아버지, 저도…….”
“뭘 잘 했다고 끼어들려고 하느냐? 넌 더 이상 사고나 일으키지 마라.”
하천웅이 억울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하기룡은 그런 하천웅과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제길!’
하천웅이 이를 뿌득 갈고는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적비연도 어쩔 수 없이 하천웅 뒤를 따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해서 은신한 채로 이야기를 엿듣고 싶었지만 초절정고수 하불범을 앞에 두고서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결국 적비연은 어쩔 수 없이 하천웅의 뒤를 따르면서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인정 못 받고 사는구나.’
문득 측은지심마저 생긴다.
가주전을 나온 하천웅이 씨근거리더니 적비연을 불렀다.
“운귀!”
“왜.”
“왜?”
“왜…… 부르셨습니까?”
“너마저 날 무시하는 거냐?”
하천웅이 도끼눈을 하고는 쏘아보았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급하게 부르시기에 여쭤보았습니다.”
“흥! 가서 술이나 가져와라!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잠도 들지 않을 것 같구나!”
하, 호신위에게 이런 것까지 시켜?
만검세가 이 공자의 호신위가 이런 극한 직업이었다니.
하지만 속내와 달리 적비연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곧 구해 드리겠습니다.”
차라리 잘됐다.
술에 취해 빨리 잠이 들면 몸을 빼내기가 훨씬 쉬워질 터.
술을 구해 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운귀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하천웅은 그간 이런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때문에 하천웅이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어디서 구해 오면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적비연이 술을 구해 오자 하천웅은 연거푸 들이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만취해서 곯아떨어졌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적비연이 은신술을 펼친 채 만검세가에서 빠져나왔다.
‘이제야 자유구나. 그럼 이제 단약을 만들러 가볼까?’
타앗!
순간 적비연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아으, 바쁘다, 바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