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32화 (33/301)

32. 이것들이 자꾸 선을 넘네?

“그런 분위기도 잘 어울리는군요.”

예상대로 은하란은 적비연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적비연을 보고도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낯선 운귀의 모습임에도.

적어도 그녀가 비면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진짜인 듯했다.

“어떤 분위기라는 거지?”

“글쎄요. 뭐랄까, 어둡고 음침하면서도 우울한 분위기?”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운귀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유년 시절 고아로 떠돌다가 하불범의 눈에 띄어 만검세가로 들어왔다.

당장 굶어 죽을 걱정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운귀는 다행이라 여겼다.

그때가 다섯 살.

하지만 만검세가로 들어온 후 그는 죽도록 검을 휘둘러야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성취가 늦다 싶은 날이면 심한 매질을 당하고 밥도 굶어야 했다.

사파의 조직처럼 생사결을 벌이며 살아남아야 하는 악조건은 아니었지만, 그 못지않은 외로움과 고통을 견뎌왔다.

“너는 내 아들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네 평생의 임무다.”

정말이지 하불범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

일종의 세뇌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손이 찢어지도록 훈련한 결과 그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절정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하천웅의 호위를 맡기 시작했다.

어린 하천웅은 운귀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하천웅이 어딘가 다치기라도 하면 직접 금창약을 발라주고 그 작은 입술로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천웅은 조금씩 변했다.

끊임없이 형과 비교당하면서 성격도 점점 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은 자신과 형을 비교하며 수군거리는 시종을 우연히 보고는 일장에 때려죽인 일도 있었다.

운귀는 그런 하천웅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인간이라는 동질감.

그 미묘한 공감 때문에 운귀는 더욱 하천웅을 가까이에서 지켰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하천웅이 후계의 자리를 잇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라고 생각했겠지만, 역시 용서는 안 돼. 열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그 열등감 하나 때문에 엄한 사람들을 죽여?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사연은 있는 법이지. 그 사연을 다 들어주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테고.”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물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시군요?”

“용서 안 해. 나는 도인이 아니니까. 내 가문을 지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가주니까.”

“그렇군요. 책임감 있는 모습 보기 좋네요.”

은하란이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쓴웃음을 짓더니 곧 말을 이었다.

“가시죠. 초 관주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그러지.”

적비연이 대답과 동시에 품에서 얇은 가죽을 꺼내 얼굴에 덮어썼다.

다면선사가 만든 인피면구였다.

우드득……! 쿠득……!

환라육천골까지 시전하니 그의 외모는 완벽하게 적비연으로 돌아와 있었다.

은하란과 함께 지하 일 층으로 내려가자 제원중을 비롯한 의원들이 모여 있었고, 한쪽에는 초관응이 자리하고 있었다.

“많이 늦으셨군요.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관응이 인사를 건넸다.

적비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얘기 들었습니다. 영물의 내단과 천상단 제조법을 알고 싶다고요?”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압니다만, 아 당주님이 돌아가신 지금 본관으로서는 좀 더 확실한 쪽을…….”

“여기 있습니다.”

적비연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천상단 제조법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초관응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간단히?

가문의 비전을?

초관응이 허둥지둥 서신을 펼치고는 꼼꼼히 살펴보았다.

글을 읽어가는 동안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이건…… 진짜다! 진짜 영단을 만드는 비법이야!’

물론 이 비율대로 만든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으리라.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자소단 정도의 효력은 충분히 발휘할 터.

“더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적비연의 물음에 초관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만해도 충분합니다.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맹주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과연 그 영감이 기뻐하려나?

적비연은 아마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맹주는 아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 열흘간은 식음을 전폐하고도 남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초관응이 포권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적 가주님의 공로를 반드시 맹주님께 아뢰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맹이 발전해야 본가도 나아가지요.”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그럼 이만.”

초관응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그러자 지켜만 보던 제원중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가문의 비전을 저리 건네주어도.”

“어차피 누군가 알게 된다면 맹이 가장 안전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맹에서도 천상단 제조법을 여기저기 떠벌릴 리는 없을 테니.”

뭐, 사실 가문의 비전도 아니고.

게다가 제조법이 있다고 해서 정말로 만들 수 있는 건 또 다른 문제지.

적비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도 영단을 만들어볼까? 재료는?”

“지하 이 층입니다.”

“그럼 가지.”

제원중과 의원들이 앞장을 서서 한 층을 더 내려갔다.

한데 그곳에는 재료 대신 침대가 있었고, 다 죽어가는 환자가 거기에 누워 있었다.

적비연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누구지?”

“최근 천상원을 찾아온 환자입니다. 저희들로서는 치료하기가 어려워 가주님께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사부님과 견줄 정도로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저 환자를 살릴 수 있으십니까?”

제원중과 의원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는 적비연을 바라보았다.

적비연이 은하란을 돌아보자, 그녀는 자신도 말릴 수가 없었다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과연. 날 시험해 보겠다는 건가?’

아상이 남긴 유언장만으로는 통하지 않은 거다.

하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아무리 유언을 남겼다고 한들, 갑자기 알게 된 가주를 사부처럼 모시기란 쉽지 않은 일.

본래 존경은 강요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지 않던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섬김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이리라.

그렇다면 오히려 잘됐다.

‘너희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되어주지.’

생각을 굳힌 적비연이 침상의 환자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환자는 혼수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터.

‘날 시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군.’

확실히 천상원의 의원들만으로는 이 환자를 살릴 실력이 안 된다.

실제로 아상이었어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환자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은 적비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테니 눈치껏 보고 익히도록.”

“…….”

제원중을 비롯한 의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이 환자를 치료한다고?’

아마도 허세이리라.

아니면 정말 의술의 기본도 모르거나.

그런데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적비연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침상 옆에 놓인 침술 도구를 이용해서 거침없이 침을 놓아갔다.

먼저 거궐혈(巨闕穴)에 장침(長鍼)을 찔러 넣고 나자 환자의 거친 호흡이 대번에 고르게 돌아왔다.

이후로도 적비연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침을 놓아갔는데, 그 현란한 손놀림에 제원중을 비롯한 의원들이 넋을 놓을 지경이었다.

혈 자리에 따라서 호침(毫鍼)과 봉침(鋒鍼)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는데, 신중함이 엿보이면서도 신속한 움직임에 그저 입만 척 벌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비연은 환자를 슬쩍 돌려 눕혔다.

왼쪽 옆구리가 크게 부풀어 오른 모습.

‘이곳에 생긴 염증이 환자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어.’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손을 내밀었다.

“검침(劍針).”

“예?”

“어서!”

적비연이 외치는 소리에 제원중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옆에 놓인 검침을 건네주었다.

“꽉 잡아라.”

“예, 어르…… 아니, 가주님!”

제원중과 다른 의원들이 얼른 다가와 환자를 붙들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놓은 침술은 기력을 보하고 마취를 시켜 이 수술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기초 공사라고 할 수 있었다.”

적비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칼날처럼 뾰족한 검침을 이용해 옆구리를 푹 찔렀다.

환자가 꿈틀 반응을 보였지만, 의원들이 단단히 붙들고 있는 까닭에 더 큰 움직임은 없었다.

적비연은 시커멓게 곪은 부위를 거침없이 찢어서 고름을 빼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속살이 썩어 있었다.

“자용고(自溶膏)와 유형분(幼螢粉)!”

적비연의 말에 의원 중 한 명이 얼른 자용고와 유형분을 집어 들어 건네주었다.

적비연은 기름기가 많은 자용고를 상처 부위에 바르면서 유형분을 뿌려 지혈을 겸했다.

“원리침(圓利鍼).”

“여기 있습니다.”

이제 의원들은 완전히 보조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비연의 시술 하나하나를 뜯어보기 위해서 온 정신을 집중했다.

적비연이 원리침을 이용해서 세밀한 부분을 잘라가며 시술하자 실내에는 숨 막힐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원중은 이제 적비연 옆에 서서 손수건으로 땀까지 닦아주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랐다.

‘대단하다. 마치 이건…… 사부님의 의술을 보는 것만 같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깝지 않은가?

다른 의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부가 칭찬을 했으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수술이 이어졌을까?

구석구석 농을 완전히 제거한 적비연은 상처 부위를 완전히 봉합하고는 물러섰다.

“후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였던 만큼 적비연도 내심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의원들이 조심스럽게 환자를 바로 눕히자, 평온한 표정의 환자 얼굴이 드러났다.

“……감사합니다.”

제원중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보여줘서?

자신들이 의심했음에도 탓하지 않아서?

자신들도 살리지 못한 환자를 살려줘서?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적비연에게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든다.

이 중원에 적비연과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랄까?

적비연이 땀을 훔쳐내고는 말했다.

“감사는. 뭐든 확실히 해야지.”

순간, 제원중이 털썩 무릎을 꿇더니 포권했다.

“맹세합니다! 가주님과 원주님을 도와 천상원이 중원 제일의 의원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순간 다른 의원들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마침내 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존경심이었다.

적비연이 씨익 웃었다.

“고맙군. 그럼 이제 할 일을 하자고. 천상단을 만들어야지?”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제원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적비연이 그를 따라 다른 방으로 들어가니 천상단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방 안에 고루 갖춰져 있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부터 밤새도록 천상단을 제조한다. 완성된 천상단은 결과에 따라 특등품부터 삼등품까지 나누도록.”

“예!”

의원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비연 곁으로 은하란이 살며시 다가섰다.

“이걸로 적가장의 빚은 탕감할 수 있겠군요.”

“탕감하고도 남겠지. 어쩌면 중원 최대의 부자가 될지도.”

“천상단을 얼마에 파실 생각이죠?”

“아직 몰라.”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강호 최대의 경매장에서 팔 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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