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것들이 자꾸 선을 넘네?
치이이익.
하얀 연기와 함께 시커먼 철기가 화로에서 나왔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연기는 환기구를 통해서 빠르게 사라졌다.
철기는 구슬 모양의 철구(鐵球) 세 개가 나란히 붙은 모양이었다.
적비연은 신중한 손놀림으로 철기를 탁자 위로 옮겼다.
천상단은 한 번에 세 개씩만 만들 수 있었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포함해서 각 재료를 반죽하여 단환을 만드는데, 보통의 영단과 다르게 정확한 온도에서 일정 시간 동안 가열해야 한다.
이때 약간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많은 양의 천상단을 생산할 수가 없다.
‘이걸로 마지막 세 개.’
적비연이 심호흡을 했다.
그의 뒤로 영단 제조를 담당하는 의원들이 모두 모였다.
의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적비연이 천천히 철기 덮개를 열었다.
“오오!”
뒤에서 지켜보던 의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일단 부서진 단환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중요한 건 지금부터.
적비연이 접시에 대고 철기를 천천히 기울였다.
꿀꺽.
모두들 마른침을 삼킨다.
투둑.
데굴데굴.
단환 세 개가 철구에서 떨어지며 접시 위에 뒹굴었다.
다음 순간,
쉬이이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단환에서 연기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알싸한 약향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기관 장치로 설계한 환기구에서 열심히 연기를 빨아들였지만, 짙은 약향만큼은 오래 남았다.
“진하다! 빛깔까지 고와!”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
“그런데 한 개가…….”
어느 의원의 말대로 단환 하나가 다소 부실해 보였다.
연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그 단환은 마침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바스락거리며 가루가 되고 말았다.
“아…….”
의원들이 저마다 탄식을 흘렸다.
저렇게 가루가 되어 부서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
제아무리 인면지주의 내단이 들어갔다지만 천상단을 가공하다가 지금처럼 마지막 순간에 잘못되면 모든 약효가 날아가 버린다.
“하나는 버렸군.”
“아깝다…….”
하지만 두 개는 성공이다.
그중에서도 한 알은 빛깔이 영롱한 황금빛을 띠고 있어 특등품이 예상된다.
아니나 다를까, 단환 두 개를 꼼꼼하게 살핀 제원중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는 삼등품이지만, 다른 하나가 특등품입니다!”
“오오오!”
의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누군가는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휴우. 다들 수고했어. 밤새 하얗게 불태웠다.”
적비연이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드디어 천상단 제조를 끝냈다.
밤을 꼬박 새웠다.
체력을 낭비하는 일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집중하다 보니 심력이 상당히 소모됐다.
제원중이 다가와 보고했다.
“총 스물네 개의 영단 제조를 시도했고, 그중에서 특등품이 세 개, 일등품 다섯 개, 이등품 세 개, 삼등품 일곱 개, 실패가 여섯 개입니다.”
“결국 열여덟 개만 성공했단 말이군.”
“예, 가주님. 하지만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입니다. 이등품부터는 소림의 대환단 수준이니 큰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원중의 말이 사실이다.
뭐, 욕심 같아서는 특등품이 두세 개 정도는 더 나와주길 바랐지만.
그래도 실패가 더 많지 않은 게 어딘가?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정리하도록 하지. 다들 고생했어.”
“별말씀을요. 가주님이 가장 고생 많으셨지요.”
제원중을 비롯한 의원들이 저마다 존경을 눈빛을 담아 적비연을 보았다.
확실히 죽어가는 환자를 살린 후로 이들은 적비연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적비연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묵검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곧 해가 떠오를 겁니다.”
“빨리 돌아가야겠군.”
잠 한 숨 못 자고 만검세가로 돌아가 하천웅을 호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적비연은 영단 몇 개를 보관함에 넣어 챙기고는 제원중에게 일렀다.
“나머지는 모두 경매장에서 팔 거니까 잘 보관해 두도록.”
“예, 가주님.”
제원중이 영단을 챙기는 동안 적비연과 묵검은 천상원 일 층으로 올라왔다.
“묵검, 천상원주와 함께 직접 경매장으로 가줘.”
“알겠습니다.”
“단 대주도 같이 가는 게 좋겠어. 그리고 이왕이면 한 명 더 있으면 좋겠는데…….”
묵검이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 대주가 어떻습니까?”
“예홍(芮紅)?”
적비연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자, 묵검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섬세한 면에서는 저나 단 대주보다 나을 겁니다.”
“그 녀석은 왠지 생각만 해도 피곤해지는데…….”
“그래도 제일 믿을 만한 사람 중 한 명 아닙니까?”
“흐음, 어쩔 수 없지.”
적비연이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예홍은 진천대(振天隊)를 이끄는 수장이었는데, 단휘와 동갑내기 여인이었다.
무공 수위는 단휘와 비슷한 수준.
가주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의심할 데가 없지만 특유의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적비연이 기피하는 수하이기도 했다.
‘분명히 내가 안 보이는 동안 자결을 하겠다는 둥,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둥 주절거리고 다녔을 테지.’
적비연이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묵검이 빙그레 웃었다.
“그 두 사람에게는 말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서라도.”
“뭘?”
“가주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내가 죽어도 계속 살아나는 괴물이 되었다는 걸?”
“뭐, 그런 거죠.”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언제까지 숨길 수만은 없다.
일단 믿을 만한 녀석들에게는 알려두어야 나중의 일이 편해질 테니.
“알았어. 조만간 기회를 봐서 갈게.”
“알겠습니다. 우 총관에게는 뭐라고 얘기할까요?”
“으음.”
적비연의 표정이 자못 진중해졌다.
묵검 역시 이제는 우벽산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적비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매사에 침착한 그조차도 당장 우벽산을 죽여 버리겠다고 나서는 것을 적비연이 말릴 정도였다.
지금도 우벽산에 대해 묻는 그의 표정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입을 열었다.
“최대한 이용해 보자. 일단 천상단을 한 개만 제조했다고 알려. 등급은 알려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묵검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그날 저녁, 하천웅은 만대균을 찾아 철검당으로 들어섰다.
물론 적비연 역시 호위 신분으로 함께 움직였다.
‘밤을 샜더니 피곤하네.’
적비연은 은신한 채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엄밀히 따지면 밤을 샜다는 이유만으로 피곤한 것은 아니다.
밤새도록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천상단을 만들었기에 피곤한 것이다.
사실 하천웅을 호위하는 일은 힘들 것도 없다.
하천웅이 누구한테 맞아 뒈지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하루 종일 하천웅을 따라다니면서 생각보다 빨리 첩보가 들어오는 것에 좀 놀랐다.
‘우 총관, 이 썩을 놈. 그새 만검세가에 통보를 해?’
하천웅은 지금 그 일 때문에 만대균을 찾아온 것이다.
급히 차를 들이켠 그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만 당주, 들으셨소? 적가장에서 어젯밤에 천상단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오.”
“들었습니다. 자세한 등급은 확인하지 못했다던데. 무한(武漢)의 금룡장(金龍場)에서 경매로 내놓는다지요?”
“그렇소. 아무래도 세간의 관심을 받는 만큼 적가장 내에서도 기밀 유지에 힘을 쓰는 모양이오.”
“만약 천상단을 제조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앞으로 몇 개를 더 만들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들이 아직 인면지주의 내단을 다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게 말이오. 놈들이 내단을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서 경매장에 내놓겠지.”
응, 아니야. 다 썼어.
하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만들었지.
적비연이 가만히 생각하며 지켜보았다.
만대균이 침음을 흘리다가 대꾸했다.
“천상단이 정말 소림의 대환단을 뛰어넘는 수준이 된다면 아마 큰돈을 벌 겁니다. 본가에서 빌려준 돈을 다 갚고도 남을 테지요.”
“그래서 말인데…….”
하천웅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었다.
‘저놈이 또 뭔 소리를 하려는 거지?’
가만히 지켜보던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하천웅을 보았다.
곧 하천웅의 입에서 놀라운 발언이 터져 나왔다.
“훔칩시다.”
허! 저 또라이 새끼.
적비연이 기가 차서 실소를 짓는데, 만대균 역시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뭐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오. 그 천상단을 우리가 훔칩시다.”
하지만 만대균은 대번 정색을 하고는 손을 저었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 수위가 높을수록 얻는 것도 많은 법이오!”
“이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만약 걸리기라도 했다간……!”
“어차피 지금 이대로면 아버지는 형님을 후계로 삼을 거요. 그럼 철검당도 위태로울 텐데. 그전에 내가 뭔가를 해야만 하지 않겠소?”
하천웅이 정곡을 찌르자 만대균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개망나니와 손을 잡아서는.’
욕심이 과했던 거다.
차라리 좀 불편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하기룡과 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건데.
‘제길! 머리가 복잡하군!’
하천웅의 말대로 이대로 하기룡이 후계를 잇게 되면 철검당은 존폐의 위기에 처해도 할 말이 없다.
모든 일을 두고 반목만 한 데다 적극적으로 하천웅을 후계로 밀고 있었으니.
‘이왕이면 얼빠진 놈을 가주로 세워서 허수아비처럼 부리려고 했건만.’
확실히 하천웅은 설쳐도 너무 설친다.
능력이 없으면 최소한 가만히 있기라도 하든가!
“그러게 거 왜 적가장에서 쓸데없이 비무까지 하는 과잉 행동을 하셨습니까?”
힐난에 가까운 질책이 쏟아지자 하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영감탱이도 이젠 날 우습게 보는구나.’
기분이 나쁘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어쨌든 지금은 만대균과 같은 배를 타야만 승산이 있다.
‘내가 언젠가 실권을 잡으면 이 영감탱이부터 토사구팽하겠다.’
속내를 갈무리한 하천웅이 말을 돌렸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직접 훔치는 건 위험할 수 있소. 하지만 강동칠괴 때처럼 사람을 쓰면 되지 않겠소? 만 당주님은 발이 넓으시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소만.”
“그게 그리 쉬운 줄 아십니까? 강동칠괴 사건은 이미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한데 지금 본가가 사파에서 떠도는 무리를 구해서 사주를 한다고요?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본가부터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다간 역풍을 제대로 맞을 겁니다.”
말을 쏟아낸 만대균의 표정에 경멸이 서려 있었다.
마치 ‘이런 바보와 내가 손을 잡다니. 미쳤지’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적비연은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줄곧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하천웅으로서도 만대균의 지적이 구구절절 옳으니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차를 들이켜는 소리만 어색하게 울리던 차에 만대균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확실히 판세를 뒤집으려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일단 시도는 해봅시다.”
“정말이오?”
정말로?
하천웅과 적비연이 동시에 놀라서 돌아보았다.
만대균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차도살인(借刀殺人) 같은 수법은 쓸 수 없습니다.”
“하면?”
“철검당에서 날랜 녀석들 몇을 추려서 제가 직접 하지요.”
“오오! 당주께서 직접 나서주신다면 안심이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진짜 천상단이라면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겁니다. 여의치 않으면 곧바로 물러설 겁니다. 물론 증거도 남기지 않아야겠지요.”
“그래도 좋소. 시도라도 해보는 게 어디요? 그럼 언제 시행할 거요?”
“경매장이 있는 무한에서 시도하는 게 좋겠습니다. 적가장을 잠입하는 건 어불성설. 이왕이면 그들이 무한에 도착하는 날, 밤을 노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군요.”
하긴 무한의 경매장 인근이라면 경매 물품을 노리는 도둑들이 항상 득실대는 곳이다.
그런 만큼 의심을 피하기도 좋으리라.
적가장보다 잠입하기도 쉬울 테고.
하천웅이 탁자를 탁 치고 일어났다.
“과연! 좋은 생각이오. 어차피 이동 중에는 우리의 행적을 숨기기가 더 어려울 테니. 차라리 복잡한 무한이 좋겠군. 나는 만 당주만 믿겠소!”
만대균은 대답 대신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느라 골똘한 표정이었다.
한편 이들의 대화를 모두 지켜본 적비연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하아, 이것들이 자꾸 선을 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