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34화 (35/301)

34. 치욕의 역사

“무한에 가겠다고?”

하불범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천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아버지. 제가 무한으로 가서 경매에 참여하겠습니다.”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는 게냐?”

“물론입니다. 만강원에서 제조한 영단을 판매하고, 천상원에서 제조한 천상단을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걸 매입하려는 이유도 알고?”

“당연히 만강원에서 그 단환을 연구하기 위해서지요.”

“맞다. 한데 너는 덜렁거리는 성격 때문에 돈 계산하는 일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불범이 딱 잘라 불허했다.

하지만 하천웅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흐음.”

하불범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참이나 하천웅을 보았다.

하천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일을 해낼 겁니다. 지난번 강동칠괴 사건처럼 말이지요!’

하불범의 시선이 이번에는 옆에 서 있는 하기룡에게 향했다.

“룡아,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하불범의 목소리에 하천웅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칫! 또 형님한테 의견을 물어보시다니……!’

차라리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거절하는 게 훨씬 기분이 덜 나빴을 거다.

그런데 하기룡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웅아에게도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한 번 맡겨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흐음. 너도 알다시피 한참 부족한 아이다.”

“혹여 실수하더라도 철검당주가 함께 간다고 하니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으음.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나도 받아들이마. 웅아는 들어라.”

“예, 아버지.”

“내 이번에는 너를 믿고 맡기지만 다시 한 번 더 실망을 시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물러가 보아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천웅이 물러가자 하불범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너는 동생에게만은 참 약하구나.”

“그래도 제 동생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웅아는 네 아우지. 그렇다마다.”

하기룡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으론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약하다?

웅아 녀석에게 약한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겠지요.

늘 속으면서도 번번이 기회를 내려주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제게 의사를 묻는 건 또 한 번 기회를 주고 싶다는 아버지의 의지 때문 아니었습니까?

뭐, 상관없지요.

웅아 녀석에게 몇 번의 기회를 주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녀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그 위에 제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불범이 태사의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녀석이 강동칠괴 사건 때처럼 제대로 해주길 빌어보자꾸나.”

“예, 아버지.”

하기룡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 * *

벽력적가 가주전 후원.

단휘는 옆에 선 예홍을 연신 힐끔거렸다.

“오, 오랜만이야. 홍아.”

정말이지 어렵게 붙인 말 한마디.

하지만 예홍은 듣는 둥 마는 둥 밤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그녀의 얼굴은 선녀라고 생각될 만큼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뭐랄까?

마치 이 세상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표정이랄까?

그 시리도록 처연한 표정 때문에 괜히 보는 사람마저 우울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으으. 역시 음침하단 말이야, 저 녀석.’

단휘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리는데,

“오랜만. 죽기 전에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헉,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인사가 왜 그따위냐!

역시 적응이 안 된다. 이 녀석.

그때 후원으로 묵검과 은하란이 걸어왔다.

그쪽을 돌아본 예홍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아…… 저 여자, 아름답다…… 하지만…… 결국 뼈다귀에 덧씌워진 가죽의 조화일 뿐.”

“하……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아?”

단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묵검과 은하란에게 다가가 포권했다.

“묵 호위님, 은 원주님. 어서 오십시오.”

“오래 기다렸나?”

묵검의 물음에 단휘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기분상 좀 그렇습니다.”

묵검이 예홍을 힐끔 보고는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묵검이 예홍에게 말했다.

“예 단주는 초면이겠군. 천상원주님이시다.”

“안녕하세요, 예홍입니다.”

“반가워요, 은하란이에요.”

다행히 두 사람은 평범한 인사를 나누었고, 안도의 숨을 내쉰 단휘가 묵검에게 물었다.

“저희들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에 나와 너희들은 은 원주님과 함께 무한의 금룡장으로 간다.”

“무한의 금룡장이라면 지상 최대의 경매장!”

“그래. 단 대주는 처음인가?”

“예, 처음입니다!”

단휘가 다소 들떠서 말하자, 예홍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봐야 승자보다 패자들이 넘치는 곳.”

단휘는 이마에 살짝 핏대가 서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웃음 지었다.

“그래서 언제 떠나는 겁니까?”

“이틀 후면 바로 떠날 생각이다. 그전에 너희들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다.”

“소개할 사람이라면 누구……?”

되묻던 단휘가 흠칫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마침 한 인영이 가주전을 끼고 돌아 나오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 그의 얼굴이 비치자 단휘는 물론 예홍도 이맛살을 곱게 찡그리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저자는…… 만검세가의……!”

틀림없다.

운귀다.

인면지주를 죽인 남자.

그전에 만검세가 하천웅을 호위하는 남자!

저자가 어떻게 가주전 후원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잠입한 건가?

단휘와 예홍이 반사적으로 검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묵검이 말을 붙였다.

“바로 이분이시다.”

이‘분’……?

단휘와 예홍이 멍한 표정으로 묵검을 보았다.

예홍이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묵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미친 건가?”

묵검이 땀을 삐질 흘리고는 예홍의 손을 치워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물론 믿기 어렵겠지만…… 이분이 바로 가주님이시다.”

“뭐라고요?”

단휘와 예홍이 다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끝났어. 저 정도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묵 호위님이 바보가 될 줄이야.”

“아니라니까.”

“원래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 줄 모른답니다. 가엾은 묵 호위님.”

단휘도 참지 못하고 나섰다.

“이번만큼은 저도 예 대주와 같은 의견입니다. 묵 호위님, 정말 어디 아프십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아니긴요! 은 원주님! 아무래도 묵 호위님을 천상원에 입원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래서 함께 오신 거죠?”

은하란이 가볍게 웃어넘기더니 말했다.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사실이랍니다. 이분은 벽력적가주님이에요.”

“허어.”

단휘가 입을 딱 벌리고 예홍을 보았다.

예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유상종. 바보는 바보와 노는 법. 분명 약이 잘못된 거겠지. 먹으면 멍청해지는 약을 먹은 거야.”

이쯤 되자 보다 못한 적비연이 직접 나섰다.

“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내가 적비연인 건 사실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얘기해 줄 테니까 잘 들…….”

“시끄럽다! 네놈이 뭔데 본가로 쳐들어와서 두 분의 마음을 어지럽힌 거냐? 대체 무슨 사술을 쓴 거냐!”

단휘가 다짜고짜 몸을 날려 적비연에게 쇄도했다.

찰나지간 적비연이 몸을 비틀고는 섬전보를 밟아 단휘의 등 뒤로 돌아갔다.

‘어느 틈에……! 아니, 잠깐! 그보다 지금 섬전보를 사용한 건가? 본가의 절기를 어째서 이런 놈이……!’

그 순간 지켜만 보던 예홍이 벌처럼 날아들었다.

휘리리링!

연검이 예리한 파공성을 터뜨리며 그대로 적비연의 등을 노렸다.

마침 적비연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따다다다당!

동시에 검을 마구 뻗어내니 적비연을 중심으로 기의 파장이 일어나며 벼락이 치는 듯했다.

짜르르릉! 꽝!

단휘와 예홍이 깜짝 놀라며 튕기듯 물러났다.

‘조금 전 그건 분명…….’

‘선풍뇌검(旋風雷劍)이다!’

두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분명 외모는 운귀인데…….

펼치는 검술이 완벽하게 벽력적가의 절기들이다.

이쯤 되자 단휘와 예홍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말 가주님……?’

하지만 예홍은 곧 고개를 저었다.

미친 인간이 셋이다.

여기서 자신까지 미치면 남은 인간은 의지할 곳이 없다.

한편 단휘는 자신을 힐끔거린 예홍을 보며 중얼거렸다.

“예 단주, 방금 날 미덥지 않게 본 건 기분 탓이지?”

“그래, 기분 탓이야.”

“인정하지 마! 더 기분 나빠!”

“꽤나 부정적이군.”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타앗!

순간 예홍이 다시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칫!”

단휘도 혀를 차고는 그대로 적비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여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절정 팔 단을 앞두고 있었다.

게다가 벽력적가의 무공은 누구보다 훤히 꿰고 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지 않던가?

적비연은 여유롭게 공격을 피하고는 순식간에 손을 뻗어 두 사람의 마혈을 각각 점했다.

탁! 탁! 탁탁!

“컥!”

“헛!”

두 사람의 몸이 굳어버리자, 적비연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잘 안 통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해주는 말을 잘 들어라. 여기 두 사람이 증인이다. 그래도 못 믿는다면…… 아니,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

두 사람이 눈알만 굴리다가 다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나는 지금 운귀지만, 이전에는 아상 어르신이었고, 그전에는 강동칠괴 중 막내였다. 그리고 그전에는 아상 어르신의 호신위였다가…….”

예홍이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역시 이놈이 가장 미친놈이다! 혹시 이건 전염병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이야기는 꽤 길었다.

하지만 그만큼 신빙성도 있었다.

단휘와 예홍은 때때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또 미소를 지었다가, 어떤 대목에서는 분노하기도 했다.

그렇게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두 사람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다. 물론 믿기 어렵겠지. 나조차도 지금 이런 현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모두 사실이다. 아마 너희들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적비연이 아닌 이상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말했으니까. 덧붙여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너희들이 잘 대처해야 한다. 말했다시피 무한에서 철검당주가 직접 움직일 테니까.”

말을 완전히 마친 적비연이 손을 뻗어 두 사람의 마혈을 풀어주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적비연을 공격하지 않았다.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그런대로 적비연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예홍이었다.

“그럼…… 가주님은 언제 죽나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냐고!

적비연이 내심 발끈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안 죽어. 언젠간 내 몸을 찾아서 돌아가겠지. 그땐 우리의 이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잘 마무리될 거고.”

“가주님이 죽으면 저도 순장해 주세요.”

“글쎄, 안 죽는다니까…….”

적비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 예홍은 다루기가 힘들다.

아니,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진다고나 할까?

이번엔 단휘가 물었다.

“그럼…… 홍월루는 언제…….”

따악!

순간 단휘의 뒤통수에 불이 붙었다.

“모처럼 혈액 순환이다.”

단휘가 뒤통수를 쥐고 팔짝팔짝 뛰었다.

“이봐! 이봐! 내 이럴 줄 알았어! 혈액 순환은 무슨! 결국 기분 나빠서 때린 거였으면서!”

“단 대주, 더 맞을까?”

“아, 아닙니다.”

단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곧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가주님이 무사하셔서.”

“홍월루에 갈 수 있으니까?”

“그렇지요가…… 아니라! 전 그냥 가주님이 좋은 겁니다!”

“입에 침이나 발라라. 이 호색한아.”

단휘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씨익 웃었다.

결국 적비연과 다른 사람들도 피식 웃고 말았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가주로서 웃어보는 건.

한동안 지켜보던 은하란이 적비연에게 다가왔다.

“경매 하루 전날, 하천웅이 잘 때 이걸 태워서 연기를 피우도록 하세요.”

“부적……?”

“기문둔갑술과 신술을 조합한 부적이죠. 경매 당일 약간의 효과를 발휘해줄 거예요.”

* * *

며칠 후.

장사보다도 훨씬 번성한 도시.

무한 어귀에 도착한 하천웅이 입을 길게 찢었다.

“좋아. 여기서 우리 가문의 역사를 다시 쓴다.”

그 뒤에 은신한 적비연이 내심 씨익 웃었다.

그래, 치욕의 역사를 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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