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35화 (36/301)

35. 치욕의 역사

하천웅과 만대균은 무한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취향루(醉鄕樓)라는 기루를 찾았다.

이들이 숙소를 정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적비연이었다.

벽력적가를 급습할 계획이었기에 이왕이면 부재증명이 되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했다.

“부재증명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루가 제일 좋지 않겠습니까? 밤에 술에 취해서 기녀와 함께 잠들었다고 하면 그럴싸한 증명이 될 겁니다.”

사실 적비연이 기루를 추천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하천웅이 기루라면 환장을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적비연이 몸을 빼내기가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첫 번째 이유만으로도 하천웅은 적비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취향루로 들어온 하천웅이 만대균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만 당주님, 오늘 밤에는 힘 좀 써야겠소.”

만대균이 옆에 앉은 기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답했다.

“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해보지요.”

마치 기녀를 두고 하는 말 같았지만, 실은 천상단 탈취 계획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던 두 사람은 만취한 상태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시(子時: 23시~01시)가 지날 무렵.

만대균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 잠든 기녀의 훈혈(暈穴)을 점했다.

이걸로 기녀는 아침까지 깨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아침까지 이곳에 함께 있었다고 증명해 줄 여자이기도 했다.

그는 경장을 걸쳐 입고서는 창가로 가더니 순식간에 밖으로 몸을 날렸다.

경공을 펼쳐 맞은편 건물 지붕에 착지하니, 주변에 거뭇한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모두 일곱 명.

철검당에서 가장 날래고 강한 자들이다.

만대균이 그들을 둘러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목표는 천상단이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묵검이 검에 보관 중이다.”

“검에 보관하고 있다면…….”

“검파(劍把: 검 손잡이)안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만 탈취하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물증을 남기지 않는 것이니 여의치 않으면 빠지도록 한다.”

“존명.”

“가자!”

만대균이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일곱 인영이 동시에 그의 뒤를 쫓았다.

그 시각 하천웅은…….

“음냐…… 내 앞으로 천상단을 대령하라…… 흠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잠꼬대까지 했지만 옆에 누운 기녀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녀 옆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는데, 바로 적비연이었다.

그가 기녀의 훈혈을 점한 것이다.

하천웅에게는 손대지 않았다.

하천웅 정도 되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댔다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기에.

괜히 의심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터.

다만, 은하란이 말한 대로 하천웅이 자는 동안 부적을 태워서 향을 피우기만 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하천웅이 잠에서 깨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겠지만…….

‘설마 깨진 않겠지.’

적비연이 품에서 복면을 꺼내 썼다.

조금 전 만대균이 떠나는 기척을 느꼈다.

이젠 자신이 갈 차례다.

파밧!

창틀을 밟고 날아오른 그가 순식간에 맞은편 건물 지붕에 안착했다.

주위를 막 둘러보는데,

“이것 봐. 딱 걸렸어. 너도 경매 물품 노리는 도둑놈이지?”

마침 복면을 쓴 한 인영이 지붕 위에 내려서더니 팔짱을 끼고는 비아냥거리는 게 아닌가?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둑……?’

아, 도둑 사냥꾼인가?

들은 적은 있다.

이곳에 강호 최대의 경매장이 있는 만큼, 도둑도 많고 그런 도둑만 노리는 사냥꾼도 많다고.

처음에는 만대균의 수하가 아닐까, 내심 긴장했는데 다행히 아닌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복면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가진 것 다 내놓으면 살려는 드릴게.”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 별 희한한 게 발목을 다 잡는다.

“미안하지만 내가 시간이 없다.”

“그럼 더 빨리 내놓으면 되겠…… 응?”

쉬이잇!

눈 깜빡할 사이에 복면인 앞에 나타난 적비연이 수도(手刀)를 내리쳤다.

퍽!

“커억!”

단 일수에 복면인이 거품을 물고는 고꾸라졌다.

적비연이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운귀의 몸으로 들어온 후로 경공술 하나는 비약적으로 상승했군. 그럼 늦기 전에 가볼까?”

* * *

단휘는 묵검이 하는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묵검은 검을 거꾸로 들더니 검두(劍頭: 검 손잡이 끝부분)를 돌려서 열었다.

그가 곧 텅 빈 손잡이 안에 목화솜을 채운 후 단환 하나를 집어넣었다.

저 단환은 적의 표적이 되리라.

그 말은 묵검이 적의 표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묵검은 다시 목화솜을 더 집어넣고 나서야 검두를 돌려 닫았다.

단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화솜을 넣긴 했지만, 깨지지 않을까요?”

“깨져도 상관없어. 놈들이 믿으면 그만이니까.”

“하긴.”

단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있으면 적이 나타날 것이다.

물론, 자신이 표적이 되진 않겠지만 거친 싸움이 되리라.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만검세가로서도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덤빌 테니.

그래도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할 텐데.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라면 도둑질을 하러 오다가도 수상히 여겨 돌아가지 않을까?

단휘가 궁리 끝에 입을 열었다.

“원주님은…… 안전하신 거죠?”

“안전해. 뭐, 은 원주님 말씀으로는 스스로 지킬 정도의 술수는 가지고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지. 그리고 일단은 적들도 내게 단환이 있다는 걸 아는 상태고.”

“그렇군요. 그럼 우린 자연스럽게 수다 떨 일만 남았네요. 그러다가 놈들이 들이닥치면 신나게 싸우고.”

“그렇긴 한데…… 네가 제일 부자연스럽군.”

“아…… 그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저 녀석 중얼거리는 게 보통 신경 쓰여야지요.”

단휘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 한쪽 구석에 앉은 예홍을 힐끔거렸다.

예홍은 아까부터 검을 끌어안은 채로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틀렸어. 이 작전은 끝이야. 우린 다 죽을 거야. 상대는 초절정고수. 철검당주 만대균이 직접 나선다고 했어. 우리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전멸당할 거야. 여긴 우리 무덤이 되는 거야. 무한의 어느 객잔에서 내 생을 마감할 거라곤…….”

“예 대주. 나도 초절정이야.”

듣다 못한 묵검이 말했다.

단휘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형님이 저 녀석 좀 잘 타일러 주십쇼. 저런 소리만 계속 듣다가는 정신병 걸릴 것 같다고요.

하지만 예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슷한 수준의 초절정이라고 해도 만대균은 나이가 더 많으니 이쪽이 불리한 건 마찬가지. 경험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 게다가 적의 머릿수도 우리보다 훨씬 많고. 결국 우리는 전멸. 모든 게 끝. 이 객잔은 우리의 무덤이 될…….”

“으아, 진짜 좀 그만해라. 넌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우울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흠칫거린 예홍이 단휘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단휘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 오해는 하지 마라! 그러니까 내 말은 너한테 딱히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지 그 부정적인 소리를 그만 듣고 싶은 거니까. 이건 진짜다.”

예홍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틀렸어. 이 상황에서 연애 놀이나 하는 녀석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지. 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랑 불타는 밤을 보내고 싶은 건가? 역시 정신이 나간 녀석일지도.”

단휘가 입을 척 벌리고는 예홍을 보았다.

그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 진심 때리고 싶다.

가주님은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 이런 녀석을 고르신 걸까?

눈 딱 감고 한 대만 세게 때려볼까?

그때였다.

“온다!”

묵검이 흠칫거리고는 말을 뱉었다.

그 순간 단휘와 예홍의 기도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묵검이 얼른 전음을 날렸다.

[자연스럽게 대응해라.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단휘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콰장창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서지더니 시커먼 복면을 덮어쓴 자들이 나타났다.

단휘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적을 훑었다.

모두 여덟 명.

‘딱 예측한 머릿수다. 하지만 모른 척, 자연스럽게.’

생각을 마친 단휘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는 외쳤다.

“우오오옷!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너, 너희들은 웬 놈들이냐!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는 모옵시 놀랐단다!”

“……?”

복면인들이 흠칫거리고는 단휘를 보았고, 묵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저 녀석…… 딱 한 대만 세게 때릴까?’

다행히 만대균은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세 사람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곧장 묵검을 향해 쇄도했다.

타닷!

쉬까앙!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터져 나왔다.

촤아악!

뒤로 미끄러지며 물러난 묵검이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묵검이 눈살을 찌푸리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우아아앗!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 녀석들이 왜 하필 형님을 공격하는 거지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가슴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

아, 저 새끼…… 그냥 때릴 걸 그랬다.

묵검이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단휘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좋아, 이만하면 완벽한 연기다. 이 녀석들, 내가 깜짝 놀랐다고 생각할 거야!’

한편 조금 이상한 것을 느낀 만대균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뭐지? 저 어색한 발연기는……? 혹시 저놈이 천상단을 가지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지?

묵검이냐? 단휘냐?

어쩔 수 없다.

둘 다 공격한다.

생각을 마친 그가 수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복면인 중 여섯 명이 일제히 단휘에게 달려들었다.

타닷!

“으엇!”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단휘가 황급히 물러났다.

찰나,

쉬이이잇!

한 줄기 바람이 그를 스치는가 싶더니 연검 한 자루가 춤을 추며 적들에게 날아갔다.

휘리리리링!

촤악! 따다당!

“크읏!”

가장 먼저 쇄도했던 복면인이 신음을 터뜨리며 물러났고, 나머지 다섯 명이 검을 부딪치며 튕기듯 뒷걸음질 쳤다.

단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바로 예홍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울한 소리만 중얼거리던 그녀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단 대주, 그 입 좀 다물고 네 몸이나 지켜. 그러다 진짜 죽어.”

복면인들이 이를 빠득 갈고는 동시에 몸을 날려 왔다.

“계집! 죽어라!”

“감히 방해를 하다니!”

쉬이이익!

휘리리링! 따다당! 까강!

연검이 춤을 추며 적의 검격을 마구 튕겨냈다.

단휘도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몸을 던졌다.

까가가강! 따당!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연신 튀어 올랐다.

쾅! 콰장!

빗나간 검격에 창문이 망가졌고, 방 안의 잡기들이 마구 부서졌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나마 좁은 방이었기에 싸움은 어느 한쪽에게 일방적이진 않았다.

그야말로 박빙(薄氷).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머릿수가 많은 복면인들이 조금씩 유리해졌다.

마침내 복면인의 검이 단휘의 어깨를 베었다.

촤아악!

“크읏!”

피를 뿌린 단휘가 비틀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곧이어 또 다른 복면인이 복부를 향해 검을 내질러 왔다.

‘제길, 늦었다!’

복면인들이 정신없이 펼치는 차련술에 단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최대한 내공을 끌어 올리며 두 눈을 부릅뜨는 순간,

쉬이이잇, 쩌엉!

콰당탕탕!

어디선가 바람처럼 날아든 검봉이 그대로 복면인을 튕겨내는 것이 아닌가?

방 한쪽 구석까지 날아간 복면인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굳으면서 돌아보았다.

또 다른 복면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만대균이 갑자기 나타난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웬 놈이냐?”

복면을 쓴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알려줄 것 같으면 복면을 뒤집어썼겠냐?”

* * *

“끄응…….”

하천웅이 부스스 눈을 떴다.

과음을 한 탓인지 목이 말랐다.

그가 잠결에 입을 열었다.

“끄음…… 운귀.”

“…….”

“운귀, 물 좀 갖다줘!”

“…….”

하천웅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옆에는 기녀가 혼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허공을 보았다.

“운귀?”

물론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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