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치욕의 역사
콰자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통째로 나가떨어졌다.
“어이쿠!”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은 객점 삼 층이 난장판인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거들떠도 보지 않고 제 갈 길만 재촉했다.
일상다반사인 것이다.
무한은 강호 최대의 경매장인 금룡장이 있는 곳.
그러다 보니 수시로 귀한 물건과 거금이 몰려든다.
으레 도적이 들끓고 도시 곳곳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난다.
이에 무한 사람들은 적응이 됐다.
괜히 무인들의 싸움에 휘말려 봐야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기피하고 있을 때, 객점 삼 층에서 격전을 치르는 사람들은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만대균은 호흡을 고르면서 사방을 경계했다.
지금은 일시적 소강상태.
하지만 여차하면 칼부림이 일어나 누구 하나 목이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좁은 방 안에 총 열두 명의 무인이 득실거리고 있으니 누구 하나 호흡만 흐트러져도 살검이 난무하리라.
만대균의 눈길이 적비연에게 향했다.
‘저 복면인은 정체가 뭐지?’
처음에는 벽력적가와 한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복면을 쓰고 나타난 건가?
게다가 복면인은 벽력적가의 무공을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추론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
‘천상단을 노리는 또 다른 녀석이 분명하다.’
이곳은 금룡장 인근의 객점.
이번 경매 행사에 벽력적가가 천상단을 내놓을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 만큼 천상단을 노리는 게 자신들만 있는 건 아니리라.
‘차라리 잘됐다. 본가의 소행을 숨기기에 더 좋은 조건이 되겠어.’
생각을 마친 만대균이 적비연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리겠다는 속셈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너무 빨리 나타났구나.”
“뭐, 상관없지. 결국 천상단은 내가 가져가게 될 테니까.”
“네놈 뜻대로 될 것 같으냐?”
“물론이지!”
적비연이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찼다.
그것을 신호로 방 안에 있던 무인들이 일시에 칼부림을 했다.
“노옴!”
“막아랏!”
까가가강! 따당!
난립하는 칼날 속에서도 적비연은 바람처럼 빠져나가면서 그대로 묵검에게 쇄도했다.
운귀의 몸으로 환생하고 나서는 은신과 경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단휘와 예홍이 알게 모르게 길을 열어준 탓도 있었다.
‘역시 천상단을 노렸구나!’
만대균이 곧장 보법을 밟으며 튀어나갔다.
천상단을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한데 적비연이 한 발짝 더 빨랐다.
쉬까아앙!
그의 검신이 묵검의 검과 부딪치며 불꽃이 터졌다.
“크웃!”
묵검이 신음을 터뜨리면서 주춤 물러나는 사이, 손을 떠난 검이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순간 방 안에 있는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그 검으로 향했다.
묵검이 날카롭게 외쳤다.
“단 대주! 검을 회수해라!”
“예!”
역시 영단은 거기 있었구나!
만대균이 곧장 경공을 펼쳐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적비연이 한 발 앞서서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휘리릭, 탁!
순식간에 검을 낚아챈 적비연이 그대로 창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뭐가 저리 빠른……!’
깜짝 놀란 만대균이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놈을 쫓아라!”
“존명!”
복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면서 적비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만대균은 정신없이 경공을 펼치는 와중에도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대단한 경공술이다. 게다가 기습을 당할 때까지도 녀석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전문 살수이거나 누군가의 호위이리라.
한데 사용하는 무공이 살수라기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살수들은 대체로 표적을 제거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기에 강공일변인 경우가 많다.
한데 저 복면인은 오히려 지키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호위?’
하지만 만대균은 곧 고개를 저었다.
설마.
누군가의 호위가 어째서 이런 곳에 나타나겠나?
지나친 추론이리라.
어쨌거나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
만대균이 품에서 비수를 꺼내 날렸다.
쉭쉭쉭!
빛살처럼 날아간 비수가 등에 박혀들기 직전,
따다다앙!
적비연이 간발의 차로 돌아서면서 비수 세 자루를 모두 튕겨냈다.
‘과연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군!’
적어도 절정 중단 이상의 실력자다.
뭐, 어쨌든 이걸로 거리는 좁혀졌다.
적비연이 비수를 쳐내느라 멈칫하는 사이, 만대균이 바닥을 차고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쥐새끼 같은 놈!”
그가 일갈을 터뜨리며 혜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슈아아아앙!
적비연이 몸을 회전하며 지붕의 기왓장을 연거푸 걷어찼다.
파파파앙!
쉬쉬쉬에엑!
콰콰콰앙!
만대균이 수십 자루의 검을 휘두르며 날아드는 기왓장을 전부 쳐냈다.
실제로 검이 수십 자루인 것은 아니다.
단지 만검세가의 검법 특성상 수십 자루의 검처럼 보였을 뿐.
어쨌거나 기왓장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그가 그대로 적비연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쩌어엉!
어마어마한 마찰음 때문에 주변의 기왓장이 다르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콰콰콰콰!
적비연이 기왓장을 밀어내며 주르륵 밀려났다.
‘이걸 막아?’
만대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놈이지 않나?
분명 절정 수준인 듯한데.
저놈에게는 그 이상의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지금도 놈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명백한 사기(邪氣).
‘사파였나……?’
하지만 분명 객점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는 사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정순한 기운에 가까웠다.
때문에 다른 정파 무인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완전히 다른 기운을 뿜어내지 않는가?
마치 아까 싸우던 놈과 이놈이 전혀 다른 놈 같다.
한 사람의 무공이 이렇게 차이 날 수도 있는 건가?
‘제길, 뭔가에 홀린 기분이군. 도대체 저 녀석 정체가 뭐지?’
뭐, 더 부딪쳐 보면 알게 될 터!
타다닷!
만대균이 틈을 주지 않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따다당! 까앙!
연신 금속성이 터지면서 불꽃이 일어났다.
두 자루의 검이 어지럽게 뒤엉키면서 마치 수백 자루의 검이 난무하는 것만 같았다.
만대균의 수하들은 감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편 만대균은 점점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이상하다!
분명 한 놈과 싸우는데 마치 여러 놈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검로 하나하나마다 제각각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평생 칼밥을 먹고 살았는데, 이렇게 난해한 무공은 처음이다.
정공으로 온다 싶으면 어느 순간 사특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고, 사공인가 싶으면 다시 정순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또한 사술인가……!’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적비연의 일검이 만대균의 어깨를 찔렀다.
푹!
“헛!”
파파파팟!
깜작 놀란 만대균이 얼른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훅, 훅, 훅……!”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초절정에 오른 자신이 절정고수에게 밀리다니!
물론 싸움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실력 차가 날 때는 방심하지 않는 이상 웬만해선 이변이 없는 법.
분명히 방심하지 않았는데……!
“네놈…… 정체가 뭐냐?”
만대균이 다시 한 번 이를 뿌득 갈며 물었다.
적비연이 복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글쎄, 대답할 것 같으면 이런 걸 뒤집어썼겠냐고.”
“건방진……!”
만대균이 뺨을 씰룩이다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우검필살진(雨劍必殺陳)을 펼쳐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곱 복면인들이 저마다 위치를 잡았다.
만대균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네놈이 제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이번만큼은 버틸 수 없을 터.’
아닌 게 아니라 적비연은 그들의 기세가 대번 달라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본능이 경고한다.
이건 위험하다고.
그렇잖아도 상대는 초절정고수.
거기다가 절정 수준의 수하들이 일곱이나 된다.
자신이 아무리 변칙적인 싸움으로 상대를 교란시킨다고 하더라도 잘 짜여진 합격술을 당해내기란 어려울 터.
만대균이 수신호를 내리려는 찰나,
“잠깐.”
“……뭐냐?”
만대균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비연이 검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항복. 내가 졌어. 검을 줄 테니 날 보내줘.”
“뭣이?”
이건 또 뭔 개수작이지?
만대균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안전장치는 해둬야겠지?”
“뭔…….”
다음 순간, 적비연이 돌연 몸을 돌리더니 냅다 검을 집어 던지는 게 아닌가?
쉬이이이익!
빠른 속도로 날아간 검이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오옴!”
만대균이 노호성을 터뜨리자, 적비연이 바닥을 차고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수고!”
“저 쳐 죽일……!”
수하들이 뒤쫓으려고 하자,
“멍청한 것들! 저놈은 놔두고 검을 찾아라!”
“존명!”
복면인들이 일시에 검이 날아간 방향으로 달렸다.
만대균은 저만치 멀어져 가는 적비연을 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자신을 가지고 논 녀석이 괘씸하긴 하지만 지금은 일의 경중을 잘 따져야 한다.
일단은 천상단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
만에 하나 저놈이 검을 던진 곳에 동료라도 기다리고 있다면 곤란해진다.
‘지금은 검을 회수하러 갈 수밖에!’
타앗!
만대균이 검이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 *
드르르륵! 쾅!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하천웅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운귀! 대답해! 운귀!”
“꺄악!”
기녀가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질렀고, 알몸으로 누워 있던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외쳤다.
“뭐, 뭐야? 당신 누구요!”
“쳇!”
하천웅은 거칠게 문을 닫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침 기녀 한 명이 달려왔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손님들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비켜라! 나는 내 호위를 찾으려는 것이다!”
“손님, 그래도 여기서 이러시면…….”
그때 기녀 뒤에서 묵직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천웅이 돌아보니 만대균이 서 있었다.
“오셨소?”
“예,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운귀가 보이지 않소.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만대균이 흠칫거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요.”
그제야 기녀도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물러갔다.
방으로 돌아온 하천웅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녀석이……! 아, 갔던 일은 어찌 됐소?”
“여기.”
만대균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덮개를 열자 구슬처럼 생긴 단환이 드러났다.
하천웅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오! 천상단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구려!”
“약간의 차질이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잘 해결됐습니다.”
만대균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 정체불명의 복면인을 떠올리자 다시 약이 올랐다.
다행히 놈이 던진 검은 무사히 회수했고, 벽력적가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우려했던 동료는 없었다.
하천웅이 상자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일단 이건 날이 밝는 대로 암시장에 가서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보겠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운귀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어나 보니 운귀가 보이지 않았소. 저 기녀는 점혈당한 것인지 의식을 잃은 채였고.”
하천웅이 가리킨 곳에는 벌거벗은 기녀가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만대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상하군요. 하필 이런 시기에…….”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소?”
“흐음. 억측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하천웅이 날카롭게 묻자, 뜻밖에도 운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주군.”
하천웅이 흠칫거리고는 만대균을 힐끔 보았다.
만대균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천웅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