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37화 (38/301)

37. 치욕의 역사

드르륵.

문이 열리고 적비연이 나타났다.

그런데 적비연의 손에 누군가 잡혀 있었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터져서 말도 제대로 못할 것만 같았다.

휙!

쿠당탕!

적비연이 밀어 넣자 정체불명의 남자가 그대로 엎어지면서 하천웅의 발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사…… 사려…… 주십시오……!”

사내가 눈물까지 흘리며 간곡하게 애원했다.

하천웅과 만대균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적비연을 보았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바라는 눈치.

적비연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하천웅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적비연이 싸늘한 눈빛으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저놈이 주군의 금전을 노리고 잠입했다가 제게 발각됐습니다.”

“뭐라? 그럼…… 이놈이 도둑?”

하천웅이 이맛살을 구기고는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보았다.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사내가 겨우 말을 흘려냈다.

“자…… 자모태씁니다…… 요, 용서를……! 부디……. 자비를……!”

하천웅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기녀를 돌아보았다.

“하면 저 기녀를 점혈한 것도…….”

“예, 저 녀석입니다. 주군의 혈도도 점하려다가 제 공격을 받고 달아났습니다. 그 뒤를 쫓아서 잡아오는 길입니다.”

하천웅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혹시 절 찾으셨습니까?”

“아, 뭐, 그랬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적비연이 시치미를 뚝 떼고 묻자, 하천웅이 손을 내저었다.

“별일 아니다. 갑자기 네가 안 보여서 좀 당황하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놈이 워낙 빨라서 급히 쫓다 보니…….”

“괜찮다.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었겠지.”

“그럼 이제 저 녀석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천웅이 쓰러진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정말이지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만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사, 사려만…… 주십시오……! 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어쩌긴 뭘 어쩌겠나? 이 난리를 쳤는데 죽였다간 자칫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니 그냥 보내. 더 이상 아버지한테 책잡힐 만한 일을 저질러서는 안 돼. 이만하면 이 녀석도 알아먹었겠지.”

“알겠습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사내의 목덜미를 낚아채고 돌아서려는데,

“잠깐.”

만대균이 그 앞을 막아섰다.

적비연이 고개를 들고 만대균을 보았다.

‘이놈 눈빛이 어쩐지…….’

자신과 마주쳤던 그 복면인이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일까?

만대균이 속내를 감추고는 도둑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놈은 어쩌다가 공자님을 노린 것이냐?”

적비연이 나서려는데, 만대균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제지하더니 사내에게 추궁했다.

“네놈이 직접 말해보아라. 어째서 공자님을 노린 것이냐?”

“그, 그거시…….”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거다. 나는 공자님처럼 마음이 넓지 못하다.”

말을 뱉은 만대균이 살기를 쏟아냈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진득한 살기였다.

사내가 적비연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이 된 걸까?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사내는 취향루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 * *

한 식경 전.

사내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면서 가까스로 눈을 떴다.

“크윽……!”

순간 뒷목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거친 숨을 몰아쉰 그가 어둑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그때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깼냐?”

“누, 누구냐!”

화들짝 놀란 사내가 얼른 고개를 돌리다가 뒷목이 찢겨져 나갈 것만 같은 통증에 비명을 터뜨렸다.

“크읍!”

“아프냐?”

“누구……?”

사내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어둠 속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복면……?

아! 생각났다!

취향루!

그래, 의식을 잃기 전 취향루에서 나오던 녀석을 우연히 목격했다.

복면을 쓰고 창문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도둑이라 생각했다.

경매장 인근은 늘 도둑이 들끓는 곳이니까.

사내는 지금껏 그런 도둑들만 노리면서 금품을 갈취해 왔다.

한데 저놈은…….

‘내가 단 일수에 당하다니. 칫! 그때 방심하지만 않았어도……!’

어둠 속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복면을 벗었다.

운귀의 모습을 한 적비연이었다.

“침을 놔서 억지로 깨웠기 때문에 아직 두통이 심할 거다.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네가 필요해졌거든.”

“내가 필요하다……?”

“그래. 돌아가 보니 그 녀석이 깨버렸더라고. 그래서 네놈이 증언을 좀 해줘야겠다.”

적비연이 만대균을 따돌리고 취향루로 돌아갔을 때였다.

뜻밖에도 하천웅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때 적비연은 자신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던 도둑 사냥꾼을 떠올렸다.

취향루 맞은편 건물 지붕 위에는 여전히 녀석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적비연이 사내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협조할 거지? 물론 너한테 선택의 여지는 없다만.”

“개 같은 소리 작작해라!”

찰나, 사내가 곧장 주먹을 뻗었다.

‘멍청한 놈! 날 묶어두지도 않고 깨워? 게다가 방심까지 하다니!’

하지만 사내의 주먹이 적비연에게 닿기도 전에,

“크아아악!”

까무러칠 것만 같은 고통에 사내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허억, 허억, 헉……!”

사내가 눈을 퀭하게 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왜 내 몸이 갑자기……!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적비연이 대신 해줬다.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좀 놨다. 섣불리 움직이면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그러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도록.”

“크읍……! 원…… 원하는 게 뭐냐?”

“넌 지금부터 내가 끌고 갈 거다. 거기에서 내가 시키는 대로만 말하면 돼.”

“좆…… 까.”

퍽! 퍼억!

“커억!”

적비연이 그대로 사내의 얼굴을 두드려 패고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객기 부릴 때가 아냐.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는 사흘 내로 죽어.”

“무슨 개소리를…….”

“왜 죽는지 궁금하지? 네놈의 사혈(死穴) 몇 군데에 침을 좀 놨거든. 사흘 내로 내게 다시 침을 맞지 않으면 전신의 혈맥이 막히고 점점 피가 굳어서 죽게 될 거야.”

“그걸…… 믿으라고?”

“뭐 믿고 말고는 네 자유지. 다만 신빙성을 높일 필요는 있겠군.”

말을 마친 적비연이 침을 꺼내 들었다.

사내가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지금 네 몸 아시혈 세 군데에 침(痛針)을 놓겠다. 정확히 반각 동안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의식을 잃을 거다.”

“그, 그만 둬. 그만……!”

“늦었어.”

쉭쉭쉭!

적비연이 손을 뿌리자 가느다란 침 세 개가 각각 혈 자리로 날아들었다.

푹! 푹! 푹!

순간 뇌리를 들쑤시는 고통.

“으헉! 크아아아악! 우아악!”

정말이지 끔찍한 고통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제발 그만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제대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고통에 헐떡거리는 사내를 보며 적비연이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못 믿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크아아악! 우아아악!”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사내는 정확히 반각이 지나서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사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적비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이…… 마귀 같은 새끼……! 뭔 사람의 눈빛이……!’

마치 먹이를 앞둔 맹수의 눈빛이랄까?

결국 사내가 체념한 듯 물었다.

“내, 내가 어찌하면…… 되겠소?”

“이제 말이 좀 통하는군.”

적비연이 씨익 웃었다.

그 차가운 미소를 보면서 사내는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 * *

그래, 그때의 그 공포에 비한다면야.

사내는 만대균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당장 이자가 무섭긴 하지만 날 죽이진 못할 거야.’

사내는 이곳 실권자가 하천웅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런 하천웅이 죽이지 않겠다고 했으니,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인다고 겁박했지만 쉽진 않으리라.

하지만 적비연에게 침을 맞지 않으면 정말 죽는다.

그 끔찍한 고통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진 않다.

만약 도박을 해야 한다면 이쪽이다.

“그, 그저 가장 비싼 방에 머물고 계시니…… 돈, 돈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사내가 연신 굽실거렸다.

만대균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사내를 보다가 적비연을 힐끔거렸다.

적비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괜한…… 억측인가?’

이놈이 정말 도둑이란 말인가?

말이 안 될 건 없다.

무한의 금룡장 인근은 언제나 이런 놈들로 득실거리니.

게다가 지금 당장 밝힐 수 없는 문제로 너무 끌어도 좋을 건 없다.

만에 하나 자신의 억측이 진실에 가깝다면 오히려 이런 의미 없는 추궁이 적에게 대비할 기회만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정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만대균이 사내의 머리채를 확 꺾어 잡았다.

“흐익……!”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그땐 죽는다.”

“명, 명심하게씁니다!”

만대균이 내팽개치듯 머리를 놔버리고는 턱짓을 했다.

“버리고 오게.”

“그럼.”

적비연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내를 끌고 나갔다.

하천웅이 만대균을 보며 물었다.

“아까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소?”

“아닙니다. 제 착각인 것 같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만대균이 적비연이 걸어 나간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강호 최대 경매장이 있는 무한.

그 뒷골목에는 암시장이 존재한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고가의 경매 물건이나 금품을 노리는 도둑들이 들끓는 곳.

그러다 보니 여러 어둠의 경로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이 상당했다.

노추(老醜)라 불리는 노인은 그런 물건들 중 영약이나 영단을 감별해 주는 감별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천웅은 금룡장의 공식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노추를 찾았다.

탁!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노추는 탁자 위에 올려진 목곽 상자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요?”

퉁명스러운 그의 반응에 하천웅이 내심 발끈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하천웅이 죽립을 깊이 눌러쓰며 말했다.

“이 영단의 가치를 알고자 왔소.”

“열 냥.”

“……!”

하천웅이 노추를 쏘아보았다.

고작 영단 한 알 감정하는 데 은자 열 냥을 받는다니!

하천웅의 반응을 본 노추가 고개를 돌려 좁은 창밖을 보았다.

“뭐, 싫으면 말고. 금룡장 경매가 한 시진 남았소. 시간이 다 되어갈수록 감정가는 비싸질 거요.”

하천웅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턱짓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적비연이 은자 열 냥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제야 노추가 히죽 웃고는 목곽 상자의 덮개를 열었다.

“흐음. 어디 보자…… 얼마나 귀한 영단…… 음……?”

노추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더니 영단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나참…….”

곧 노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천웅이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러시오?”

“살다 살다 별걸 다 감정해 보네. 여기 있소. 다섯 냥은 도로 가져가시오.”

“……?”

“나도 양심이 있지. 이걸 감정하고 열 냥씩 받긴 뭣하구만.”

“도대체 무슨 말이오? 속 시원하게 말을 해야…….”

“아, 글쎄! 자양강장제를 가지고 와서 감정해 달라는 사람은 당신네들이 처음이오!”

노추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뒤에 서 있던 적비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천웅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 지금 뭐라고 했소? 이게…… 뭐라고?”

“자양강장제요! 피로회복제 모르시오? 먹으면 뭐 막 잠도 안 오고 그러는 거.”

“그럴 리가……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시오!”

“몇 번을 봐도 마찬가지요. 내 목이라도 걸어야 믿겠소?”

“그런……!”

“아무튼 나는 확실히 감정은 해줬소. 그러니 이 돈은 가지겠소.”

노추가 얼른 다섯 냥을 챙기고는 휙 돌아섰다.

하천웅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만 당주는 대체 뭘 가져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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