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심영장(深影場)
구오오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적비연의 전신에서 오묘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단전이 뜨겁군. 좋은 현상이다.’
천상단 특등품을 복용한 지 정확히 한 시진이 지나고 있었다.
지금 단전이 뜨겁지 않고 차가워졌다면, 소화에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단전은 무척 뜨거워진 상태.
내공을 일주천하고 나자 단전의 온도가 차츰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일주천을 하고, 또다시 일주천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공을 운기했을까?
마침내 단전의 온도가 체온보다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천상단을 소화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양의 조화다.
운기를 해보면 저절로 몸이 깨닫는다.
더울 때 땀구멍으로 물이 배출되면서 체온을 식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이 알아서 적응을 하게 된다.
무인이라면 이러한 단전의 변화를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의식적으로 기운을 더 다스리게 된다.
이런 감각이 떨어지면 기껏 귀한 영약을 복용하고서는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다.
휘오오오오.
사방이 막힌 실내인데도 주변에서 바람이 불어와 적비연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단전이 점점 식어간다.
불에 덴 듯 뜨거웠던 단전은 이제 얼음장이 되고 있다.
적비연의 몸 전체가 단전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면서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주변으로 기온이 급감하면서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가히 혀를 내두르리라.
이러한 모습만 봐도 영단을 아무나 복용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류무사가 어설프게 영단을 복용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온몸에 열이 나서 죽거나, 차갑게 식어서 얼어 죽으리라.
다행히 적비연은 천상단의 효능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얼음보다도 차갑게 식었던 그의 몸이 차츰 정상 체온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
긴 숨을 내쉰 끝에 적비연이 두 눈을 떴다.
슈우우우.
그의 주변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기운도 몸 안으로 갈무리됐다.
적비연의 눈동자가 맑아졌다.
‘좋아, 완전히 흡수했다.’
과연 천상단의 효능은 대단했다.
웬만해서는 넘지 못할 것 같던 절정 팔 단도 뚫었다.
만약 천상단이 아니라, 수련으로 절정 팔 단을 뚫으려고 했다면 최소한 십 년은 걸렸으리라.
하지만 천상단의 도움으로 한 시진 만에 돌파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절정 구 단이 코앞이라는 느낌이 든다.
굳이 따진다면 지금의 수준은 절정 팔 단의 끝자락이라고나 할까?
물론 구 단의 벽은 높을 것이다.
구 단을 넘으면 그다음에는 수많은 무인들이 꿈에도 바라는 초절정이니까 말이다.
‘뭐, 초절정의 벽은 더 높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너무 멀리 볼 것도 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겨우 한 단을 올리고 만족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절정 칠 단의 고수가 십 년의 수련을 단축한 건 정말 대단한 성과다.
아니, 구 단을 목전에 둔 지금의 상태라면 이십 년의 수련과 맞먹는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몸이 가벼워.’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한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원래 만대균의 방이었다.
하지만 화가 난 만대균이 밤중에 돌연 장사로 돌아가는 바람에 비어 있게 됐다.
덕분에 적비연에게는 꽤나 훌륭한 내공 수련 장소가 되어주었다.
‘일단 그 꼴통이 깨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하천웅을 점혈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지난번처럼 도중에 깨어나서 설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운신이 자유롭다.
뭐, 하천웅이 깨고 나면 자신을 점혈한 것을 두고 노발대발할지도 모르겠지만 별문제 될 건 없으리라.
오히려 하불범이라면 하천웅이 더 사고 치기 전에 미리 손을 써준 걸 고마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다.
무한에 오기로 했을 때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적비연은 죽립을 푹 눌러쓰고는 곧장 창틀을 밟고 몸을 날렸다.
* * *
세상 어디에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중원에서 꽤나 번화한 도시인 무한도 마찬가지다.
금룡장의 경매가 공식 축제와 같은 행사라면, 그 빛을 등진 그늘이 무한의 뒷골목에 존재한다.
바로 경매에 출품할, 혹은 출품되었던 물건을 훔쳐서 내다파는 곳.
바로 무한의 암시장이다.
오늘 오전 적비연이 하천웅과 함께 노추를 찾아갔던 곳도 바로 그 암시장의 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그늘 속에서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찾기도 힘든 더욱 어두운 장소가 또 있었다.
비록 무한이 무림맹 권역이라고는 하나, 사파의 무인들이 아예 드나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흑천련의 영역에 정도 무인들이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이렇듯 사파 무인들이 숨어들어 장물을 사고파는 곳.
그 어둠을 흑도 무인들은 자기들끼리 ‘심영장(深影場)’이라고 불렀다.
심영장 입구는 진법과 술법으로 숨겨져 있었다.
저잣거리로 나온 적비연은 지금 그 심영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적비연이 심영장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강동칠괴 중 칠괴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던 강동칠괴는 심영장 단골이었다.
심영장에는 이따금씩 경매로도 구입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 나오곤 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한 구매이기 때문에 실제 가격보다도 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물론 그 반대로 덤터기를 쓸 수도 있지만.
저잣거리를 걷던 적비연이 어느 순간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여기부터군.’
늦은 새벽이었지만 경매 행사가 있었던 날인만큼 무한의 번화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 보였다.
황학주루(黃鶴酒樓)라는 곳을 지나 기루와 오래된 객잔을 차례로 지나갔다.
이어서 무기상점을 지나 샛길로 꺾어들었다.
막다른 길.
하지만 적비연은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적비연은 기억을 더듬어 정확히 정해진 보법을 밟았다.
막다른 길에서 몸을 돌린 적비연은 다시 또 정해진 보법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좁은 길에서 막 나왔을 때였다.
‘이건…… 놀랍군.’
적비연이 죽립을 들어 올리고 저잣거리를 보았다.
샛길로 접어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난 것이다.
황학주루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순식간에 먼 도시로 이동해 온 느낌이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도 확 줄었다.
스쳐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사특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파 무인들이다.
적비연은 곧장 강동칠괴의 단골 가게로 찾아갔다.
과연 그곳에는 가격 대비 제법 좋은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적비연은 그중에서도 십전도비(十電刀飛)라는 무기를 구매했다.
총 열 개의 암기를 손목에 착용한 다음 공력을 이용해 격발하는 장치였는데, 위급할 시에는 꽤나 유용할 듯했다.
곧이어 적비연은 공보단(功補丹)과 피독주(避毒珠)를 발견하고는 얼른 챙겼다.
공보단은 내공을 소진했을 때 복용하면 일시적으로 공력을 회복시켜 주는 영단이었다.
물론 천상원을 통해 만들려고 하면 못 만들 것도 없다.
하지만 들어가는 재료와 노력에 비하면, 그 효과가 미미한 편이다.
지닐 수 있는 내공의 양을 늘리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소모한 공력만큼만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상시에는 이만큼 유용한 것도 없으니 있을 때 챙겨둬야지.’
독을 중화하거나 미리 막을 수 있는 피독주 역시 비상약 정도로 챙겨두면 요긴하게 쓰일 터.
어차피 값비싼 보검 같은 건 필요 없다.
운귀의 몸으로 살고 있는 지금, 갑자기 비싼 보검을 들고 나타나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볼 테니.
뭐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구매 가격은 겨우 육백이십 냥.
오늘 삼백사십만 냥을 번 적비연에게는 우스울 정도의 금액.
만약 공보단과 피독주를 정식으로 구매하려면 최소한 이천 냥은 하리라.
십전도비도 수십 냥은 줘야 할 테지.
‘싸긴 정말 싸네.’
단골 가게를 나온 적비연은 문득 저만치 왼쪽 구석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을 보았다.
저기에 저런 곳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린 적비연이 낡은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기억에는 없는 곳이다.
칠괴에게는 단골이라고 할 만큼 자주 오던 심영장인데 처음 보는 가게라니.
어떻게 된 거지?
새로 생긴 곳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낡은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현판에는 기괴만상(奇怪萬商)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왠지 음침한 가게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호기심이 동한 적비연이 가게 안으로 불쑥 들어갔는데,
“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기괴만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 적비연은 강동칠괴의 단골 가게에서 막 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좌측 구석진 곳에 보이는 기괴만상.
마치 잠깐 서서 꿈이라도 꾼 것만 같다.
술법 안의 술법인가?
적비연이 미간을 모으고는 다시 기괴만상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선 그가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문을 열었다.
보인다.
계산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파가.
적비연이 안으로 스윽 들어가는데,
“이런!”
이번에도 적비연은 가게에서 나오고 있었다.
문을 잡은 채로 돌아서 보니 조금 전에 들렀던 강동칠괴의 단골 가게 내부가 보인다.
아, 진짜 환장하겠네.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기괴만상 문을 거칠게 열었다.
“노파! 나는 들어가겠……!”
하지만 마찬가지.
여전히 적비연은 강동칠괴의 단골 가게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이쯤 되자 적비연도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이리도……!’
거리로 걸어 나간 적비연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장삼 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공을 끌어올린 의도는 두 가지다.
제아무리 묘술을 부려도 강력한 내공을 지닌 자에게는 무용지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묘술을 뚫을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 버리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하아앗!”
마침내 적비연이 기합성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화살처럼 날아가며 검을 내질렀다.
쒸아아아앙!
벽력적가의 비전절기인 섬전검법의 초식, 섬전파검(閃電破劍)!
무엇이든 검봉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난다는 무시무시한 검초다.
마침내 강기를 품은 검봉이 기괴만상의 문짝에 닿았다.
찰나,
쩌어어엉!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짜르르르릉! 꽈과앙!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더니 적비연 주변으로 번개가 마구 내리쳤다.
꽈장! 꽈과과앙!
뒤로 튕겨 나간 적비연은 깜짝 놀랐다.
‘뭐지? 섬전파검에 이런 효과는 없는데?’
찰나지간,
짜르르릉, 꽈과앙!
마침내 한 줄기 벼락이 적비연이 든 검에 그대로 내려 꽂혔다.
“크아아아악!”
전신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낀 적비연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얼른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보니 기괴만상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기이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쏴아아아아!
갑자기 하늘에서 칠흑처럼 검은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비는 온 세상을 덮어갔다.
마치 신이 먹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검게 물들어갔다.
이대로는 세상천지가 암흑에 잠길 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적비연 주변의 모든 건물이 어둠에 묻혔다.
빗줄기는 어둠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어둠에 파묻히기 직전,
“포기할까 보냐!”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더니 순간 몸을 날렸다.
쒸이이잇, 콰직!
적비연이 기괴만상 문짝에 검을 쑤셔 박았다.
검은 비 때문에 세상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버렸지만, 검을 쑤셔 박은 그곳만큼은 틈이 벌어진 것처럼 빛이 있었다.
끼기기기익……!
적비연이 검을 비틀자 어둠의 장막이 비틀리면서 조금씩 벌어졌다.
벌어진 어둠 사이로 기괴만상 내부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졸음에서 깨어난 노파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흐흐! 노파, 거 구경이나 해봅시다.”
적비연을 바라본 노파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참으로…… 별난 놈이구나.”